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죄책감

by 천세아

그날로 구치소에 들어간 그는 홍성 교도소에 수감됐다. 고작 6년형. 그래도 나는 일단 몇 년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어차피 큰오빠와는 법적으로 가족관계도 아니니, 출소하기 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망할. 엄마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큰오빠는 교도소 수감 중에 검정고시를 보고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다. 성경 구절들을 함께 적어가면서. 회개했다고, 매일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서. 드라마에서 사이코패스들이 하는 짓을 그는 정말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나를 더 미치게 만든 것은 엄마였다. 처음엔 나만큼이나 분노했지만, 차츰 큰오빠를 안쓰러워했고, 급기야는 미안해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다시 분노했다. 큰오빠가 아닌 나를 향해. 사람이 저렇게 매일 지극정성으로 편지를 쓰고 반성하는데, 어떻게 답장 한 번을 안 하고, 면회 한 번을 안 가볼 수 있느냐며 나더러 피도 눈물도 없는 년이라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독립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독립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거의 성인이 되자마자 신용불량자가 됐다. 당시에는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신용카드를 만들라 하고 쉽게 만들어주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이미 대출 연체 등으로 신용이 좋지 않았고, 큰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에 신용이 깨끗한 것은 열아홉이던 내가 유일했다. 엄마는 내 명의로 여기저기서 신용카드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한참 동안 생활비를 충당해 왔다. 당시 휴대전화도 온 가족이 내 명의였다. 그런 것들이 제때에 갚아지지 않으니 성인이 되고 나서 얄짤없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신용불량자에 비빌 언덕 없는 내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먼 곳으로 취업하는 것뿐이었다. 기숙사가 있거나 숙식이 제공되는 곳으로.

편지에 담긴 그의 '회개'는 가면에 불과했지만, 엄마에게는 한 줄기 희망으로 작용했다. 그 희망이 결국 나를 향한 엄마의 비난으로 이어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폭력이란 비단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감정마저 조종당할 때, 내면은 더욱 황폐해진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물두 살 겨울. 평택의 한 공장으로 취직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공장에서 텃세가 좀 있었지만, 집을 떠난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가 내 소득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 같으니 당장 일을 그만두고 4대 보험이 안 되는 일, 소득이 잡히지 않게 월급을 현금으로 주는 곳을 알아보라 했다. 그때는 그러면 안 되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병원에 한 번 다녀오면 병원비가 수백만 원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 장애인이자 기초수급대상자인 엄마는 병원비가 몽땅 공짜였다. 내 병원비까지도. 그 혜택이 없으면 엄마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3~6개월 단기 계약직이나 4대 보험을 가입하지 않는 조건으로만 일을 찾아다녔다. 덕분에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청소부터 공장, 콜센터, 식당, 쇼핑몰, 물류센터, 마트, 신문사… 조건만 맞으면 일단 일하고 봤다. 그리고 번 돈은 내가 지내는 고시원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두 엄마에게 입금했다. 큰오빠가 교도소에 수감된 후로 내가 우리 집 가장이었으니까.

입시 미술을 그렇게 오래 했지만, 엉뚱하게도 내 전공은 자동화 시스템이었다. 밀링, 선반, CNC, CAD 이런 것들을 배우는… 대학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엉망이었다. 학점 관리도 안 됐고. 우리 집엔 대학 진학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상담할 어른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가정 형편을 알기에 당연히 내가 바로 취업할 거라 생각했다. 나 역시 대학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왜 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막연히 ‘최소한 대학은 나와야지’란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판타지가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나오면 가난이라는 냄새가 좀 옅어질 것 같은 바보 같고 막연한 착각. 또 집에 대학물 먹은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지 하던 초졸 엄마의 기대도 한몫했는데, 엄마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던 사람이었다.

남동생과 오빠 사이에 끼인 엄마는 두 사람의 배움을 위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공장에 들어가 첫 번째 남편을 만날 때까지 그저 일만 했었다고 한다. 엄마는 어느 땐 참 강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내가 무엇을 배우고자 할 때만큼은 배포가 두둑한 여장부 같았다. 뭔가 사달라는 말은 먹히지 않았지만, 배우고 싶단 말엔 언제나 Of course. 그렇지만 대학은 엄마의 허락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돈이 있어야 했다. 생전 노름판엔 가본 적도 없는 큰오빠가 딱 한 번 발 들인 그곳에서, 몇 년간 개미 오줌만큼씩 모아둔 돈을 하룻밤 사이에 잃고 온 날, 막연했던 대학이라는 꿈은 말 그대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엄마도 나도 그 기막힌 사실을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고, 학교에 현수막도 붙고, 대학 주변 원룸도 알아보고…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됐다. 우리에게는 그럴 돈이 없다는 것을. 그런 지가 이미 한참 됐다는 것을. 더구나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오빠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모든 것을 회개한 뒤였으니까. 벌 받을 놈이 이미 벌을 받고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원망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홍성 기능대에서 교수 두 명이 학교에 찾아왔다. 왜인지 매번 급식비를 밀려 같이 호명되던 친구들도 자리에 있었다. 신입생 유치를 위한 자리였던 것 같다. 다른 건 오래돼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학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여학생은 기숙사도 공짜라고 했다. 그제야 왜 이 자리에 매번 급식비 밀렸다고 함께 혼나던 친구들이 함께 있는 건지 이해가 됐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학교가 한국폴리텍, 그중에서도 홍성 캠퍼스였다. 큰오빠가 수감돼 있던 홍성 교도소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덕분에 엄마에게 모진 년, 독한 년 소리 많이 들었다. 코앞인데 면회 한 번을 안 가냐면서. 당시의 내가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그때의 엄마가 이해 안 되는데… 그런데 이해는 못해도 이유가 생기니 면회를 갈 수밖에 없었다.

출소라는 공포.

모범수가 되니 형량이 2년이나 줄었라. 60년도 부족한 쓰레기에게 감형까지 해주다니. 심지어 모범수들은 단체로 가족 면회도 했었다. 나에게 대단한 경험을 선물해 준 오빠는 출소하자마자 바로 술에 입을 대더니 나중엔 그걸로 엄마와 나를 협박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엄마가 큰오빠 옥바라지 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길 바랐다.

교도소에서 나온 오빠는 마치 새 삶을 사는 사람처럼 교회도 나가고 엄마에게 정말 잘했다. 그렇게 찰나 같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랜만에 집에 놀러 가 엄마와 둘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때 큰오빠가 들어왔다. 그간 못 마신 술을 다 마신 사람처럼 인사불성으로 교도소 동기라는 사람에게 업혀와서는 TV에 소변을 냅다 갈기더니 집안 살림을 때려 부수면서 소리쳤다.


"또 신고해 봐, 또 신고해 봐"


온갖 더러운 욕설을 해대는데, 엄마와 나는 그 길로 도망 나와 어딘지도 모르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숨어만 있었다. 엄마가 본인을 신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한 날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안 그래도 뜸하던 발길은 더 줄어들었다.


큰오빠와 엄마의 사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엄마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었다. 어떤 날은 전화해서 (큰오빠가) 술 처먹다. 죽었으면 좋겠다면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다가도, 어느 날은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둘이 사이좋은 건 상관없었다.

다만 그 둘을 모으는 구심점이 왜 내가 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엄마에게 털어놓았던 내 이야기들, 엄마 하소연에 맞장구쳐 주느라 했던 말들, 그런 것을 큰오빠가 어찌 그리 상세히 알고 걸핏하면 나를 겁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웃는지,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양.


그즈음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정신과를 방문했고 약을 처방받았다. 당시의 나는 자격지심, 피해의식 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가 출소 후 보여준 '새 삶'은 찰나의 희극이었고, 이어진 폭력과 협박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옥바라지를 후회하길 바랐던 나의 마음은 복수가 아닌, 그 지긋지긋한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폭력은 상처 위에 더 깊은 상처를 남길뿐이다.

'왜 내가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절규. 나약함과 피해의식으로 얼룩졌던 그때의 나는, 폭력의 희생양을 넘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뒤틀린 권력관계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 나를 보호하고 내 감정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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