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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Oct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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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삶의 속도와 같다는 말에 무척 공감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시간은 점점 더 속도를 낼 것이다. 계절도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듯 서서히 쇠퇴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지만, 어느새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진부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굳이 100세 인생을 네 개의 계절로 똑같이 나눠 본다면,

봄은 스물다섯, 

여름은 오십,

가을은 칠십오, 

겨울은 꽉 채운 백세가 된다.


봄 : 10/20대 [ 화양연화 ]


기지개를 켜며 꼬물 락 거리는 우리는 새싹이다.

예쁜 옷 차려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봄 나들이를 간다.

우리의 봄은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하얀 도화지 앞에서의 두근거림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많은 '처음'이 생긴다. 그리고, 적응해나간다.

적응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 

내 봄에 새로운 사람들이 피고 진다. 그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공유하고 '나'를 채운다.

여름에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결국 나는 '나'가 되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때때로, 봄 날씨를 얕잡아보고는 카디건만 걸친 채 집을 나섰다가 꽃샘추위에 감기가 걸릴 때도 있다.

어쩌면 넘어지는 일도, 슬퍼할 일도, 후회할 일도 많을 것이다. 

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게 될 수도 있다. 사랑의 열정. 청춘의 열정

봄이라는 이유로, 청춘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금세 딛고 일어설 수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꽃이 피는 봄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달콤한 봄바람과 봄빛과 봄기운과 봄햇살을 힘껏 느껴야 한다. 

아, 그럼에도, 봄에는 '하지 말라'는 것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금방 사라지기에 가슴에 나는 것.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봄이다.




여름: 30/40대  [ 뜨거운 여름의 맛을 느끼는 사람들 ]


지난봄, 열심히 나를 채우며 새로운 시작에 적응했다면 이제 '나'라는 사람을 화끈하게 보여줄 계절이 찾아왔다. '나'라는 사람은 누군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뜨겁게 알릴 기회들을 붙잡는다. 그 기회들을 찾아서, 더 열심히 걷고, 뛰어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하는 충분한  통찰을 통해 나를 더 깊게 파고든다. 나만의 삶의 방향을 가이드해줄 가치와 감각, 열정을 실험한다. 여름에 어울리는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쨍쨍한 여름의 따가운 햇빛을 오래 맞고 있으면 새까맣게 타버린다. 여름에는 같이 뛰는 쟁쟁한 사람들이 많아 게을리하면 뜨거운 실패를 맛보고 내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릴 수도 있다. 그만큼 치열한 여름이다. 비키니를 입기 위해 열심히 몸을 관리하기도 하고, 나만의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열정적으로 필혁하기도,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을 향해 최선의 나를 어필하기도 한다.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다 실패를 맛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뜨겁게 살다 지칠 때 즈음이면 여름 방학을 찾아오기도 한다. 마구 달려오는 여름의 파도처럼 무언가 닥치면 온 몸으로 받을 것이며, 여름 장마가 그치고 난 뒤의 푸른 하늘처럼 그렇게 다시 또 맑아져 기분 좋은 산들바람을 느낄 수 있는 여름이다. 




가을: 50/60대  [ 뜨거운 여름의 맛을 보고 각자의 '성공'을 수확하는 사람들]


깊고 따스한 계절이다. 여름에 심어놓은 열매를 맺고 수확하는 가을을 지나는 사람들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성공일 수도 있고, 자녀들의 성공일 수도 있겠다. 개인의 성취와 부를 두둑이 쌓아놓는 시기일 것이다. 여름을 얼마나 열심히 지냈는지에 따라 낮 알이 될 수 도 있고 큰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천고마비의 계절 '마'. 말처럼 삶을 살아가는 단단한 근육들이 충분히 탄탄해졌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가을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울 애기, 밥 잘 챙겨 먹어. 생일 축하해! 9월은 풍요롭고 하늘도 푸르고 이뻐. 참으로 좋은 계절에 태어나준 네가 고맙다. 따랑해♡"


어느 나라에 있든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청명한 날씨를 매년 선물 받을 수 있게 해 준 우리 엄마이다. 같은 가을에도 9월 초가을의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있는가 하면 늦가을의 하늘은 한껏 우중충하기도 하다. 말도 안 되는 슬픔과 행복한 눈물 등 온갖 감정들과 경험들을 겪고 난 사람들의 고독한 시간이다. 가을비와 함께 밀려오는 그리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아직 겪어보진 않았지만 갱년기 혹은 '인생 권태기'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서로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바꾸려고 하거나 탓하지 않고 진정한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인정을 바탕으로 함께하는 것. 이것이 나의 가장 가까운 가을, 부모님으로부터 보인 가을의 모습이다. 여름의 뜨거운 맛을 본 후, 가을의 색으로 갈아입은 낙엽들을 감상하면서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적당함을 찾은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겨울: 70/80대  [ 지난 계절들을 되돌아보는 시기 ]


초여름 지금의 내가 아직은 정말 알지 못하는 계절이다. 

겨울을 묘사하는 방법도 계절이 지날수록 바뀌겠지.

내가 겨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대화뿐이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겨울의 눈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겨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겨울에는 춥고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굼띄어 진다.

따땃한 이불 밑 방바닥에 몸을 쓰윽 구겨 넣고 귤 까먹다 출출해지면 찐 고구마, 붕어빵, 호떡... 

갈수록 배는 튀어나오고 오랜만에 추운 길바닥을 걸으려니 다리에 힘이 없기도 하다. 

봄에 봤던 꽃들이 막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의 시원한 파도, 빙수,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그리워진다.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게을러지는 겨울이다.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고요하고 조용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지난 사계절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그 해의 사계절은 한 번 뿐이기에 지난봄. 여름. 가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음에 더 추워질 것 같기도 하다. 그리움과 불안감이 공존하며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닳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겨울이다. 겨울은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일어나는 계절이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따듯한 크리스마스와 활기찬 연말 파티가 있지만,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눈이 녹는 계절이기도 하다. 넘치는 빛바랜 기억을 안고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을 것 같다. 겨울에는 겉으로는 꽃이 더 이상 피지 않고 지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만은 달콤 향긋 수천, 수만 송이의 꽃 정원을 가꾼 사람이 되고 싶다. 맞잡은 손은 따뜻했고 힘들 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행복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계절이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중 틈을 내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끊임없이 표현할 것 같다. 겨울에는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많을 것 같다. 마지막 남은 호떡을 쥐어주기도 하고 함께 첫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행복했던 사계절의 기억을 가지고 아주 긴 겨울잠을 자러 준비하러 가지 않을까.




나는 지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초여름을 지내고 있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아니면 나의 인생을, 나의 사계절을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차피 가속하고 있다면 그 속도를 즐기고 싶다. 내게 주어진 사계절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먼저 다가가서 더 눈부신 사계절 속으로 걸어 나가고 싶다. 계절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지만 그 해 그 계절에만 나만의 속도에 맞춰 나아갈 때 분명히 마주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 시간과 속도를 오롯이 느끼는 나만의 방법은 글쓰기이다. 그래서, 조금 늦었지만 글로나마 나의 지난봄을 되살아나게 하고 싶다. 기록을 하면서 나의 사계절을 뚜렷이 하고 싶었다.


어릴 때 영화 <하이스쿨 뮤지컬>을 보고는 '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진 이후로, 영어 공부 말고 영어로 모든 공부를 할 방법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국제학교로 전학을 간 제일 친한 친구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다가 질투에 사로잡히는 시절이었다. 자타공인 딸바보로 알려진 엄격한 아빠는 어린 딸을 혼자 외국에 보낼 순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애교 가득한 눈빛을 발사해도 애써 눈을 피했던 그였다. 그럴 때마다 아빠가 미웠다. 그렇지만서도 난 아빠 서재에 꽂혀있던 지도가 좋았다. 벽 한 면을 다 차지했던 거대한 미국 지도와 아빠의 티셔츠만 한 빅사이즈 미국 도로 지도책을 몇 시간이고 보고는 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없던 모험심도 불타올라 혼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너무 넓었다. 그리고, 서울의 아파트와 코 앞의 학교에서만 10대를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지도책의 끝없는 노란색 고속도로는 날 정말 미국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기회는 느지막이 16살의 내게 찾아왔다. 혼자 호주 멜버른으로 떠났다. 나의 10대를 바쳐 그렇게 꿈에 그리던 삶은 온전히 나만이 심취해있었다. 그게 참 아쉽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붙잡는 심정으로 글을 쓰는 것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을 그때의 순간들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아쉬움에서 시작했다. 어릴 때의 꿈을 이룬 평범한 여대생의 사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봄을 누군가도 느끼면서 그들의 사계절도 환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 떠나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려주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이왕이면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더 진하게 경험했으면 좋겠다. 


내가 지내온 사계절을 돌아봤을 때 가장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을 마음속에 여러분도 초대해 우리의 모든 사계절의 순간들을 붙잡을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이고 싶다. 봄에도 오고 싶고 여름에도 함께이고 싶고 겨울에도 다시 찾아주어 모든 계절에 당신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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