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첫번째 가족: 체리 과수원길 1번지
"Welcome to Melbourne, Jackie"
호스트 시스터 마야와 호스트 대디 앤드류는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나를 환영했다.
그렇게 나는 내 몸집만한 짐 가방을 양손에 쥔 채, 14시간의 긴 비행으로 지친 녹초 상태로 나의 첫 호스트 가족을 만났다. 사실 첫날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도착해서 멜번의 공기를 깊게 들이 마쉬니 정말 기쁘면서도 정신 단디 차리지 않으면 다 잃을 것 같기도 했다. 첫날엔 그 느낌만이 살아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눈 앞에 펼쳐질지 아무것도 모른채, 노란 혼다 차를 타고 나의 첫 멜번 하우스로 향했다.
체리 과수원길 1번지 갈색 벽돌집이 앞으로 내가 6개월동안 살 집이다. 차고의 엔진 소리가 꺼지니 곧이어 호스트 맘 쥴리아, 마야의 두 동생 아이리와 짐이 문 밖으로 나왔다. 정신없이 짐을 어느 정도 풀고 보니 평화로운 이른 오후였다. 햇살 비치는 침대에 지친 몸을 겨우 뉘였는데, 둘째 아이리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산책하러 가자고 물어온다. 문득, 내가 앞으로 살 동네가 궁금해졌다. 내가 16년동안 살아온 서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빽빽히 들어선 닭장 같은 아파트들도 없었고, 상가 가득 채운 수많은 간판들도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와 숲이 더 많이 보였고, 각각의 집들의 정원을 가득 채운 개성들이 더 많이 보였다.
나와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가족과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겁없이 그들의 일상에 뛰어들었다. 그래놀라 시리얼 하나도, 뭉쳐진 종류냐 스웨덴식 흩어진 종류냐로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르고, 잠자기 전에 가장 생각이 많아 잠들기까지 오래 걸리는 나로서는 코 고는 마야와 방을 나눠 쓰는 것도 고약이었다. 무엇보다 6명이 화장실 하나를 나눠쓰는 건 마치 유령의 집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누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볼일 보는 도중에 문이 화달딱 열리기는 십상이었고 (덜그럭 거리는 문고리 따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 동생들이 볼일을 보고 물을 안 내리거나, 물놀이를 신나게 하고 나온 화장실에 뭣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흥건히 젖은 바닥에 미끄러질 뻔 한 일도 많았다.
웨스턴 패밀리는 동물 애호가였다. 토끼 5마리, 고양이 한 마리, 앵무새 한 마리, 물고기 6마리를 위한 연못까지. 애완동물이라고는 구피와 붕어를 키워본 적 밖에 없는 나로서는 처음에는 참으로 복잡스럽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 마야가 식탁 자리에서 혼나는 모습, 마트에서 막내 짐이 울고 불고 난리칠때 어쩔 줄 몰라하는 호스트 맘과 대디의 난감한 표정, 부부의 작은 말다툼 등 한 가정의 리얼한 모습을 다 보았다. 사람 사는건 다 똑같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까지 보게 되서 더 가족 같았다. 가족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하고도 다채로운 일들이었다. 마야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나까지 추수감사절 용돈을 챙겨주실 때나 호스트 패밀리의 오랜 가족 친구 저녁 식사에 나를 데리고 갈 때면 정말 가족이 된 기분이 들어 외롭지 않았다.
마야가 한참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을 즈음이어서 그런지, 나는 나를 더 찾는 둘째 아이리와 더 친하게 지냈다. 아이리는 자기가 읽는 책, 오늘 쇼핑몰에 가서 산 옷, 가장 좋아하는 매니큐어, 자기가 배꼽 빠지게 본 유튜브 영상들 (나는 하나도 안 웃겼다) 등을 나를 데려다 앉혀놓고 재잘재잘 이야기 해줬다. 학교 갔다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언니, 집에 왔어?"하는 먼저 하교한 옆방 아이리 목소리와 함께 나의 영어 리스닝 공부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호주만의 특유 발음도 계속 들어보고 '호주의 틴에이저들'은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말투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의 틴에이저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가진거, 너가 가진것이 세상 멋지고 좋은거라며 자랑하기 좋아했고 그들만의 관심사를 넓히느라 바쁘다. 그걸 알게되니, 아이리의 친구들이 대거 참석한 에어바운스 파티가 열렸을땐, 특별히 DJ로도 초대되기도 했다. 아이리와 만날 그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신나는 음악과 함께 사진도 찍어주고, 어부바 해주며 잘 놀아주는 언니, 누나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서울에서 보내오는 택배 상자는 무척 반가웠다.
허니 버터칩이 출시 되고 한창 불티나게 팔렸을 즈음이었는데 완판난 과자를 어디서 구하셨는지 택배 상자에는 허니 버터칩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리 6명은 허니 버터칩 한 봉지 쯤은 가뿐히 해치웠다. 허니 버터칩의 참 맛을 맛본 막내 짐은 애교 가득한 눈빛을 장착하고는 이따금씩 방문을 슬며시 열며 "Jackie, 오늘은 허니버터칩 없어?" 하며 물어왔다. 하루는 호주 대표 과자 Tim Tam과 허니 버터칩을 바꿔 먹자는 딜을 제안해오기도 하면서.
하루 하루 반복되는 나의 일상은 나의 첫 호스트 패밀리, 웨스턴 가족 덕분에 더욱 다채로워졌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매일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고, 스쳐가는 일상 속에서 추억도 이곳 저곳에서 피었다. 남의 집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은 사소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