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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철학감상

혁명은 TV에는 안나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감상평

by 장철원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은 주로 예술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예술 영화는 난해한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는 그가 만든 영화치고는 굉장히 대중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국 불법 이민자에 대해 비판하고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영화라고 열려져있다. 하지만 나는 PTA처럼 예술 영화 만들던 사람이 만든 영화가 단순히 미국 사회 풍자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겉보기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다중 구조를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영화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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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야기는 표면적인 이야기보다는 나만의 해석에 가까운 이야기다. 적어도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다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의 욕망과 신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느꼈다. 마치 이념이나 신념조차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한 밥을 연기하는 디카프리오는, 혁명가였던 자신이 어느새 사회 시스템에 물들어가는 자신을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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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작중 초반에 폭탄 전문가로 등장한다. 처음봤을 때, 그에게 혁명은 신념인 것 처럼 보이지만 막상 소중한 "딸"이라는 핑계가 생기자마자 바로 혁명으로부터 빠져나간다.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밥이 애초에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그저 폭탄 전문가로서 기술자였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술에 어울리는 퍼피디아를 따라왔을 뿐이다. 그렇게 흘러가듯 살다가 가족이라는 더 큰 책임이 생기자 쉽게 돌아선 것이다. 나에게 이 장면은 혁명가가 시스템에 흡수되는 순간으로 읽혔다. "아이"라고 하는 것 조차 시스템이 사용하는 교묘한 무기처럼 느껴졌다. 밥의 폭탄 기술은 혁명과 아주 잘 어울리지만 그 기술이 가정이라는 안전장치에 묶이면서 봉인되는 것이다. 아마 감독은 제 아무리 혁명의 기술이라도 시스템으로 편입되는 순간 의미없어 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밥은 아이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시스템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밥은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혁명을 포기하게 만드는 자기합리화의 매개체로 작동하는 것이다. 결국 밥은 시스템이 원하는 인간상이 된다. 작중에서 밥의 변화는 급작스럽게 그려지는데, 방금전까지 폭탄 터트리던 사람이 한 장면 만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 아마 감독은 이를 통해 관객이 불편한 감정이 들게끔 만들고, 현실속 많은 사람들도 자신만의 이상을 말하면서, 현실은 안정을 택하는 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어찌보면 결혼과 출산이라는 제도는 시스템이 고안한 가장 교묘한 사회 질서 유지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혁명은 근본적으로 불확정성에서 기인되는데, 결혼과 출산은 인간을 철저히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묶어버린다. 결혼, 아이, 직장, 주택, 대출로 이어지는 인생 루트를 밟는 순간, 그 사람은 시스템이 설계한 안정된 경로를 벗어나기 어렵다. 감독은 주인공 밥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한때는 혁명가였지만 시스템으로 편입된 인간의 표본을 말이다. 그는 폭탄을 만들 던 손으로 딸의 장난감을 고쳐준다. 그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바뀐 것이다.



애초에 그는 혁명 조직에 들어갔던 것도 신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폭탄 기술이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을 찾고 싶어서였다. 이는 자신의 신념이 아닌 기능적 소속 욕구에 해당한다. 우리 주변에도 밥처럼 학교나 회사 같이 어딘가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거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퍼피디아와는 다르게 밥의 저항은 항상 제도화된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밥이 혁명 조직에 들어갔을 때 조차, 혁명 단체는 이미 조직화된 곳이었다. 조직이라는 것은 이미 내부에 규율이 존재하고 조직원들은 그 규율을 따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밥의 저항은 의외성이 크진 않다. 실제로 밥은 시스템을 위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언제나 시스템의 예상가능한 궤적 안에 있었고, 그의 반항조차 시스템의 허용 범위였다. 시스템은 퍼피디아와 같은 존재는 위험하므로 총으로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밥과 같은 인물들은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는 딸이라는 약점을 주면 알아서 혁명을 포기하고, 알아서 무기력해져서 술이나 마시며 인생을 보낸다. 게다가 딸이 납치되었을때도 그는 예측 가능한 경로로 움직인다. 밥은 통제 가능한 인간이다.반항도, 선택도, 사랑도, 모두 시스템이 짜둔 스크립트 안에서만 작동하는 인간으로 현대사회가 길러낸 완벽한 순응형 인간이다.




작중에서 밥은 오랫동안 떠나있던 혁명 조직에 전화해서 피난처를 물어본다. 이에 혁명 조직은 밥에게 암구호를 묻는데, 밥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을 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심지어 여러번 등장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는데, 이 장면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암구호란 무엇인가. 암구호는 혁명 조직의 멤버임을 증명하는 것인데, 밥은 기억을 못한 것이다. 밥이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혁명 조직에 진심으로 헌신한 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퍼피디아와 같은 진짜 혁명가라면 암구호는 몸에 새겨 절대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기도 했다. 밥은 혁명 조직을 떠나 16년 동안 시스템 안에서 살았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딸을 키우며 생계 유지에 바빴다. 그러다보니 원래 마음에 없던 혁명 조직에 추가적으로 기억에서 조차 잊혀진 것이다. 밥이 암구호를 잊어버린 장면은 그의 정체성을 상실한 장면으로 보였다. 그는 더이상 혁명가 밥이 아닌 딸바보 밥이 된 것이다. 시스템은 총이 아닌 시간으로 밥을 죽인 것이다. 16년이면 그의 기억도, 신념도, 정체성도 모두 흐리게 만들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비유하면 밥은 현실 속에서 본능을 타협하는 자아(ego)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감독은 밥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자아가 얼마나 취약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밥을 보고 있자면 본능과 질서 사이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현대인의 자기기만이 생각난다. 현대 사회로 비유하면 어렸을 때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가기 싫다던 아이가 반항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응하고, 시스템이 요구하는대로 대학가고 직장 구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대출 받는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굴레를 씌우면 알아서 꼼짝하지 못하므로 시스템은 밥 같은 사람은 죽일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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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피디아


퍼피디아는 밥과는 대조적이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도 혁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보다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냉정한 인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이상을 잃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작중에서 퍼피디아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총을 쏘고, 싸우고, 달리고, 폭파시킨다. 그런데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녀의 내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퍼피디아를 보며 마치 혁명이라는 단어를 퍼피디아라는 인물을 통해 의인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혁명은 이성보다는 감정에서 시작된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혁명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퍼피디아는 단순히 사회의 이레귤러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퍼피디아의 폭력성은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체제에 순응해 본능을 완전히 억제하고 살아가는 밥과는 다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퍼피디아는 이드(id)에 가깝다고나 할까.이런 면에서 시스템이 퍼피디아를 제거하고 싶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퍼피디아는 예측 불가능하며, 시스템화도 불가능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퍼피디아라는 존재 자체가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다. 시스템 입장에서는 퍼피디아 같은 인물은 통제 불가능하므로 껄끄러워한다.




물론 퍼피디아조차 완전히 시스템 밖으로 나가진 못한다. 돈을 쓰는 순간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고, 법을 따르는 순간 역시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시스템 밖은 없다. 심지어 혁명을 하는 퍼피디아 조차 총알이 필요했는데, 그 총알 역시 시스템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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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조


퍼피디아가 이드라면 록조는 초자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겉으로 보이기에 록조는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항상 군복을 입고, 명령에 복종하고, 냉철한 말투와 감정 통제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게 시스템에 충성을 바쳤던 록조는 영화 후반에 결국 크리스마스 클럽 가입을 거절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록조가 단순히 시스템을 상징하고 초자아를 상징한다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겠지만 그는 결국 시스템에 인정받고 싶어하는 자였을 뿐이다. 그는 혈통 증명에 대한 강박으로 유전자 키트에 집착했고, 엘리트 집단인 크리스마스 클럽에 들어가려고 필사적이었다. 록조라는 인물은 인정 욕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시스템의 주인이 아닌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혁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퍼피디아에게, 시스템과는 반대급부에 위치한것 같은 그녀는, 시스템을 상징하는 록조 대령의 아이를 가진다. 록조는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퍼피디아라는 한번의 욕망 때문에 시스템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시스템은 인간성을 용납하지 않고, 완벽한 기계와 같은 인간을 원한다. 감정도, 욕망도, 실수도 없는 인간. 시스템에게는 한번의 규율만 어겨도 즉시 폐기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냉정한 폭력성이다.




그의 자식 윌라는 기계처럼 보이던 록조도 인간이었다는 증거인 동시에 시스템 입장에서는 제거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작중에서 록조가 윌라를 죽이려고 한 건 자신의 인간성을 지우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자기 딸을 죽이면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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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윌라는 밥이 혁명을 포기한 명분이자 보상과 같다.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그냥 순응하라고 강요하면 반발하므로, 좋은 집, 좋은 차, 명문대 학위, 사랑하는 가족과 같은 목표를 부여한다. 이로 인해, "나는 꿈을 포기한게 아니라 가족을 위해 현실적인 선택을 한거야.", "나는 회사의 노예가 아니라 아이 교육비를 위해 일하는 거야.", "나는 가족을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대출 받은거야"와 같은 명분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윌라는 밥에게 포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명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템은 윌라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윌라를 인질로 잡아 밥을 계속 통제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윌라의 친아버지는 록조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감독은 친아버지를 록조로 설정했을까? 밥이 목숨걸고 지키려는 자신만의 의미가 사실은 시스템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밥은 윌라가 혁명 전선에 있었던 자신의 딸이라고 믿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의 딸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삶속에서 "내가 정한 목표"라고 믿는 삶의 목표들은 사실은 시스템이 심어준 것이다.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조차 프로그래밍 한다. 철학자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밥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욕망하라고 지시한 것을 욕망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시스템이 주입한 욕망이고, 내 선택이라고 믿었던게 사실은 시스템이 허용한 옵션 중 하나인 것이다. 나의 꿈이라고 믿는게 사실은 광고와 교육이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었던 것은 정말로 내가 원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그렇게 세뇌시켰기 때문인가. 좋은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집이 없으면 루저라고 세뇌 당했기 떄문인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윌라는 혁명에 뛰어드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스템의 딸로 태어난 윌라가 비장하게 혁명에 가담하는 이 장면은 혁명마저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단순하게는 윌라가 혁명 조직에 들어가며 혁명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퍼피디아의 정신을 윌라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윌라의 혁명은 진짜가 아니다. 윌라의 혁명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혁명조차 컨텐츠로 만들어 낸 상품이나 브랜드에 불과하다. 시스템 입장에서도 혁명 조직을 통해 불만을 가진 자들을 한 곳에 모아둘 수 있고, 반란의 여지가 있다는 환상을 줌으로써 조직원들을 안심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혁명에 뛰어다는 윌라는 누구의 길을 걷게 될까? 퍼피디아의 길일까 아니면 밥의 길일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선택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윌라가 록조의 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시스템으로 갈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퍼피디아의 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혁명으로 갈 운명이다. 윌라 스스로는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퍼피디아의 편지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움직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면서 선택하는 순간이나 깨달음의 순간은 편지, 책, 영화, 만화 등에 의한 외부 요인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것을 스스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영화라는 외부 매체를 보고 난 후에 깨달은 점을 쓰고 있으니 이는 나 스스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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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TV에는 안나와"


TV는 단순한 미디어가 아니라 개인의 현실에 적용되는 일종의 필터이다. TV 속에는 가정의 행복, 질서의 안정, 예측 가능한 인간의 서사만 존재한다. TV는 일종의 현대판 종교이다. TV는 사람들에게 지금 삶이 정상이라는 환상을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혁명을 상상할 수 없게 훈련된다. 밥이 폭탄을 만들던 손으로 TV 리모컨을 잡는 장면은 밥이 무력해진 것을 상징한다. 실제로 밥은 작중에서 16년간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산다. 사실상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요즘은 TV의 시대를 지나 유튜브의 시대다. TV가 아닌 유튜브의 시대에도 저 말은 유효할까? TV는 방송국을 통해 엄격히 검열된 내용만 방송에 내보낼 수 있지만, 유튜브는 누구나 영상을 만들어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스템 입장에서는 유튜브가 위협이 될 수 있는데, 왜 유튜브를 허용하는 것일까? TV 시대때는 사람들이 스스로 세뇌당하고 있다고 의심했었다. 그래서 TV가 아닌 다른 출판물이나 지하 방송과 같은 대체 미디어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튜브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부여했다. 유튜브에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저항을 멈춘다. 중요한건 자유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없다는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을 담은 영상을 올려도 문제다. 퍼피디아 같은 사람이 유튜브에 진실을 올려도 그 옆에 음모론 영상을 같이 띄우고, 그 옆에는 예능 영상이 같이 뜬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에게 퍼피디아 영상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다른 재밌는 영상으로 주의를 분산시킨다. 진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보들 속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혁명은 TV에는 안나오지만 유튜브에는 나온다. 하지만 조회수는 20회...게다가 알고리즘도 퍼피디아의 혁명 영상을 검열할 수 있다. 해당 영상을 문제 컨텐츠로 분류해 추천하지도 않고 수익화하지도 못하게끔 만든다.




게다가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활동들은 실제 사람들의 행동을 억제한다. 예전에는 혁명가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서 행동했다. 분명 위험했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트위터에 글을 쓰면서 스스로 저항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분노를 댓글로 품으로써 실제 현실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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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작중에서 퍼피디아와 같이 자신의 본능이나 욕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것은 현실적으로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은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혁명 단체에 아무리 총과 대포가 있다고 한들 한 국가의 군대를 이길수는 없고, 사법, 의료, 언론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시스템에 속한다. 혁명 조직이 나름 크다고 한들 시스템과 싸워서는 전혀 승산이 없지 않을까? 감독은 시스템에 이기진 못하더라도 시스템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은 애초에 혁명의 승리에는 관심이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감독이 승리를 원했다면 영화 제목이 승리(victory)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이다. 즉, 승리가 아닌 계속되는 전투라는 의미이다. 감독은 전투에서 이기고 지는게 아니라 전투 자체, 즉,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밥처럼 포기하고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것인지, 퍼피디아처럼 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 것인지 말이다.




시지프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는 바위를 산위로 영원히 밀어올려야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시지프스는 불행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대한 저항도 마찬가지다. 신화속에서 바위가 계속 굴러떨어지듯, 시스템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싸우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는 힘들어도 작은 균열을 낼 수는 있다. 퍼피디아는 이민자 구금소를 습격해서 사람들을 풀어준다. 사람들을 구해준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은 강력하지만 적어도 퍼피디아가 이민자들을 구해주는 순간만큼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쓴 편지가 후대에 윌라를 각성시켰으니 이것도 작은 승리 아닐까?




시스템이 가장 무서워 하는건 절망한 대중이다. 잃을게 없는 절망한 대중은 혁명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의 희망이 있다면 불합리한 현실도 참을 수 있다. 조금만 참으면 주식, 코인,자기개발 유튜브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0.1%의 성공 사례를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희망을 가진다. 한마디로 희망 비즈니스라고 해야할까. 사람들은 주식, 코인, 부동산에 집중하면서 시스템을 바꾸려고 에너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개인적 부의 축적 방향으로 사용한다. 시스템 입장에서는 개인이 부에 집중하는 것이 더 반갑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연대하는 것이 없어지며, 실패하면 자기 탓으로 돌리고, 성공하면 시스템을 옹호하며 나도 됐으니까 너도 하라고 부추긴다.




혁명은 여유에서 나온다. 생각할 시간과 에너지가 있어야 각성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회사에서 8시간, 출퇴근 2시간, 퇴근하고 월천 버는법 검색 3시간, 잠 6시간을 제외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 혹자는 말한다. 일단 돈이 있어야 다른 것을 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돈이 없으면 생존이 어렵고,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은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돈이 있는 순간"은 언제 올까? 현재 목표 금액에 도달하면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할 것이다. 1억을 모으면 10억을 목표로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스템이 설정한 목표인 돈을 쫓지만, "일단 돈이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돈을 목표로 살아가지만 막상 돈모아서 뭐할건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퇴근하면 유튜브보고, 주말에는 주식 공부를 하며 머릿속에는 온통 돈으로 가득차있다. 이렇게 되면 개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자신의 인생 방향, 내가 사는 이유, 이 시스템은 옳은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죽어야할까.

적어도

주식 공부 10년,

코인 공부 5년,

돈버는법 검색한 수천시간 등을

되돌아보며 죽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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