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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프레데터 인가?

영화 프레데터 : 죽음의 땅 감상평

by 장철원

영화 프레데터: 죽음의 땅을 보고 왔다. 예전에 에일리언은 많이 봤지만 프레데터를 보는건 처음이라 기대 하고 관람했다. 전체적인 스토리나 액션, 영상미 모두 좋았는데, 그런 기술적인 면 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프레데터를 보며 인간 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프레데터, 인간, 에일리언과 인간 사회를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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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라는 종족의 특성


우선 프레데터라는 종족은 단순 괴물 외계인을 넘어 강력한 시스템으로 각 개인을 통제한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규율, 명예, 위계, 통제를 우선시하는데, 이는 현대 문명의 완성된 형태처럼 보였다. 또한 그들의 강력한 무기까지 생각하면 현재 인류의 발전하면 프레데터처럼 될 것 같이 느껴졌는데, 문명이 발전하려면 강력한 시스템을 활용한 사회 통제는 필수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데터는 겉보기에는 무차별 사냥을 하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사냥의 법칙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약한 개체는 사냥하지 않고, 명예없는 사냥은 금지되며 , 기술은 철저히 통제된다. 그들의 룰을 보면 프레데터 는 혼돈을 억제하고 완벽한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발전된 문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시스템이 없었다면 자기들끼리 내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개체들끼리 서로 공존하려면 더욱 강력한 시스템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인류 문명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인류 초기에는 자유와 혼돈이 지배했지만, 도시가 커지고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법, 데이터, 감시, 알고리즘 등 보이지 않는 시스템은 어느새 필수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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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와 인간의 차이점


물론 인간과 프레데터의 차이점도 존재한다. 프레데터 문명은 완벽히 통제된 시스템 덕분에 강하지만, 그만큼 창의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발전보다는 현상유지를 중요시하는데, 수천년동안 계속 사냥하러 다니고 명예와 트로피를 수집하느라 변한게 거의 없다. 반면 인간의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실수하고 발전하고 혁신한다. 통제가 질서를 만들고, 혼돈이 진화를 만든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도 중세 봉건제도와 같이 강한 통제 시스템이 발전을 막은 사례도 존재하긴한다.




그런데 인류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고도화되면서 프레데터처럼 점점 더 강력한 통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분야에 상관없이 산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국 가요계를 보면 서태지가 등장할때 즈음인 1990년대를 생각해보면 그 때도 기획사 개념이 있었지만, 기획사 없이 활동하는 가수들도 있었고, 체계가 잡히기 전이었기 때문에 각자 살아남으려고 스스로 차별점을 만든 결과 개성있는 가수들도 많이 등장했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자나 거대 기획사들이 아이돌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가동하는 지금에 와서는 누가 누군지도 모를 아이돌이 양산되고 있다. 그들은 성공 공식을 만들어버렸다. 연습생 시스템, 비주얼, 안무, 프로듀싱 등 모두 표준화되었다. 시스템은 리스크를 싫어하기 때문에 검증된 공식만 반복하는데, 그 결과 아이돌들은 칼군무를 보여주며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잠시 나왔다가 금방 사라진다. 음악은 기억에 남지 않고 소비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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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프레데터화 되어 가는 사회


내가 어렸을때는 부모님 세대와 즐기는게 전혀 달랐고 세대차이가 느껴졌었다. 1970년대와 1990년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음악, 패션, 가치관, 기술 모두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2000년과 2020년은 스마트폰이 좀 더 좋아지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정도 생긴거 정도 빼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즐기는 것도 비슷하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알고리즘 추천을 받고 같은 취향으로 길들여진다. 이는 인류의 문화적 진화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 아닐까.




비단 가요계의 문제는 아니다. 학계에서도 논문을 위한 논문이 나올 뿐 패러다임의 변화는 없어진지 오래다. 그들의 목표는 탑저널에 논문 내는 것이지 세상을 바꿀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게 목표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가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그들의 아이디어는 너무 급진적이라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딥러닝으로 세계가 변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 역시 이미 예전에 존재하던 이론을 컴퓨터의 발전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함수를 GPU 연산력을 활용해 구현만 한 정도지 패러다임 자체가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력한 시스템이 개성을 말살하고 문명 전체가 발전보다는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낭비없는 최적화를 목표로 하는 동시에 개성을 제거해버렸다. 최적화는 기존에 하던 것을 보다 더 잘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지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 아니다. 가요계는 흥행 가능성을 수치화하고 표준화된 성공 공식을 통해 아이돌을 반복 생산함으로써 팔리는 음악을 최적화했다. 그 결과 예술이라기보다는 상품 기획에 가까운 느낌마저 든다. 학계는 지식 탐구가 아니라 성과 측정 시스템이 장악해버렸고, 논문은 연구의 목적이 아닌 KPI가 되어버려 논문 생산을 최적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로 간주되어 버린다. 시스템 통제의 목적은 질서뿐만 아니라 리스크를 제거하는 것이다. 리스크를 제거하면 창의성도 사라지는데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가동하지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스템이 너무나 잘 작동하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 창조가 아닌 재생산의 시대에 접어든 것일까. 완벽히 효율적인 알고리즘은 새로운 변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스템이 커질수록 실패에 따른 비용 역시 커진다. 대형 기획사는 수백억 투자하는데 실험적인 가수를 만들긴 힘들다. 대학은 평판 관리를 해야하므로 독특한 연구는 하기 힘들고 안전한 선택을 한다. 게다가 성공 측정 기준까지 고정되면서 모두가 기준에 맞추려고만 한다. 지표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의 진화는 시스템 외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과학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논문을 대학교가 아닌 시스템 외부인 특허청에서 일할때 발표했으니 말이다. 인류는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새로운 것을 만드는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조합하는 시대에 와있다.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인류는 프레데터화 되고 있는 중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서와 효율로 유지되고 있지만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기계와 같이 느껴진다. 시스템이 너무 완벽하면 결국 질식한다.




무서운 사실은 이 시스템이 나름대로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K-POP은 세계적으로 잘 팔리고 있고 논문도 계속 나오는데다, 딥러닝으로 돈도 벌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프레데터 종족처럼 강력하고 안정적이지만 정체된 것이다. 물론 희망은 있다. 시스템이 완벽해보이지만 그 안에서 혼돈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는 반항, 예술, 혁명 또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시스템이 만든 피로감과 무의미함 속에서 "왜 이래야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씨앗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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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와 도구


프레데터와 인간의 또다른 공통점은 각 개인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데터는 강함을 추구하지만 그들의 강함은 도구의 영향이 크다. 만약 그들에게 투명 망토, 열 감지 헬멧과 같은 도구가 없다면 다른 종족들과 싸워도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다. 프레데터의 힘은 기술 기반의 인공적인 힘이다. 그들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기술격차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성능의 도구를 통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데, 이 부분에서 인간과 어느정도 비슷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맨몸으로는 사자나 늑대보다 약하고 감각도 둔하다. 인간에게는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빠른 속도도 없고, 강한 턱도 없다. 하지만 도구와 기술을 통해 생태계의 정점을 차지했다. 즉, 인간의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기술적 진화에 가깝다. 프레데터는 외계인이 아닌 인류의 거울 아닐까.




프레데터는 도구 없이는 강하지 않다. 이는 기술 문명의 모순이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강해지지만 동시에 기술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총 없는 군인, 스마트폰 없는 현대인, 인공지능 없는 연구자 등 도구는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지만 동시에 의존하게 만든다. 어느새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길도 못찾고, 인터넷 끊기면 일을 못한다. 우리 조상들은 최소한 불도 피울수 있고 사냥도 할 수 있었는데 현대인들은 대부분 그것조차 할 수 없다.




프레데터는 개채의 진화를 멈추고 도구 발전에 집중했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사냥했지만 육체적으로 강해지거나 전략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닌 더 좋은 무기만 발명한 셈이다. 인간도 비슷한데, 인간의 뇌 용량은 수만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체능력은 오히려 퇴화했다. 대신 도구만 엄청나게 발전시켰는데, 심지어 요즘에는 AI라는 도구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조차 외주를 준다. 프레데터와 인간 모두 도구의 강함을 자신의 강함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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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vs 프레데터


이쯤에서 또다른 SF 영화인 에일리언과 프레데터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에일리언은 프레데터와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규율, 명예, 질서 등 강력한 시스템으로 조직된 프레데터와 달리 에일리언은 순수하게 본능을 따르며 특별한 목적이 없다. 그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 단지 DNA에 프로그래밍 된 대로 행동할 뿐이다. 프레데터는 강력한 시스템으로 개체 하나하나를 통제하므로 각 개인의 자유는 없지만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반면 에일리언은 완전한 무질서 상태이다. 물론 에일리언도 군집을 이루긴하지만 이는 시스템이라보다는 본능적으로 형성한 네트워크 형태에 가깝다. 프레데터는 질서, 에일리언은 혼돈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프로이트 심리학에 비유하면 프레데터는 초자아, 에일리언은 이드에 비유할 수 있을까.




프레데터의 힘은 기술과 지성에서 나오는 반면 에일리언의 힘은 생물 그 자체에서 비롯하며 그들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프레데터는 개인주의적이고 혼자 사냥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그들은 무리를 짓긴하지만 각자는 독립적인 전사에 가깝다. 반면 에일리언은 각 개체는 크게 의미가 없다. 여왕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개별 에일리언은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다. 하나가 죽어도 상관없다. 집단이 살아남고 번식하면 그만이다.




프레데터와 에일리언 모두 강력한 종족이지만 약점은 존재하는데, 우선 두 종족 모두 다른 종족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프레데터의 경우 그들의 정체성은 강한 적을 사냥한다는 점에서 나오므로 사냥감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약한 종족은 사냥하지 않으므로 타자의 강함에 기생하는 것이다. 또한 프레데터는 시스템이 너무 강력해 경직되어 예상밖의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대응이 취약하다. 한편, 에일리언은 숙주가 없으면 번식할 수 없어서 다른 생명에 기생한다. 게다가 그들은 여왕에 의존적인데, 여왕을 죽이면 하이브 전체가 무너진다.




두 종족은 양극단을 상징하는데, 사실 양쪽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레데터의 세계는 정체되서 사라질 수 있고 에일리언의 세계는 폭주하다가 사라질 수 있는데, 결국 두 속성이 융합되어야 진화가 발생할 수 있다. 프레데터처럼 시스템이 너무 경직되어 있으면 적응력이 떨어지고, 에일리언처럼 본능적이고 적응력이 좋아도 의미와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하다. 에일리언 VS 프레데터는 단순한 괴수 전쟁이 아니라 혼돈과 질서가 충돌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한는 과정을 담아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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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 : 인간 : 에일리언 = 대기업 : 중소기업 : 스타트업


프레데터, 인간종족, 에일리언을 현대사회에 비유해보자. 우선 프레데터는 엘리트 집단이나 대기업으로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프레데터와 같이 규율, 절차, KPI 등으로 강하게 직원들을 통제하고 발전보다는 유지,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그들의 업무 프로세스는 결재라인 5단계를 거쳐야하며, 매뉴얼대로 진행하고, 선례가 없으면 하지 못한다. 대기업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게 중요하므로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혁신을 의미한다. 실패하면 누군가 책임져야하므로 똑같은 제품을 조금씩 개선해서 계속 판다.




그들은 인재를 뽑을 때도 시험이나 면접을 통해 필터링된 인재만 시스템에 편입시킨다. 그들은 지원자의 잠재력이나 개성을 보지 않고, 명문대, 토익 900점, 인턴경험 등 자신들이 설정한 조건으로 검증된 강자만 뽑는다. 프레데터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듯 대기업은 직급과 연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대기업에 다닌다"와 같은 타이틀 자체가 정체성이 되어버리지 그것이 실제로 의미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반면 에일리언은 스타트업에 비유할 수 있다. 대기업에 비해 명확한 규칙이 없고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운영 방침이 바뀔 수 있다. 에일리언에서는 여왕 중심으로 하이브가 운영되듯, 스타트업도 대표 중심으로 돌아간다. 스타트업에서는 생존 본능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데, 성장하면 폭발적으로 커질수 있는 반면 실패하면 바로 사라질 수 있다. 도구와 같은 자원에 의존하는 프레데터와 달리 스타트업은 본능과 민첩함으로 승부한다. 스타트업에서는 명예나 질서보다는 살아남는게 최우선이다. 에일리언이 미친 성장속도를 보여주듯, 스타트업도 속도가 생명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종족은 현실로 치면 프레데터와 에일리언의 중간인 중소기업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소기업에는 대기업처럼 완벽한 시스템이 없고, 스타트업처럼 순수한 본능도 없다. 대기업처럼 안전하지도 않고 스타트업처럼 불안하지도 않는다. 중소기업에도 규율은 있으나 어느정도 유연함은 존재하는데, 그들에게 있어 질서는 일시적인 질서에 가깝다. 프레데터처럼 첨단 무기도 없고, 에일리언의 폭발적인 번식력도 없다. 프레데터처럼 완전히 정체되진 않지만 에일리언처럼 빠르게 진화하지도 못한다. 중소기업은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대기업이 안하고, 스타트업이 못하는 그 사이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성장해서 대기업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간의 관계를 보자. 우선 프레데터와 에일리언.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관찰하다가 성공한 스타트업이 나오면 인수합병하던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따라만든다. 프레데터가 강한 사냥감을 찾듯, 대기업은 성공한 스타트업을 사냥한다. 프레테더와 인간은 어떨까. 대기업은 중소기업에게 단가 후려치기, 불공정계약을 통해 착취한다. 프레데터가 인간을 사냥감으로 보듯,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착취대상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에일리언과 인간을 보면 스타트업은 중소기업 시장을 파괴한다. 배달앱이 동네 치킨집을 죽이고, 쿠팡이 동네마트를 죽인다. 에일리언이 숙주를 파괴하듯, 스타트업은 기존 시장을 파괴하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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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


이번에는 나라는 개인에 집중해 생각해보자. 당신은 프레데터, 인간종족, 에일리언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영화를 보면서 나에 대해 생각을 했는데, 나는 인생의 방향 전환이 꽤 있었다. 나는 예전에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법인을 운영 중이다. 아마 대학원에 다닐때는 스스로 페레데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논문, 학위과 같은 명예를 추구하고, 위계가 명확하며 논문 심사 절차와 같은 강한 시스템 통제가 있는 환경.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조화된 경쟁 속에서 강한 개체로 남으려했다. 그러다가 퇴사를 하고 규칙없는 야생으로 나오면서 스스로 에일리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나온 나에게는 더이상 명에도 없고 투명 망토같은 강력한 도구가 없었다. 그저 내 실력과 판단력만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생존하는 것이 목표이다.




나는 스스로 많이 변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프레데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작중에서 프레데터는 감성적인 것을 나약하다고 생각하고, 타인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행동하며, 타인을 도구 취급한다. 아마 내 인생에서 프레데터로 살았던 꽤 길었기 때문에 여러 일을 겪으면서 스스로 방어기제가 생긴것 같기도하다. 대학원에서 수식의 세계에서 감정은 방해물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비합리적 결정이나 감정이 오히려 본질에 가깝고, 회사에서는 말로는 팀워크라고 하지만 실제론 책임을 떠넘기기 일수니 점차 혼자 일하는게 편했다. 대학원에서 학위는 장사 수단이고, 논문은 테뉴어를 따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회사에서 비즈니스는 돈버는 수단이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아직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프레데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프레데터 세계관인 대학원이나 회사에 있었던 영향도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기본 성향도 어느정도 맞았으니까 공부나 회사생활을 오래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살면서 들은 말이나 별명은 "컨트롤 장", "장체계", "수업이 체계적이야", "알람시계같다", 심지어 외국인 친구에게는 "You are organized"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는데, 각자 다른 집단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나라는 사람이 질서를 추구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대학이나 대기업에서 내 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실제 나라는 사람은 혼돈을 조율해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복잡한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성향을 가진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직원을 많이 채용해서 회사를 키운다해도 그저그런 중소기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대기업이 된다고해도 결국 나 스스로도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 프레데터처럼 정체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집만 커지고 나라는 인간은 발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것이다. 그때가 되면 직원들 월급 줘야하니까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고, 사람을 뽑았으니 일을 시켜야하므로 업무 분장이 필요하다. 직원 평가를 위한 기준과 규칙이 필요하며 위계가 생긴다. 내부적으로 소통 비용이 증가되며 개인 작업 시간이 줄어들며 조직 유지가 목적이 되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게 다음 생으로 미뤄진다. 회사를 먹여살리기 위해 일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작은 규모로 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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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무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프레데터의 피가 섞여있는 에일리언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하이브리드형 인간으로 제 4의 길을 걸어야할까. 에일리언의 본능만 따르면 불안정하고, 프레데터의 통제만 따르면 정체된다. 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프레데터적으로 질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세상을 단순한 구조로 정리하려고 하며, 체계와 논리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반면 행동방식은 에일리언에 가깝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기존 시스템을 거부한다. 물론 에일리언처럼 완전한 무의식적 본능은 아니고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에 차이가 있긴하다. 지금의 나는 에일리언처럼 자유롭게 창조하지만 그 창조의 기반은 프레데터 적인 질서이다. 계획을 세우고, 체계를 만들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한다.




프레데터의 체계 자체가 나쁜게 아니라 체계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프레데터는 체계를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 명예를 쌓기 위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 목표를 위해 사용한다. 반면 나는 체계를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일하려고 쓸 수 있는 등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질서와 자유는 대립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서와 자유를 서로 적대적인 개념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체계의 질서는 프레데터를 상징하고 프레데터는 억압하므로 나쁜것이라고 생각하고 혼돈의 자유는 에일리언을 상징하고 에일리언은 해방을 상징하므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질서 없는 자유는 혼돈 그 자체고, 자유롭지만 방향이 없다. 그냥 흘러가는데로 사는 것이다. 반면 자유없는 질서는 체계적이지만 개인의 선택이 사라지고 정해진 규칙만 따르는 감옥에 가깝다.




질서는 자유를 함께 사용해야 더욱 빛이난다. 체계를 만들되, 내가 원하는대로 만들고, 규칙을 따르되, 내가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성향은 회사를 운영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어떻게 번아웃 없이 일할 수 있을까와 같은 것들을 모두 체계화한다. 체계가 없으면 열심히 일하다가 지쳐서 멈추고 다시 시작하다가 또 지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디어가 폭발하지만 시스템이 없어 금방 지쳐버리는 것이다. 체계가 있으면 에너지 관리 시스템, 휴식 루틴, 페이스 조절 등을 할 수 있어 단거리보다는 마라톤을 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전에는 질서를 추구하면 창의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창의력은 혼돈 그 자체에서 나오기보다는 체계와 자유의 공존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글을 쓸때 아무 규칙없이 쓰면 횡성수설하게 되지만, 정해진 리듬으로 쓰면 오히려 창의력이 폭발한다. 코딩을 할때도 아무렇게나 코딩하면 스파게티 코드가 되지만 명확한 규칙 안에서 코딩하면 깔끔한 솔루션이 등장한다. 음악도 아무 음이나 치면 그냥 소음에 불과하지만 화음이나 리듬, 구조를 활용하면 음악을 완성시킬수 있다. 강의를 할때도 직관적인 개념을 체계화 할 수 있어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창의력은 제약안에서의 자유이다. 그리고 내 체계화 능력은 제약을 만드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제약안에서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프레데터의 체계는 남이 만든 규칙이고 통제가 목적이며 변화를 거부하고 외부 명예를 추구하지만, 내가 만든 체계는 스스로가 만든 시스템이며 자유가 목적이고 적응과 진화를 추구한다. 프레데터는 남이 만든 제약 안에 갇혀있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제약안에서 자유롭다.




내가 살면서 좋아했던 것들도 비슷한 느낌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정한대로 사용해야하는 윈도우 운영체제보다는 자유롭게 수정하고 제어할 수 있는 리눅스가 더 좋았다. 그런데 자유를 추구하는 리눅스를 잘 보면 파일 시스템이나 권한 관리 등 명확한 규칙이 존재한다. 내가 리눅스를 좋아했던건 체계와 자유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통계학도 마찬가지다. 통계학을 활용하면 복잡한 현실을 수학 수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체계화 능력은 내가 프레데터 세계에서 얻은 도구이고

내 삶의 여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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