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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Sep 29. 2020

일어나야 할 일은 기어코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나에겐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었다.


"아빠 친구 딸이 교환학생 갔는데 거기 호스트 가족이 밥도 잘 안 먹이고...우울해지고...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귀국했어. 너를 진짜 딸처럼 챙겨줄지 어떻게 알고 모르는 가족을 믿어? 아빤 너 못 보내. 반대"


딸의 생각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단호한 아빠였다.

안전 상의 이유로 유학은 절대 안된다는 자타공인 딸바보가 나를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늦게 찾아온 나름의 사춘기 반항심과 함께 아빠를 기필코 설득시켜 호주로 가고 말겠다는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큰 종이를 펼치고 앞으로의 5년 장/단기 목표를 막힘없이 쓱쓱 써나갔다.

웬만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빠와의 토론에서 쉽게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그 당시 자기 주장 잘 펼치지 못했던 16살 나에겐 아빠는 너무 가파르지만 꼭 넘어야 할 에베레스트 급 산이었으리라. 

가족 회의, 여행 계획, 뉴스 이슈 토론, 마케팅 인사이트 등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빠의 논리에 작은 잽을 날려본 짬으로(?) 이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나에게 왜 좋은 기회이고,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교환학생 생활을 할지, 교환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할건지까지, 내 나름의 논리를 뒷받쳐줄 총체적인 내용을 담은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내가 ROI (Return on Investment/투자 대비 효과)를 이만큼 뽑을 수 있으니 내 계획을 받아들여달라고 selling 하고 어필 하는 것이었다. '뭐 이렇게까지...'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절실했다.


열과 성을 다한 '발표'를 마친 나와 눈이 마주친 아빠는 말 없이 눈물을 훔치셨다. 내 프레젠테이션은 대성공이었다. 초등학생때부터 단지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닌, 영어로 모든 것을 공부하고싶다는 얘기를 꺼내왔던 딸의 열정은 몰라봐주고 고등학생이 다 되어 '유학하기 늦은 나이'에 이제야 나를 이해하시게 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빠'라는 높은 산을 막 넘어온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았다.

목표를 정해두고 사다리의 다음 칸으로 착실히 발을 올리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나의 성장이 없는 주입식 교육에 지칠 때로 지쳐 다른 일을 해보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깨달았을까. 나는 스스로를 열정적이고, 분석적이고, 야심찬 사람으로 여겼다. 부무님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끈한 토론을 벌이고 부모님을 따라 휴양지로 따라가는 대신 동생과 내가 비행기 티켓부터 숙소, 여행 루트까지 계획하며 자랐다. 뒤늦게 인정하건대, 내 결정과 성실한 행동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반사적인 희망에서 내려진 것이기도 했다. "와, 참 인상적인 아이구나!" 하는 호의적인 반응을 즐겼다. 그게 나의 하루종일을 즐겁게 했다. 그건 물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지만, 그렇게 사는 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종종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워질 때가 많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걸까? 칭찬과 인정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걸까? 어떻게 세상에 기여하고 싶을까? 혼란스러운 상태로 타국에서 1년을 보낼 자신이 있는지, 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던질수록 두려움만 커졌다. 점점 내가 아닌 남의 시선에 휘둘리기도 했다. 호주에 갔다오면 '복학생'이 되는건데 친구들이, 선생님들이, 엄마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무엇보다 대학 진학에 있어서 고등학교 1년을 외국에서 보내고 온다는 사실이 '보통 사람들의 트랙'과는 너무 다른 길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나는 주변의 시선을 태워버릴 만큼의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열정'이라는 단어가 나이브함으로 치부되는 듯하다. 열정이라는 단어 더 이상 진지하지 않다.  테라오 겐의 말처럼 꿈을 이야기하는 한 그것을 이룰 가능성은 계속 되는데 말이다.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그토록 원했던 외국에서 영어로 공부할 기회를 만났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좀 더 잘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안되면 말고!! 밑져야 본전!! 해보는거야!!


어서 빨리 호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빠는 나와 다른 학생 1명이 호주 자매학교 교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내 손을 잡고 담당 선생님께 찾아가 교환학생 프로그램 보호자 서명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의외였다. 이렇게 빨리 결단이 내려지는 일이었던가. 내가 필사적으로 준비한 그 프레젠테이션 덕분이었을까? 짜릿했다. 


선생님도 결단력있는 아빠의 행동에 살짝 놀라신 눈치였지만 "네! 참 잘 결정하셨어요." 하셨고

그렇게 나에겐 호주 자매학교 교환학생 자격이 주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1월 29일

16년동안 살았던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혼자 긴 여정을 떠나는 날이다.


8월 말, 전학 온 지도 엊그제 같은데 4년을 보낸 것 같이 깊은 우정을 나눴던 4개월의 한 학기가 끝이 났다. 한국학생이 한국 학교로 한 학기 교환학생 온 것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두번째 학교와 금세 작별 인사를 해야했다. 나의 마지막날은 반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작별 파티로 채워졌다. 처음 자기 소개를 했던 교탁 앞에 서서는 고맙고 보고 싶을거라 하며 엉엉 울어버렸다. 설렘 반 두려움 반,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여정 앞에 참 감사하고 힘이 나는 메세지를 마구 받았다.

반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굿바이 파티



내 등치만한 1년치 짐이 가득 담긴 이민 가방 2개를 들고 인천 공항으로 향하던 출국날 전까지 '갈까 말까'의 고민을 무수히 반복했다. 할 수 있을거라고 다짐을 했다가도 어느 날, 엄마가 '학부모 모임'을 갔다가 오시는 날엔,


"그 1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고2 얘를 그냥 그렇게 보내게?"


"OO이 갔다오면 한국사 시험도 새로 추가되고 교육 과정 더 복잡하게 바뀐대. 대입 더 어려울텐데?"


"1년 꿇으면 손해보는거잖아요, 언니! 진짜 보내는거야?"


라는 질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정말 걱정이 되어서 그런건지 그렇게 쉽지 않은 결정을 하는 속내를 계속 떠보는 질문들이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마치 엄마가 억지로 보내서 떠밀려 유학가는 부잣집 딸처럼 얘기를 하셔서 오히려 가야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심지어 가족들도 종종 내 마음을 은근슬쩍 떠보며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다. 16살 여자 아이 혼자, 호주라는 낯선 땅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놔둘 부모님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고등학교 2학년 과정으로 인정 되지도 않아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고 돌아오면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반복해야한다. 오로지, 경험을 하기 위해서 가는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학교도 아니고, 믿을만한 외국 파트너 학교에서 고등학교 1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모진 말들이 내 마음을 흔들려고 덤빌 때 마다 호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어느 순간 굳혀져 있었다. 

가기로 마음 단단히 먹은 것이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Ladies and Gentlemen, We have arrived at our destination, Melbourne, Australia.

Please check under your seat and in the overhead rack ......"


그렇게 난 한겨울이었던 1월, 한국에서 한여름의 멜버른을 향해 번지 점프를 했다.


호주 터치 다운 후 찍은 멜번 공항에서의            첫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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