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풀어낼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진실일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가 당신을 괴롭게 할까 문득 염려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나보다 더한 인생도 있구나, 그나마 내가 낫다'는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계속 읽어도 좋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잦은 전학에 늘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다행히 교우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친구였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일에 필사적일 때도 있었다. 잦은 전학은 친구 사귀는 노하우를 깨우치게 했다. 학교에서는 늘 밝고 명랑했지만, 급식비 미납으로 전교생이 듣는 방송에 내 이름이 불리고 교무실로 불려 가 미납자들과 나란히 서서 고지서 같은 것을 받을 때는 솔직히 속으로는 수치심이 들끓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녔다. 가난보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속내를 들키는 것이 더 싫었다.
중학생이 되자 슬슬 진로 이야기가 나왔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을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오빠도 엄마도 '가방끈이 짧아서' 뭘 어떻게, 언제부터, 어디까지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막연히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으로 대학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엄마는 당시 서산에서 가장 큰 입시 미술 학원에 가서 원장과 상담을 하고 왔다. 나는 미술 학원비가 얼마나 비싼지 몰랐고, 지금도 엄마가 원장과 어떤 협상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해부터 나는 그 학원에서 재료비만 내고 입시 미술을 배웠고, 컴퓨터로 일러스트와 포토샵을 익혔다. 고2, 고3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유일한 중학생. 나름 소질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학원비를 내지 않는다고 눈치 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매일 콧구멍이 시커메지도록 그림을 그렸다.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실기뿐 아니라 내신이라는 것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황당하게도 그 감사했던 학원 원장이 학생들의 대회 원서비를 들고 잠적하는 바람에 (그 금액 다 합쳐도 들고 튈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직도 불가사의하다) 학원은 한순간에 망했고 미술 선생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그 학원에서 인연이 닿았던 선생님이 직접 연락을 주셔서는 작은 미술 학원을 새로 열었다며, 나를 계속 가르치고 싶다고 하셨다. 똑같이 재료비만 내는 조건으로. 아쉽게도 그 재료비조차 내기 어려워지면서 그 학원은 오래 다니지 못했고, 내 나름의 입시 준비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미술을 그만두면서 하교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괴로웠다. 술 취한 오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때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술 먹고 사고 쳐서 잘리는 오빠 때문에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만히 서서 일하는 생산직이나 앉아서 생강을 까는 등의 일을 하곤 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면 다시 일을 그만두고 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돈이 없어 굶더라도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나는 좋았다. 엄마가 있으면 오빠가 나를 괴롭히는 일이 덜했으니까. 하루는 엄마가 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늦은 저녁 오빠와 단둘이 나갔다가 다음 날 퇴원해서 돌아온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고등학생 때 우리 학교는 아르바이트가 금지였다.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 걸리면 다음 날 학교에서 허벅지가 다 터지도록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럼에도 나는 일을 했어야 했다. 그때부터 악착같이 벌어 모았어야 했다. 나는 그 매가 무서워 그러지를 못했다.
그날은 가을바람이 선선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일을 나가서 없었고 나는 오빠와 둘이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오빠와 단둘이.
오빠는 갑자기 TV 옆 진열장(말이 진열장이지 그냥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둔 유리로 된 수납장)에서 우리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빠는 나에게 이 술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했다. 처음 보는 술병이기도 했지만 그 나이에 꼬부랑 영어로만 쓰여있는 술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도 큰오빠는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
"이 술이 뭔지 몰라? 이 쌍 × 아, 이 걸레 같은 x아. 이 술이 뭔지 진짜 몰라?"
알 수 없는 질문과 저급한 막말을 쉴 새 없이 내뱉더니 급기야는 들고 있던 술병을 나에게 집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껴간 술병은 내 뒤에 있는 벽에 가 부딪혔고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오빠는 내 머리채를 잡더니 그 깨진 술병 잔해 위로 나를 질질 끌고 다녔다. 오빠 발에서 나온 피와 내 몸에서 나온 피로 온 거실 바닥이 피범벅이 됐을 때, 퇴근한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괴성을 내지르며 오빠에게서 나를 떼어놨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맞기 시작했다. 자기 자식에게. 그전에도 내가 몇 번이나 오빠를 신고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가 나를 말리는 바람에 하지 못했는데 그날은 처음으로 엄마가 직접 오빠를 경찰서에 신고했다.
"제발 잡아가서 깜빵 좀 쳐 넣어주세요
우리 좀 살려주세요"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엄마의 진술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릴까'
엄마는 지금까지 큰오빠에게 강간을 당해왔다고 했다. 오빠가 나를 건드릴까 봐. 나 대신. 엄마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몸이었고, 어디로 도망갈 곳도 없었기에,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믿을 수 없는 진술로 내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상황에, 저기 한쪽에는 술에 취해 본인이 어디 와있는지도 모른 채 한 손에는 수갑을 차고 벤치에 붙들려 있는 악마 새끼 하나가 소변이 마렵다고 지랄을 하고 있었다.
맹장 수술은 사실 중절 수술을 받으러 다녀온 것이었다고 했다. 경찰은 그 악마에게 다가가 서류철로 머리통을 갈기며 말했다.
"엄마랑 하니까 좋디? 엄마가 좋다고 하든? 네가 인간 새끼냐?"
그러면서 겨우 숨 쉬고 있을 엄마를 한 번 더 확인 사살했다.
나는 그때 느낀 그 더럽고, 역겹고, 불쌍하고, 괴롭고, 분노 가득했던 감정들을 조금도 잊지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아주 생생하다.
이십여 년도 더 된 그날이 마치 어제 일같이 또렷하다.
아, 그 망할 놈의 술은 엄마가 회사 남자 직원에게 선물로 받아온 거라고.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인간'을 보았다. 술 취한 그의 짐승 같은 모습과 소변이 마렵다고 중얼거리는 그의 한심한 모습이 교차하며, 증오와 함께 비극적인 연민이 피어났다. 완벽한 악인은 없다. 나약함과 비뚤어진 폭력이 한데 섞여 서로를 파괴할 뿐이다.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던 그날, 나는 난생처음 '죽음'을 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