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불시착

by 천세아

스물한 살, 선선한 가을쯤이었다. 학교 앞에서 동기들과 수다를 떨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친구를 따라 우리 학교에 놀러 왔던 그 아이는 친구에게 나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 만남을 이어가다 이내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다시 엄마와 오빠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동갑내기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참 많이 의지했다. 남자라는 존재에 불신이 가득했던 내게, 그는 한결같이 사랑을 주었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꼬질꼬질 볼품없이 늘어져 있는 날에도 그는 변함없는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아이는 동네에서 소위 좀 '논다'는 부류였다. 또래 사이에서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외모도 준수하고, 놀기도 잘 놀았다. 학창 시절에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고도 꽤 치고. 그런 그가 나를 만나고는 달라졌다. 주변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배신자 소리까지 들으며 내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당시 나는 기가 막히게 예쁜 미인도 아니었고,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몸매가 늘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서글서글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늘 불안했고 위태로웠으며 날카로웠지만, 그는 한결같이 다정하게 내 곁을 지켰다. 늘 예뻐해 주고, 늘 감싸주고, 늘 내 편이었다.


언제나 폭력과 사건 사고가 빈번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그 아이의 가정은 드라마에 나오는 단란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 집안에 그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모태 신앙이라며 교회를 잘 다니길 바라시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5남매 중 넷째인 그는 유일하게 그 집에서 신앙심이 없었다. 그런 아이를 내가 살살 달래 교회에 같이 나가게 했다. 이미 그전에도 어머님, 아버님은 편견 없이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 그 따뜻함에 욕심이 생긴 나는 일부러 꾀를 내어 더 그렇게 했다.

집안 사정으로 하숙하듯 그 아이 부모님 집에 들어앉아 살았던 적도 있다. 더 기가 막힌 건 하숙비는 고사하고 집안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였다. 마땅히 해야 하는 건지도 사실 몰랐다. 눈치는 빨랐지만 기본적인 가정교육을 통한 소양이 부족했던 탓에, 나는 참 염치없이도 그곳에 기생해 있었다. 단 한 번도 눈치 주신적 없어 그래도 괜찮은 줄 알고 지낸 시간이 몇 달이었다.


항상 기묘한 구조의 누추하기 그지없는 우리 집에도 그 아이는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웃을 일 없던 우리 집에 그 아이만 오면, 마치 원래부터 화목했던 집처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엄마와 오빠 앞에서 나를 살살 놀려대면서도, 내가 눈 한 번 부라리면 깨갱하며 꼼짝 못 하는 시늉을 하니 엄마에겐 그저 예뻐 보였을 것이다.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예쁜 짓도 많이 했다. 툭하면 주폭을 부리는 큰오빠도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함부로 그러지 못했다. 말은 거칠어도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는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형님을 힘으로 이기진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술 취해 난동 부리거나 하면 내가 너랑 어머님 못 때리게 붙들고 매달려 있을 수는 있어. 너는 나 맞아 죽기 전에 도망가서 경찰에 신고해. 그러면 돼."


농담처럼 늘 진심을 전하던 그 아이덕에 나는 그 시절 너무도 행복했다.

그럼에도 불안이라는 고질병은 낫지를 않았다.

내 기준에서 나는 못났고, 그 아이는 너무 빛났다. 사랑받는 방법을 잘 몰랐다.

사랑을 주는 방법 역시 잘 몰랐다.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숨 쉴 틈 없이 매달, 매주, 매일, 매 시간 그 아이를 몰아붙였다. 언제까지나 끄떡없이 내 곁을 지켜줄 것 같던 그 아이도 한 해 두 해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지쳐갔다. 지친 모습이 느껴질수록 내 불안은 커져갔다. 내 불안이 커지는 만큼 우리의 관계에 균열도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다 우리는 여느 연인들처럼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걸로 헤어졌다. 그간의 수백 수천 가지 약속이 무색하게도 아주 허무하게.


그 뒤에도 나는 많은 사람들과 연애했다. 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늘 그 아이가 기준이 되었다. 그 아이처럼 나를 걱정해 주고, 예뻐해 주고, 안심시켜 주고, 위해주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나보다 더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사람은 점점 더 없어졌다. 남자도 나도 영악해지기만 했다. 남자라는 존재를 증오하고 불신하면서도, 하루빨리 가정을 꾸려 원 가정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나를 괴롭혔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볼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 척하고, 그런 삶을 끊임없이 좇기만 할 뿐, 정작 그렇게 살아본 적은 없다. 나는 나를 어떻게 사랑해줘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남에게서 그 사랑을 찾았다. 그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첫사랑은 기억의 지도에서 가장 선명한 좌표가 된다. 특히 상처받은 이에게 찾아온 첫사랑은 세상 전부를 뒤바꿀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불안은 결국 그 관계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사랑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온전하지 못한 나를 채우려는 갈망은 때로 상대를 지치게 한다. 사랑받는 법을 몰랐던 이가 사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그렇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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