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이었다. 그날도 장사 준비를 마친 엄마와 큰오빠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막 장사를 떠나려던 중, 시동을 걸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은 큰 오빠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스펀지처럼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오토바이 운전만 할 줄 알다가 포장마차를 하느라 면허를 따고 타는 첫 차였기에, 또 워낙 오래된 차였기에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오빠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켰다. 그제야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고 다행히 막 시동을 켠 터라 주차장 담벼락을 가볍게 들이받으면서 크게 다치는 사람 없이 차는 멈췄다.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 트럭이라니, 만약 그곳이 담벼락 있는 주차장이 아니었다면, 앞에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당황한 큰오빠가 우왕좌왕했더라면 끔찍한 일도 벌어졌을 수 있었다.
차량을 정비한 직원은 브레이크 선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고 말했다. 자연적인 마모나 끊어짐이 아니라, 명백히 누군가 계획적으로 자른 흔적이라고.
당시 외삼촌은 보일러 정비 일을 하고 있었고 자동차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엄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일까지, 모든 정황은 외삼촌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CCTV나 블랙박스도 흔치 않던 시절, 섣불리 심증만 가지고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아침과 가까운 새벽녘, 누군가 내 이름을 다급히 부르며 집으로 뛰어들어오는 소리에 깼는데 엄마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나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날은 밤새 많은 비가 내렸던 날이었다. 알루미늄 샷시로 된 허름한 대문 안, 고르지 않은 시멘트 마당 움푹 움푹 파인 얕은 웅덩이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무지갯빛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기름은 현관 밖 보일러실에 설치된 기름보일러의 선이 잘려 거기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만약 그 위에 작은 불이라도 붙였더라면 집도, 그 안에 있던 나도 모두 불길에 휩싸였을 상황.
다행히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 없는 기름만 둥둥 떠있었고 덕분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고마워해야 할까. 죽이지 않고 겁만 준 것에 대해.
엄마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잘린 브레이크 선을 증거로 들고 경찰서로 향했다. 당시 경찰서에는 엄마와 오빠만 갔기 때문에, 이후 상황은 모두 엄마와 오빠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상황을 들은 경찰은 아픈 동생을 혼자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는 누나를 불쌍히 여겨 외삼촌을 연행했다고 한다. 모든 정황과 증거가 외삼촌을 가리켜도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런 것이 통하지 않던 당시 강력계 형사의 으름장에 그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고. 다시는 누나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일곱 식구를 생각해서라도 선처를 바랐다고 한다. 경찰은 엄마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 물었고, 엄마는 다친 사람이 없으니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마흔이 되어 보니, 그런 허술한 수사가 어떻게 가능했나 싶다. 영장도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외삼촌이 범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외삼촌은 그때 후회했을까. 그저 아니라고 우겨댔더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하는 후회. 아무튼 그 뒤로는 밤에 혼자 있는 게 두려웠다. 궁지 몰린 쥐가 이번에 또 나타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하교 후엔 엄마, 오빠와 함께 장사하러 가는 차에 올랐고 때 함께 따라나서 초저녁엔 장사 주변에서 놀다가 밤이 되면 트럭 조수석에 몸을 뉘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내 생명줄을 노렸던 그 순간. 그 비정함은 분명 충격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죽이지 않고 겁만 줘서'라는 말에 담긴 안도감은, 어린 내가 극한의 상황에서 찾아낸 기묘한 생존 방식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무섭도록 단련시켰다.
새마을금고 직원들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장사하는 동얀 그 건물의 수도를 끌어다 쓸 수 있었다. 주차장 제일 좋은 자리도 내주었다. 당시 근처에 '하이웨이'라는 나이트클럽이 있었는데, 그곳의 웨이터들과 공연하는 언니들이 우리 포장마차 단골손님이었다. 언니들은 가끔 내가 탄 조수석 창문으로 엄마와 오빠 몰래 지폐 한 장씩을 쥐어주곤 했다. 그게 당시 내가 받는 유일한 용돈이었다.
그렇게 세 식구가 하루 벌어 하루 끼니를 해결하며 살던 어느 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집에 없었고, 큰오빠는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나는 단칸방 한구석에 누워 잠자는 척했다. 술 취한 오빠는 언제 화를 낼지, 언제 폭력을 휘두를지 모르는 두렵고 불편한 존재였기에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곳이 없어 그저 잠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빠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침묵이 너무나 섬뜩해서 하마터면 눈을 뜰뻔했다. 그때 이불속으로 추악한 손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더듬거리며 내 바지를 벗기려는 그 손을 애써 피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오빠는 놀라며 나를 달랬다.
"오빠가 손으로 여기를 만지려고 해서 무서웠구나?"
겁에 질린 나를 달래는 척 계속 더러운 짓을 시도하려던 큰오빠는 다행히 술과 잠에 취해 곧 곯아떨어졌고 나는 큰오빠가 다시 깰까 봐 엄마가 올 때까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밤새 두려움에 떨었다.
혹여나 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렇게 대처해야지 했던 상상은 정작 현실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치욕과 공포를 견딘 시간은 나에게 평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자, 만만히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이 되었다.
해가 뜨고 나서야 엄마는 집에 돌아왔다. 큰오빠가 술에 취해 집에 온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들어서자마자 한 마디는
"니 오빠, 술 많이 마셨든?"
나는 엄마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말했고, 엄마는
"저 쓰레기 같은 놈을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라며 연신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시는 나와 오빠만 두고 어디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도 했다. 나는 엄마가 오빠와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 '한동안'은 엄마 말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의 이유를 알고 난 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때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한 집의 가장 같았고, 어떤 때는 술에 취해 악마 같던 큰오빠. 그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왔다 갔다 하는, 아슬아슬한 우리 집 분위기 속에서 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이즈음부터 나는 더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수십 통씩 독촉 전화를 하고 가끔은 학교로도 찾아오는 채무자들도 내 예민함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나는 집 전화가 울리면 수화기를 들고 반사적으로 얘기했다.
"집에 어른 없어요"
잦은 이사의 이유도 절반은 채무자들 때문이었다. 인천에서 내려온 뒤로 고3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반지하와 단칸방은 물론이고, 컨테이너에도 살아봤다. 한파에는 유일한 난방기구인 전기난로 하나 켜고 입을 수 있는 모든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로 세 식구가 끌어안고 서로의 온기로 밤을 견뎌냈다. 수도가 얼거나 기름값이 없어 보일러를 때지 못할 때는 동네 교회 화장실이나 해뜨기 전 학교에 가서 아무도 없는 화장실과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았다.
그런 우리 집엔 돈 벌어다 줄 사람이 큰오빠뿐이었다.
언제 또 외삼촌이 우리 가족을 해코지하러 올지 모를 일이었는데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것도 큰오빠뿐이었다.
어쩌면 큰오빠를 내치지 못한 건 그때의 엄마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폭력은 감정을 기생하고, 민감함은 불안에서 피어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채무와 도피는 나를 '어른 없는 집'을 되뇌는 앵무새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체득하게 했다. 세상의 거친 풍파는 나에게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을 갖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