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소미 감상평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무려 1년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나는 공포영화의 철학적인 부분에 매력을 느끼지만, 갑자기 놀래키는 점프스퀘어를 아주 싫어해서 이 영화가 철학적으로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많다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놀리킬까봐 못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큰맘먹고 넷플릭에서 미드소마를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이 영화는 점프스퀘어 없고, 깜짝 놀래키는 장면은 없다고 봐도 되니 혹시나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분이라면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역시나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영화였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손꼽히는 영화이다.
영화 속 주인공 대니는 겉으로보기에는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연락을 주고 받는 가족들이 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가족과의 관계는 매우 불안하고, 남자친구는 이미 대니에게 마음이 떠난 지 오래라 대니는 사실상 혼자에 가깝다. 그 와중에 영화 초반부터 대니는 가족을 모두 잃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사실상 끊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서 스웨덴의 호르가 마을에 방문하게 된다.
영화 상에서는 대니가 가족을 잃으면서 혼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전부터 대니는 사실상 혼자였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해도 귀찮아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형식적일뿐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아닌 느낌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혼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대니는 항상 불안해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 대니가 호르가 마을을 겪으며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는 그녀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통과의례라는 개념이 생각났는데, 이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가볍게 쓰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류학에는 통과의례(Rites of Passage)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 개념은 인간 사회에서 개인이 한 사회적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환될때 거치는 패턴을 의미한다.
통과의례는 총 3단계를 거친다.
1단계는 분리(separation 또는 preliminal) 상태이다. 이 단계는 기존의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에서 떨어져 나오는 단계를 의미하며 이전 상태의 죽음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군대 입대하기 전에 민간인 시절 옷을 벗는 행위라던가 결혼 전날 밤 파티를 하는 등 말이다.
2단계는 리미널(liminal) 상태이다. liminal은 라틴어 limen(문지방)에서 나온 말로 리미널 상태는 문지방 위에 서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전 상태는 아닌데 그렇다고 아직 새로운 상태도 아닌 애매한 중간 지점을 의미하며 사실상 통과의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게이다. 리미널 상태(liminality 이하 리미널리티)는 가장 위험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지만, 변화의 에너지가 가장 강한 시기이다. 사람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기존 규칙이나 규범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된다. 인간의 정체성은 대부분 학생, 직장인 등 사회적 역할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리미널 단게에서는 이 모든 구조가 일시적으로 해체된다. 그래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됨과 동시에 극도의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3단계는 통합(Incorporation 또는 postliminal) 상태이다. 이 상태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사회에 재통합되는 단계를 의미한다. 새로운 이름이나 직위를 받거나 새로운 옷을 입거나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등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
우리 사회에서 통과의례는 출생, 성년식, 결혼, 죽음, 졸업식, 취임식, 임관식 등 여러 형태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대니가 변하는 과정은 통과의례 3단계를 거치는 과정이라고 볼 수있고, 호르가 마을은 그 중 2단계인 리미널리티를 상징하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항상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대니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모두가 아파하고, 대니가 울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같이 울어준다. 이에 대니는 전례없는 소속감을 느낀다. 이전에는 가족, 친구들과 있을 때 항상 혼자라는 생각을 했던 대니는 호르가 마을 사람들과 연결됨을 느낀 것이다.
미드소마는 통과의례 3단계를 제대로 보여준다. 일단 1단계인 분리 단계를 보면, 주인공 대니는 영화 시작부터 이미 분리되어 있다. 그녀는 가족도 잃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사실상 끝난 마당에 기존 삶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스웨덴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대니는 분리 단계가 끝난 상태이고 리미널 공간에 들어가는 셈이다.
호르가 마을 자체가 거대한 리미널 공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마을에는 백야 현상이 있어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 경계가 사라진다. 환각파티를 함으로써 자아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 마을은 기존 사회의 규범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공간이며 영화가 진행되면서 외부인과 내부인의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마지막 통합단계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가 웃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밝게 웃는다. 마을의 여왕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억압했던 남자친구를 제물로 바치면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이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는데, 아마 관객들은 주인공이 무사히 마을을 탈출해서 사회에 복귀하는 장면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중반에 72세가 되었을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의식 행사를보고 대니는 기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확실히 마을에 편입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는 영화 후반부에 둥글게 모여 춤을 추는 과정이다. 분명 이전에는 대니의 표정이 굳어있었는데 춤을 추면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중요한건 이러한 리미널 공간에서 대니는 스스로 마을에 편입하기로 하자는 결심을 한 것이 아니다. 춤을 추다보니 어느순간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통계학자에서 개발자로 전향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예전에 개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나를 보니 개발을 하고 있었듯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리미널 상태가 워낙 고통스럽다보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서 빨리 결정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조바심에 빨리 결정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리미널리티의 개념을 보다보면 해체주의와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철학자 데리다는 모든 의미는 차이(difference)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학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유는 학생이 아닌것이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은 개발자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경계가 있어야 정체성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해체주의는 그 경계 자체가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며, 리미널리티는 바로 그 인위적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해체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리미널리티와 해체주의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데리다는 중심없는 구조에 대해 말했는데, 기존 사회는 항상 중심을 설정하고 나머지를 주변부로 밀어냈다. 마치 내가 학계의 중심에 있다가 주변부로 나오고 기업의 중심부에 있다가 주변부로 나왔듯 말이다. 해체주의는 중심이 없다는 사실은 강조했는데 거기서 멈추는 경향이 있다. 반면 리미널리티는 해체 이후 새로운 구조로 재편하는 통합단계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통과의례라는 표현을 알게 모르게 많이 사용한다. 흔히 군대나 결혼과 같은 이벤트를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통과의례를 거쳐간 사람들을 보면 이전과 비교해서 사회적으로 생활방식은 조금 달라지는 경우는 있어도,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많이 변하는 경우는 별로 못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말하는 통과의례는 실질적인 통과의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반 헤네프가 정의한 통과의례는 사회적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는 개인의 내면이 변했느냐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사회가 그 사람을 다르게 분류했느냐를 중점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군대를 전역하면 사회가 성인 남자로 취급한다거나, 결혼을 하면 그제서야 가정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적 통과의례는 사실 그 사람의 내면의 변화가 기준이 아닌, 사회적 꼬리표를 교체하는 느낌이다.
사회가 부여하는 통과의례는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만든 것이다. 군대, 졸업, 결혼 등 사회 시스템이 만든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도 리미널리티가 있긴한데 그 기간이 너무 짧거나 형식적으로만 존재해서 진짜 해체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진짜 통과의례는 기존의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버티기 힘들만큼 흔들릴때 발생한다. 기존의 내 믿음과 가치관, 세계관이 모두 무너지고 뒤짚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건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줄수 없는 경험이고 스스로를 리미널리티에 던져야 비로서 발생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사회 시스템이 통과의례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 가면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게 함으로써 스스로 통과의례를 거쳤다고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결혼을 예로 들면 멋진 드레스를 입고 성대한 파티를 함으로써 스스로 엄청난 통과의례를 거친다고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하는게 아니라, 대부분 돈을 활용하거나 형식적인 사회적 의식을 통해 스스로 성장을 했다고 느끼게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호르가 마을에서 사람들이 환각을 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수많은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거의 성장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 그랬듯, 군대 전역할때쯤 되면, 앞으로 달라진 나를 생각하지만 며칠만 지나도 군대 입대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사회는 왜 굳이 통과의례를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는 의식으로 만들었을까? 개인이 스스로 성장하게끔 느끼도록 만드는게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진짜 통과의례는 사회에 위험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짜 리미널리티를 경험하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이 생각하던 기존 구조는 해체되고, 가치관이 뒤집하고, 기존 집단과 대화가 안되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학계를 떠나고 학계사람들과 대화가 안되고, 회사를 떠나고 직장인들과 대화가 잘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통과의례를 경험한 사람은 시스템에 순응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 제자리에 있는 것을 원한다. 군인은 군인답게, 가장은 가장답게, 직장인은 직장인 답게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가짜 통과의례에는 사회적 기능도 존재한다. 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성장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욕구를 진짜 내면의 변화로 채우면 아까 말했듯 위험해진다. 따라서 형식적인 의식으로 그 욕구를 안전하게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군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른들이 뿌듯하게 봐주고,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축하해주고, "회사에서 승진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부러워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성장욕구가 충족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또한 기존 시스템을 후세대에서도 유지하고 반복하게끔 만든다. 마치 사교육을 받았던 부모세대들이 자식에게 더 가혹한 사교육을 시키듯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감시와 처벌 대신 점점 더 정교하게 개인 스스로가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게끔 만들어왔다고 한다. 사람을 강제로 가두는 감옥보다 자유롭게 드나드는 학교가 더 효율적인 통제 장치다. 왜냐하면 감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컨트롤 하지만 학교는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데 스스로 따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AI의 등장으로 대학교육에 의미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전국의 고3들은 대학에 가기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앞에서 부정적으로 말하긴했지만 가짜 통과의례가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진짜 리미널리티는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 따라서 사회가 만든 완충된 통과의례 의식이 그 충격을 줄여주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의식을 진짜 성장으로 착각하게끔 만드는 것이지 의식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는 경험은 실제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 통과의례를 여러번 경험한다고 했을 때 첫번째 겪는 리미널리티, 첫번째 해체가 가장 무서운데, 왜냐하면 처음 경험해보기 때문에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공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번 통과하면 몸이 기억해서 두번째 통과의례부터는 이전에도 겪어봤고 그때도 살아남았다는 스스로의 감각이 있어서 내구성이 강해진다. 말그대로 실전을 겪으면서 정신이 단련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예전에 박사과정을 그만두면서 인생에서 처음 통과의례를 겪었는데 사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내가 그동안 믿어왔고 봐왔던 세계가 모두 무너지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두번째 통과의례가 퇴사했을 때였는데 그때도 물론 충격이 있긴했지만, 이미 한번 겪어본 감정, 느낌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통과의례, 의식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평소에도 나는 결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굉장히 기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까 말했듯, 가짜 통과의례의 핵심은 성장했다는 착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통과의례보다 결혼은 유독 그 착각이 강렬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결혼의 근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결혼은 마치 그 사랑이라느 감정을 제도에 가두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괴하게 느껴지는건 결혼정보회사(이하 결정사)이다. 사랑, 헌신, 평생의 동반자를 찾는 과정을 서로 조건표를 맞춰가며 6개월 과정으로 끝내버린다.
나는 진짜 통과의례라면 결혼 전에 리미널리티 단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나는 혼자서 온전한 사람인지, 나는 왜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인지 등을 성찰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본 많은 사람들은 그 리미널리티 단계를 건너뛰고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의식으로 통합 단계를 어설프게 흉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식이라면 결혼 후에도 자신의 정체성은 그대로고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까. 형식적으로만, 겉모습만 달라졌지 내면은 그대로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이런 현상들이 단순히 사람들이 속물이라서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사회 시스템이 이렇게 판을 짜놓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도 결혼은 재산 상속, 노동력 생산, 가문간 동맹 등을 위해서지 사랑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사랑과 결혼이 연결된건 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런 면에서 조건에 맞춰 결혼하는 것은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의 목적에 맞게 제대로 흘러가는 것이고 오히려 사랑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기괴하게 느끼는 점은 서로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시스템의 설계대로 움직이는 듯한 무의식적 모순 때문일까.
리미널리티의 핵심 개념은 '성장'이다. 서점이나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요즘 사람들도 성장이라는 단어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정도냐면 회사에 지원서에도 성장하고 싶다고 꼭 쓰고,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자기개발과 같은 '성장' 카테고리이며, 유튜브에서도 성장을 강조하는 영상들이 인기가 많으며 오죽했으면 '성장팔이'라는 말조차 있을 정도이다.
진정한 성장은 리미널리티 단계가 필수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장은 리미널리티를 건너뛴 껍떼기 뿐인 성장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기개발을 한다고 했을 때 아침마다 영어단어 10개씩 외우면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성인 군자나 철학자들의 명언을 보면서 자신은 깨달았고 정신적으로 성장했다고 느낀다. 물론 그런 것들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리미널리티를 경험한 후의 성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 시스템은 각 사회 구성원에게 스스로 성장했다는 느낌만 주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적 통과의례를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그리고 요즘은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가장 강력해보인다.
무서운 점은 유튜브나 자기개발서들은 불안한 감정을 팔면서 동시에 리미널리티를 건너뛰는 방법을 판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아직 여러면에서 부족합니다. 성장하셔야합니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이 책을 보면, 이 영상을 보시면 성장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진짜 성장은 리미널리티를 통광해야하지만 성장팔이 산업에서는 사람들이 불안을 소비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자기개발서를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자기개발서를 찾게 된다. 자신이 느끼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해소가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때 자기개발서를 진짜 많이 읽었는데, 거의 중독된 느낌으로 시중에 나와있는 거의 모든 자기개발서를 다 찾아읽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듯, 자기개발서를 읽은 나의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러다 어느새 내 책장에 가득차있는 자기개발서를 보며 스스로 기괴함을 느끼며 자기개발서 읽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그 이후로 자기개발서는 서점 베스트셀러에서 한번도 밀려난 적이 없을만큼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별일 없으면 앞으로도 계속 인기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리미널리티 없는 성장팔이는 왜이렇게 중독성이 강할까? 진짜 리미널리티는 아주 고통스럽다. 답도 없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스스로 이겨내야한다. 하지만 성장팔이는 다르다. 하루에 영어단어 10개 외우고, 자기전에 철학자들 명언 보고 자면 즉각적인 성취감도 있고, 정량적으로 측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같이 자기개발하는 사람들의 인증글을 보면서 공동체의식을 느낄수도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없으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유명한 철학자나 성인의 깨달음은 수십년간 걸쳐 깨달은 리미널리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걸 3분짜리 영상으로 만들어서 보여주면 시청자는 그 성인의 깨달음을 경험없이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거본다고 성장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내 주변에서 진짜 리미널리티를 겪은 사람은 막상 성장했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고 복잡해서 성장이라는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내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장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리미널리티를 겪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이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굉장히 불안해보이고, 스스로 말로는 성장했다고 하지만 그건 본인 주장에 가깝지 다른 사람이 볼때는 그다지 성장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마 본인도 스스로 그런 상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 단어에 집착했던것 같다. 비슷한 느낌으로 "나는 돈에 관심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돈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대상이 자신의 의식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돈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려면 일단 돈을 떠올려야하기 때문이다. 긍정문도 마찬가지다. "저는 솔직한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솔직함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진짜 솔직한 사람은 그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예전에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천재라는 단어에 집착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결핍된 것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장한 사람들은 성장이라는 단어가 필요없다. 그냥 살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을때는 한때 천재라는 단어에 집착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천재라는 단어 별로 안좋아한다.
영화속 주인공 대니는 많은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발전된 사회에 살고 있지만 공동체 의식은 에전보다 훨씬 약해졌고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개인이 고립되면 소비가 늘어난다. 인간관계를 앱으로 대체하고, 소속감을 구독으로 대체한다. 그러다보니 과거 공통체가 해체된 자리에 공통체를 흉내내는 산업이 들어선 것이다. 유사종교, 성공 커뮤니티, 팬덤 문화, 유튜브 알고리즘 등과 같은 것들은 고립된 현대인의 정서적 공백을 파고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대니와 감정을 나누고 소속감도 제공해주는데, 이 영화가 공포 영화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는 주인공 대니를 넘어 현대인이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