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
영화 시라트는 스페인 영화로 대사가 많지 않고, 그 특유의 사운드와 사막 분위기가 인상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의 배경은 모로코였는데, 예전에 영화 존윅도 그렇고 모로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여행가보고 싶은 나라이다.
영화 시라트는 주인공이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모로코 사막의 레이브 파티에 참여해, 다른 레이버들과 함께 딸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내용이다. 영화의 표면상으로는 딸을 찾는 여정이라는 간단한 플롯이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층위에서 삶에 빗대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좋았다. 영화 제목 "시라트"는 종교적인 의미로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인데, 떨어지면 지옥이고 끝까지 도달 하면 천국이라는 설정이 있다.
시라트: 천국과 지옥을 잇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과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
주인공은 영화 시작부터 이미 딸을 잃은 상태였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딸을 찾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다. 파티에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신난 상태였지만 그와 중에 주인공은 전혀 파티를 즐기지도 않고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딸 사진을 뿌리고 다닌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인공 혼자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에게 파티는 목적지에 해당하지만 주인공에게는 파티는 오직 딸을 찾기 위한 경유지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즐기고 있을 때, 주인공은 즐길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파티가 유토피아라면 유토피아에서 조차 주인공처럼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주인공은 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소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레이드 파티를 벌이는데, 이 파티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커가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영화 초반 스피커를 설치하는 장면이라던가, 스피커 원샷을 받는 장면이라던가, 스피커를 줌인한다거나 하는 등 오히려 출연 배우보다 스피커라는 오브젝트에 더 포커스하는 장면들을 보면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피커는 무엇을 의미할까?
처음에는 디스토피아적으로 해석을 해봤는데, 이 관점에서는 스피커를 세뇌 장치라고 생각할수 있겠다. 대중을 세뇌하고 행동을 유도하는 춤추게 만드는 미디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디스토피아보다는 유토피아 적으로 해석하는게 더 좋을것 같다고 생각했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음악은 국적이나 사용하는 언어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주인공은 딸을 찾으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볼때 영어와 스페인어를 번갈아 가면서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음악은 언어의 장벽이 없애면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다. 스피커의 진동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사람들을 춤추게 만드는,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건 진동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다.
사람들이 한창 춤을 추고 있을 때, 갑자기 군대가 개입해서 파티를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이 장면에서 군대는 현대 사회 시스템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군대라는 조직이 나오긴했지만 총을쏘거나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데리고 가는건 아니고 다소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현대사회가 유토피아를 억압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토피아가 커지는 것을 현대사회가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파티 또한 약한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이 그랬듯 파티에서 춤추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파티라는 시스템 주변부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대는 왜 파티를 중단시킨 것일까? 파티는 일시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정해진 기간동안 신나게 놀다가 파티가 끝나면 흩어지지만, 사회 시스템은 다르다. 사회는 일시적이지 않고 계속이어져아한다. 파티는 즐겁게 놀기만 하면 되고 아무도 책임과 의무를 갖지 않는데 반해 사회 시스템은 각 구성원들이 모두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군대는 파티를 끝내버리고 사람들을 데려가는데, 주인공 일행은 군대를 따라가던 와중 그들을 따돌리고 다른 길로 도망가며 새로운 파티를 찾아 떠난다. 여기서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두 무리로 나뉜다. 하나는 군대를 따라가는 쪽, 다른 하나는 군대와 다른 길로 가는 주인공 일행들. 이건 무슨 뜻일까? 보통이라면 군대를 따라가는 쪽은 시스템을 선택한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길을 떠난 주인공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이 영화는 선악구도로 해석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시스템을 선택한 사람들이니까 예측 가능성을 중요시 여기고, 생존 확률을 높이며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본인이 모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성을 얻은 셈이다. 당연히 이를 비난할 필요는 없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반면, 군대를 따돌리고 이탈한 주인공 무리들은 자유롭지만 위험도 그만큼 큰데, 작중에서 주인공 일행들은 힘든 사건 사고를 많이 겪게 된다.
주인공은 자드 일행과 함께 군대 행렬을 이탈한 후, 험한 산길을 운전하다가 아들마저 잃게 된다.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간단히 생각하면 이미 잃어버린 딸 욕심 내지 말고 있는 아들이나 잘 지켜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영화가 그정도의 훈계로 끝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의 상태를 다시한번 보자. 주인공은 시작부터 딸을 잃은 상태였고, 유토피아(파티)를 즐기지도 못했고, 현대 사회 시스템(군대)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는 영화 제목 시라트와 같이 다리를 계속 건너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아들을 잃은 것도, 주인공이 딱히 무언가를 잘못한게 아니라 그냥 시라트를 건너는 중 일어난 사건에 불과하다. 주인공이 아들을 잃은 것은 시스템을 따르지 않아서 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주인공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말한다. 한번 상실감을 느낀 사람이라고 해도, 상실감을 또다시 느끼지 않을 보장은 없다고 말이다.
주인공은 아들이 죽기전에 낭떠러지 옆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위험하니까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대로 차에 탔기 때문에 사고로 죽게 되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지키려고 했던 행동때문에 아들이 죽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위험을 제거하려는 행위자체가 새로운 위험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면 위험을 제거하려는 행위였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그 행위로 인해 또 다른 위험이 만들어지는 경우 말이다. 사실 흔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상황 변화에 취약한 경우도 많다.
아들 마저 잃어버린 주인공과 그 일행들은 사막 중간에서 스피커를 설치하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확실히 이 파티는 앞선 영화 초반의 파티와는 다르다.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이 많지도 않고 주인공 일당 몇명만 춤을 춘다. 나는 이 장면을 유토피아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내가 만들수 있다고 해석했는데, 즉, 유토피아는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주인공 일행은 파티 장소를 찾아서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춤을 출 장소를 정하고 스피커를 설치하고 음악을 틀고 춤을 춘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유토피아는 최종 목적지가 아닌 여정 중에 잠깐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 장면의 백미는 그동안 파티는 무의미하고, 음악을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이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그것도 아들과 딸 모두 잃은 상태에서 말이다. 아마 주인공은 이미 떠나간 아들과 딸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춤을 춘 것이 아니었을까.
주인공이 처음으로 음악에 몸을 맡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드가 지뢰를 밟으면서 폭발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놀라서 자드를 쫓아가던 남자도 함께 죽는다. 아마 감독은 너가 아무리 행복한 상태라도 죽음은 별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인생을 깨닫고, 고통을 수용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고해도 세계는 잘 작동한다. 세계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아무런 계약을 맺지 않는다.
주인공 일행은 자신들이 춤추고 있는 곳 일대가 지뢰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 멀리 바위까지만 가면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여러명이 죽게 되는데, 주인공은 살아서 도착한 반면 주인공의 발자국을 따라 걸은 인물은 죽는다. 우리는 흔히 인과관계를 생각하며 같은 행동을 하면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이를 부정한다. 똑같은 행동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만든 환상에 가깝다. 현대사회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규칙을 따르면 안전하며, 공식대로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지뢰밭에서의 규칙은 사후에만 의미를 가진다. 즉, 살아남는 쪽이 맞는 선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튜브에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연설이나 강의가 아주 많다. 누구나 이 공식대로 하면 월천만원(이하 월천)을 벌 수 있다고 유혹하고 사람들은 무언가 홀린 것 마냥 찬양하는 댓글을 단다. 유명한 사람 인터뷰를 인용하며 이 사람처럼 하면 된다고, 검증된 루트라고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시라트에 의하면 이는 성공했기 때문에 그 전 행동이 정답이 된것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해석한다. 그 행동이 정답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성공한 사람은 지뢰밭을 통과한 사람이고, 지뢰를 밟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지뢰밭 생존자의 강의를 들으며 생존 편향에 속으며 위험요소를 제거했다고 착각하고, 성공 방정식을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살아남은 주인공 일행은 기차에 타고 구조되어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기차는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니 창작물에서 시스템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인공 일행도 다시 시스템을 따르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파티를 찾아가는 중일까?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시라트 위를 걷고 있는 중일까?
영화는 시스템을 탈주해서 자기 길을 걸으면 행복하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없다고 말한다. 시스템 안은 답답하지만 안전하고, 시스템 밖은 위험하지만 진짜삶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용기를 내면 자유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결국 행복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을 탈주하고 창업했다가 빚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마치 지뢰가 터지듯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위에 도달한 사람의 인터뷰나 책을보고 시스템 밖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같은 길을 가도 어떤 사람은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터지는 것이지, 노력이나 용기, 진정성 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걷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며 구조적 위험은 외면하고 각오나 노력이 부족했다는 식의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주인공이 살아남은 당위성이나 영웅 서사를 만들지 않고, 시스템을 악마처럼 묘사하지도 않고, 시스템 탈주를 미화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스템 밖은 절벽 낭떠러지에 지뢰밭이라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고 시스템을 따르든, 탈주하든 그 선택이 행복을 낳는다는 인과법칙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회사에서 버텨서 임원을 달거나, 창업을 성공시키는 케이스 말이다.
우리 모두는 시라트라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인생을 사는 중이다. 그렇다면 시라트에서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내 생각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했는지를 말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사람에 휩쓸렸는지, 독립적으로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자신의 선택을 인정하는지, 아니면 나중에 영웅서사로 포장하는지가 아닌가 싶었다.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 하거나 성공을 필연으로 포장하거나 우연을 실력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시라트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은 본인 인생을 영웅서사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시라트를 건너기에는 너무 무거워지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영웅 서사는 그 당시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데, 그 선택은 나의 통찰에 의한 것이었고, 내가 겪은 실패는 모두 의미가 있었고 결국 지금의 내가 될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시라트 관점에서 이런 이야기는 삶에 필연이라는 포장을 씌우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살아서 성공했더라도 과거의 선택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면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렇게 포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계속 방어해야하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야하며,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은근히 내려다보게 된다. 인생스토리가 닫힌 이야기가 되며 실패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자신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대중들은 그런 영상을 보면서 역시 인생의 성공에는 운이 중요하다고 생가갛며 안도한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런 경우는 어떨까? 나는 운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영웅서사와 비슷하게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에는 운이 작용한다는 말은 사실이고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 말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운이 중요하니까 어짜피 노력은 의미없고,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신의 인생을 회피해버리는 것에 가깝다. 영웅서사가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이야기라면, 이쪽은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로 둘다 삶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노력은 운이 작동할 자리에 나를 노출시키는 행위로 인생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운 영상을 너무 많이 보다보면 잠깐은 편할지 몰라도 점점 삶의 밀도가 옅어지면서 자신의 선택, 실패, 책임과 같은 것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건 인생에서의 자유라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