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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Mar 30. 2021

호주 학교에서 살아남기

힘을 빼야 떠오를 수 있어

청량한 파란 체크무늬 원피스가 교복이라니!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리고 인형 신발 같이 생긴 검정 구두를 신고 힘차게 발을 내뎠다. 등교 첫날에는 특별히 버스 대신 호스트 아빠의 차로 학교까지 갔다. 우리 동네 박스힐 사거리를 지나 학교가 있는 캠버웰 동네로 들어가기까지의 월요일 아침은 부산했다. 


학교에 들어선 나는 완전히 압도됐다. 학교 안은 빠르고 시끄러웠다. 금발머리를 한껏 땋아 올린 수백 명의 파란 원피스 교복의 학생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겁먹은 나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냥 한 번 해봐. 그리고 즐겨보자!"라고 외치는 듯한 생기 넘치는 개학 첫날이었다.

어째서인지 항상 처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 해를 같이 보낼 반과 사물함을 얼떨결에 배정받고는 바쁜 척을 해보기도 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때면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도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이 보인다. 아침 조회 시간 전, 등교를 한 친구들은 사물함에 가방을 놓고 아이패드와 필통만을 들고 각자의 교실로 삼삼오오 들어간다. 열고 닫는 사물함 안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테니스 라켓, 런치 박스, 알록달록한 파일들을 보면서 그 친구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운동을 하는지 셜록 홈즈처럼 실마리를 찾아보기도 했다. 담임 선생님은 회색의 멋진 지휘자 머리를 하신 국어 과목 선생님 Mr. Pannam 이시다. 위트가 있고 장난이 많으셨다. 아침마다 신문의 주요 뉴스를 읽어주셨고 학생들과 같이 낱말 퀴즈 푸는 시간을 즐기셨다.


그렇게 기억이 거의 없지만 진이 빠졌다는 느낌만이 남아있던 호주 학교에서의 첫 날을 마쳤다. 마야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호스트 엄마와 아이리, 짐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털썩하고 앉으니 약간 어지럽다. 순식간에 지나간 학교에서의 첫날에 아직 취해있다. 그래도, 멋스러운 학교 엠블렘이 박혀있는 남색 재킷과 푸른 체크무늬 원피스 교복 차림으로 학교 캠퍼스에 등교할 생각을 하니 어깨가 저절로 펴졌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내가 꿈에 그리던 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는 날들이다.


다음 날, 나는 파란 원피스 교복을 입은 20명 남짓의 여학생들 사이에 다시 앉아 있다.

Global Citizen (사회) 시간, UN에 대해서 배우고 있을 때였다. 프로젝터 화면에 반가운 얼굴이 떴다.  반기문 UN 사무총장님 이셨다.

"재키, 이 분 너의 나라 출신 분이지?" 사회 선생님 Mrs.King 이 물어오셨다.

대답하기도 전에 모든 친구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순간 당황했지만, 자신 있게 그렇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반 전체에 울려 퍼진 순간이다. 


해외에서 만나는 반기문 총장님은 더욱 반가웠다 ^__^


수업이 끝나고 한 친구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어떤 그룹의 친구들 무리에 애매하게 끼여 먹어야 되나 또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는 첫 점심이었다. 2월의 멜버른의 햇빛은 찌푸리면서 먹어야 할 정도로 강했다. 한 친구가 "너 발음 미국 발음이네?"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응, 한국에서 배우는 영어가 미국 영어야." 정말 그랬다. 호주 영어와 미국 영어는 또 달랐다. 서울에서 제주도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친구가 신기하지 않을 리 없겠지. 이때부터였을까, 나는 나의 영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발음하는 게 호주 발음인가?', '한국에서 배운 이 문법이 이렇게 쓰이는 게 맞나?'


Chromosomes, Heterogeneous, Nucleus... 점심시간 직후의 모르는 단어가 마구 떠다니는 생물학 시간이다. 빨간 파마머리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쓰신 선생님은 굉장히 깐깐해 보이셨다. 팔짱을 끼고 우리가 어서 앉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교실 창문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햇빛은 잘 자라고 덮어주는 담요 같았다. 백과사전 마냥 두꺼운 생물학 교과서의 깨알 같은 글씨를 읽으랴, 한쪽 귀로 흘러 내려가는 선생님의 설명을 주워 담기 바쁜 와중에 "밍키운 초?" 하는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Yes?" 눈썹을 올리시며 네가 '민큰 초Minkeun Cho' 가 맞냐는 눈빛을 보내신다. 예감이 안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르는 생물학 단어가 왕창 끼워져 있는 문장이 내 귀에 꽂혔다. 그리고, 그 문장 마지막에 물음표가 박혔다. '망했다.' 질문도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한 번 더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 '왜 하필 나냐...' 지금도 기억이 안나는 그 질문은 그렇게 힘없이 내 앞에서 휘발되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책만 바라보며 끙끙 앓고 있는 나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때,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다시 한번 책을 짚어주며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너무 고맙지만 문제는, 난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답을 못했다. 그렇게 나의 첫 생물학 수업은 대망신으로 끝이 났다. 


한국에서도 영어를 좋아해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나 역시도 '언어 장벽은 절대 피해 갈 수 없없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와르르 무너졌다. 난 내가 '한국에서 온 영어 못하는 교환학생'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은 제일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있다. 처음이니까, 외국인이니까,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게 그냥 당연해지는 게 싫었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뭔지, 못 알아 들어도 겉으로는 다 알아듣는 척,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진짜 내 모습을 잃을 때도 많았고, 실수를 통해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때도 많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와 '곧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이 한없이 충돌했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건 영어를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있는 내가 아니라 갈수록 모르는 영어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일상이었다. 눈을 뜨고 이불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밤에 침대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열심히 해온 과정보다는 완벽에 가까운 결과를 요구받았던 날들이 더 많았다. 수학 문제 풀이과정이 맞았더라도 답이 틀리면 가차 없이 빨간 사선이 그어졌고, 영어로 소통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 하나의 완벽한 영문장을 말하기 위한 문법들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호기심에 의한 순수한 공부보다는 '좋은 성적'이라는 결과를 내기 위한 청춘의 시간과 에너지를 받친다. "선생님, 이거 시험에 나와요?"라는 질문이 난무하는 교실에서 배우는 내용 이외의 것들이 얼마나 소화가 되어 배움이 되는 공부가 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질문이 생겨도 쉽게 묻지를 못한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문제일 수도 있고 밤새 함께 고민해보는 가치 있는 문제일 수 도 있지만 질문을 물어보기도 전에 혼자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만 모르는 거겠지." 


사회는 냉정하다. 사람들 또한 좋은 성과를 내는 조직에게 관심이 가기 마련이고 결과가 가장 정확하고도 정직한 지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성과를 내는 과정 속에서 내 것을 찾아 배우려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행동하고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따로 '영어 공부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영어라는 것 자체를 내 삶 속에 녹여내야 했다. 영어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 치면서 파워 포인트 준비하고 아빠의 눈물까지 보고 왔는데 이제 와서 힘들다고 부모님께 말하기 싫었다.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 해왔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호주로 올 필요도 없었겠지. 그래, 난 배우러 온 거다. 그 과정을 즐기면 된다. 무너질 때도 어떻게 무너지는지 잘 봐 두면 된다." 다음에 할 때 더 잘하고 싶어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궁금하면 배울 것이고, 배우면 개선될 것이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태도를 바꾸자. 사람들이 나의 영어에 대해서 주는 피드백에 익숙한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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