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토의 철학] 이타치와 헤겔의 정반합

모순이 사람을 발전시킨다.

by 장철원

나는 철학을 좋아해서 철학책도 자주 읽는 편인데, 내가 본 책들의 아쉬웠던 부분은 원리와 예시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어떤 법칙이나 자신의 논리를 수학 증명 문제 풀듯 퍼즐 맞추듯 서술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대부분의 철학 책에 등장하는 설명은 개념의 뼈대를 세우는 느낌이었는데, 철학자는 뼈대를 세우고 이를 적용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엄밀함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니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개념을 외워버리거나, 철학자를 숭배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반면 나는 철학 개념을 외우기 보다는 일상에 활용하는 방법쪽에 관심이 많은지라 나에게는 조금 과한 설명처럼 느껴졌다. 반면 철학 대중서들은 깊이가 너무 얕아서 나와 맞지 않았는데, 나같은 중간지대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써볼까 한다.




이번 글에서 다룰 헤겔의 정반합 개념도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정반합 개념을 찾아보면 많이 나오는 예제가 컵에 물이 담겨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예제인데, 이런 예제로는 일상에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살아온 과정과 만화 나루토에 등장하는 이타치를 예로 들어 정반합 개념을 예로 들어 이해하기 쉽 설명해보려고 한다.


image.png [나루토 명장면] 용서해라, 사스케


모순


나는 인생에서 모순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전에 대학교 다닐때 통계학을 전공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통계학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각해본적도 없고, 심지어 나는 통계학을 연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고, 완전히 잊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한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하자 오히려 핵심이 남고 내 실력이 한 차원 더 높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면에서 실제로 모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관된 삶을 살면서, 자신이 겪은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껴졌다. 모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대체로 하나의 인생 경로, 즉 하나의 틀 안에서 성공했고, 해당 틀 속에서 계속 살다보니 그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자신의 성공 모델을 굳혀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하나의 틀 속에서 성공했으니, 자신의 인생경로가 곧 성공 방정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의 틀 속에서 살다보니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나가는 차원 이동 경험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단호했고, 여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 관한 모순을 제거하려는 스탠스를 취한다. 스스로 일관적인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 헤겔에게 일관성은 정지 상태이며, 모순은 스스로의 껍질을 깨지게 만들며, 스스로의 껍질을 깸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한다고 말했다. 모순이 성장 동력이 되는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실재는 자기 안에 자기 부정을 품고 있다.


성공 안에는 실패의 씨앗이 있고, 자신의 정체성 내부에는 정체성을 탈주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럼 지금부터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말해보자. 변증법의 정반합은 테제(these), 안티테제(antithese), 진테제(synthese)들로 구성된다. 다른말로는 즉자(an sich), 대자(für sich), 지양(aufheben)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표현방법은 무슨 차이 일까? 우선 알고가야할 것은 정반합이라는 용어는 헤겔이 직접 쓴 공식 용어가 아니며 후대 사람들이 헤겔의 철학을 정리하면서 만든 용어라는 점이다.




정반합에서 테제(these), 안티테제(antithese), 진테제(synthese)는 밖에서 나를 봤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즉자(an sich), 대자(für sich), 지양(aufheben)은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의식 상태를 의미한다. 테제(these)는 어떤 주장을 의미하며, 안티테제(antithese)는 해당 주장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테제(synthese)는 둘을 통합한 더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룰 개념은 즉자(an sich), 대자(für sich), 지양(aufhebe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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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자(an sich)


즉자(an sich)는 내 속에 어떤 것이 있긴한데, 아직 스스로를 잘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인간이지만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한다. 내 인생에서는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몰입하던 상태가 일종의 즉자(an sich) 상태였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아직 내 속에 있는 모순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자(an sich)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an = ~에, ~에 있어서, ~에 관하여

sich = 자기 자신


직역하면 an sich는 "자기 자신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관하여" 혹은 "그 자체로"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헤겔은 an sich를 단순히 "그 자체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an sich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흔히 씨앗은 나무의 an sich라고 한다. 즉, 씨앗은 나무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이 나무라는 것은 모른다. 즉 an sich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을 품은 상태이다.




그러나 an sich는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도 분명 통계학이라는 껍질을 벗어나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순"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앞에서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좀더 자세히 말하면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내가 그 당시 나를 "통계학자"로 규정했다고하자. 이는 스스로 생각했을 때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한계나 모순까지는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 가깝다. 즉, 겉으로 보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이 내부에 잠복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만화 나루토에 등장하는 이타치의 입장에서 an sich 상태는 나뭇잎 마을에서 닌자 역할을 충실하하던 이타치의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나뭇잎 마을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으며 내부적인 모순이 표면화 되지 않은 상태다. 나뭇잎 마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모순을 품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자기 내면의 진실을 아직 대면하지 않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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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für sich)


대자(für sich)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내가 공부를 하면서 학계의 모순이나 한계성을 깨달은 단계에 비유할 수 있겠다. 즉, an sich 단계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절대화했다면 für sich 단계에서는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한 것이다. 나루토의 이타치의 경우, 우치하 일족의 쿠데타 계획을 인지하고 마을과 가족이 서로 부딪히는 모순을 본 것이다.




대자(für sich)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für: ~를 위하여, ~에 대하여, ~로서

sich: 자기 자신


직역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혹은 "자기 자신으로서"라고 번역한다. für sich는 일상 대화에 사용할 때는 독립성이나 자기 기준, 자기 방향성이 포함된 의미인데, 헤겔은 für sich를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an sich가 잠재적 자신을 품고 있는 단계라면 für sich는 자신을 아는 상태인 것이다. für sich 단계에서는 자신의 모순을 알고 있는 상태이므로 자기 반성적인 태도를 보이며 스스로와의 거리감이 생긴다. 반면 이전의 an sich 단계에서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스스로와의 거리가 없다.




여기서 거리감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an sich 단계에서는 스스로와의 거리감이 없다. an sich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상태인데, 스스로와의 거리감이 없으므로 자신을 둘러싼 틀 밖에서 제 3자의 시선에서 볼 수 없는 상태이다. 반면 für sich는 자신과의 거리가 생긴 상태다. 즉, 내가 나를 보는 시점이 생기고, 스스로의 정체성도 확신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해보면, 사람은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본다. an sich 역시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데, 문제는 자신의 렌즈 자체는 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렌즈 때문에 발생한 왜곡도 인식하기 힘들다. 반면 für sich는 스스로의 렌즈를 의식하고, 자신이 이런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그렇기 떄문에 자신의 렌즈에 기스가 간 것도 알고 있고, 자기 반성 측면이 강하다.




이타치는 나뭇잎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한 우치하 일족을 스스로 파괴한다. 이는 자기 자신과의 분열 혹은 자기 부정에 해당하는데, 즉자 상태가 평화를 사랑하는 이타치를 의미한다면, 대자는 나는 평화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죽인다는 모순을 껴안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타치는 악으로 보이지만, 이타치 내면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 단계에 들어선다. 헤겔이 말했듯 정신이 자기 자신을 낯선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다.


image.png 나는 너를 쭉 사랑한다


아우프헤벤(aufheben)


지양(aufheben, 이하 아우프헤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 없애다 / 폐지하다

- 보존하다 / 간직하다

- 들어올리다 / 상위로 올리


헤겔은 어째서 이런 복잡한 단어를 선택했을까. 아우프헤벤은 없애면서 동시에 보존하고 더 높은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지는 않고, 완전히 제거하지도 않으며,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운동을 의미한다. 앞에서 모순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아우프헤벤은 모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포함한 채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통계학이라는 분야에서 AI 개발로 넘어갈때 기존에 배운 통계학 개념을 모두 다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중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가지고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실력적 상승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타이밍 좋게 업그레이드하는 것과는 다른데, 스스로가 규정한 자기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모순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 더 큰 존재로 재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AI 쪽으로 오지 않고 계속 통계학을 연구했으면 아우프헤벤이 가능했을까? 아우프헤벤은 단순히 직업이나 전공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모순이다. 스스로의 내부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 AI는 결과물일 뿐이다. 반대로 내가 통계학 분야에 계속 남았어도 기존 통계 이론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식으로 아우프헤벤은 가능하다.




아우프헤벤은 항상 내부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틀은 내부에서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틀은 내부적을 너무 닫혀있어서 외부로 나가야만 아우프헤벤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틀이 자기 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내부 아우프헤벤이 막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학계에서도 아우프헤벤은 가능하겠지만 학계는 몇십년 혹은 몇백년을 기다려야할수도 있는데 그 전에 내 연구 인생이 끝날수도 있으니, 기동성을 중요시 여기는 나로서는 느린 체제 변환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타치의 경우 일족을 죽이고 마을을 살리는 선택을 하면서 본인은 탈주닌자가 된다. 이타치 입장에서는 가족이라는 an sich와 마을이라는 für sich를 놓고 둘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타치는 결국 우치하 가문을 제거함과 동시에 사스케를 살려놓으면서 가문을 유지하고 가족과 마을의 대립을 평화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타치의 경우 비극적인 아우프헤벤 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타치는 사스케를 더욱 강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존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스케를 더 높은 존재로 고양, 들어올린다. 이타치는 단순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을 통한 타자의 성장을 의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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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자대자(an und für sich)


für sich에서 아우프헤벤을 거치면 an und für sich 상태가 된다. 이때 und는 "그리고"라는 의미인데,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도잇에 자기 존재가 완성도니 상태"를 의미한다. 비유하자면 an sich를 나무의 씨앗 상태라고 하면 für sich는 성장 중인 나무, an und für sich는 완전히 성장한 나무를 의미한다. an und für sich를 최종단계, 혹은 완전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an und für sich는 다시 새로운 ansich가 된다.




이타치는 죽고나서야 비로서 즉자대자 상태가 된다. 동생 사스케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아타치의 선택이 재해석되는 것이다. 이타치는 결국 죽고나서야 자기 자신으로서 완전히 드러난 상태인 즉자대자 상태가 된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정신상태가 됨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며 자유로운 존재가 되며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AI 시대에서의 아우프헤벤


AI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AI가 답이라고 말하며 AI 기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아직 AI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an sich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AI의 한계와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für sich 상태인 것일까. 그렇다 AI 시대에서의 아우프헤벤은 어떻게 발동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한 차원 더 높아진 an und für sich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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