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의 시작
여고 시절,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딩동댕동~ 울리면 친구들과 나는 건물 꼭대기에 있는 학교 식당으로 달리기 선수들 마냥 부랴부랴 달려갔다.
여느 때처럼 게시판이 붙어있는 복도를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그 날따라 못 보던 흰색 A4 용지가 펄럭거렸다.
"호주 자매학교 교환학생 모집"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빨리 오라고 나를 불러댔지만 내 몸은 얼음처럼 그 게시판 앞에서 굳어버렸고 내 머릿속은 온통 호주 교환학생을 지원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아이였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외국 살이를 꿈꾸던 나의 열망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생활에 들어와 있었다.
알람처럼 집안의 아침을 깨웠던 EBS 영어 라디오와 AFKN TV에서 즐겨보던 SESAME STREET,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영어 동요, 엄마가 잠들기 전 읽어 주시던 영어동화책,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들어왔었던 팝송들 덕분에 적어도 나에겐 영어가 공부해야 하는 수능 과목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편하게 접하던 모국어 다음의 언어일 뿐이었다. 그중 가장 임팩트가 컸었던 프로그램 하나가 있었다.
KBS 글로벌 성공시대 (해외동포들 중에 각 분야에서 성공하신 분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종 파티를 기획해 주는 '파티 플래너'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나는 그 TV 속에 소개된 파티 플래너 '케빈 리'처럼 유명 셀렙들의 파티를 기획해 주는 흥미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그런 꿈을 도와주시기라도 하시듯 나의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넓은 세상과 더 많은 경험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런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글로벌 회사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가 영어로 서류를 작성하시던 모습이나 종종 외국인들과 화상 회의를 참여하셨던 모습들도 내겐 너무도 흔한 광경이었다. 어머니 또한 항공사 근무경력이 있으셔서 그런지 여행을 하실 때는 언제나 앞장서서 걸으셨다. 낯선 타국을 여행할 때는 현지인들과 소통은 도맡아 하시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시다가도 간단한 간식 주문 같은 것은 동생과 나한테 주문해 보라고 유도하셨었다. 우리에게 영어 회화를 하도록 시키셨고 덕분에 나는 "What would you like?", "Here or To go?", "Can I get a --?" 같은 일상의 영어 표현은 교과서 속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햄버거 샾에서 직접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어서 체득한 내 것이 되었다. 최대한 그 도시의 '로컬'을 경험하게 노력을 기울여 주신 것 또한 고마운 일이고, 영어라는 언어는 그저 하나의 툴이라는 인식을 갖게 해 주셨던 것도 고맙다. 왜냐면 싱가폴에 가면 싱글리쉬, 홍콩에 가면 홍글리쉬, 일본에서는 제팽글리쉬, 영국에서는 잉글리시로 바뀌는 경험 속에서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이나 전통 공예 소품을 건네며 small talk (가벼운 대화)을 시작하는 게 전혀 울렁거리지 않는 토종 한국인으로 자라나게 된 것도 나에겐 큰 자산이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들여다보니, 나는 단순히 영어 과목을 공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로 문화도 공부하고 현지의 생활도 배우고 싶었던 열망이 가득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날 그 교환학생 모집 광고를 보고 가슴이 떨렸겠는가 싶다.
어느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던 해외 학교 생활에 대한 꿈이 강해지는 계기는 또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장 친했던 같은 반 친구(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우정으로 15년 지기 절친인 나의 친구)가 부모님께서 미국 유학 중에 태어나게 되어서 미국 국적을 가진 친구였었는데, 나와 같이 다녔던 동네 앞의 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한국 공교육보다는 국제 학교로의 전학을 택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매일 어울려 놀지는 못했지만, 주말에 만나기만 하면 그 친구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곤 했다.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미국 뮤지컬 영화 '하이 스쿨 뮤지컬'의 OST를 따라 부르며 친구의 옷장에 가득했던 핼러윈 의상들.... 번쩍거리고 너풀거리는 샤베트 색 캉캉 드레스를 꺼내 입고 배우들의 대사를 외우고 표정연기까지 따라 하고 신나게 춤을 추며 할리우드 배우처럼 명연기를 펼쳐 보이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어와 친해졌었다. 때때로 그 친구가 국제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 나를 초대해서 어울려 놀게 했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나의 부러움은 하늘을 찔렀다. 국제학교 친구들끼리 영어로 재잘대며 대화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고 후루룩 말하는 연음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약속했다. 부러움으로 그치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친구들처럼 영어로 재잘대고 말 것이다라고~
내가 살던 동네는 사교육과 치열한 경쟁으로 유명한 곳이다.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던 그즈음의 나는, 학생들의 노력을 인정하기보다는 오직 성적! 점수로만 석차를 나누고 줄을 세우는 그래서 일정 % 내의 학생만이 살아남는 무한 경쟁의 교육제도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내가 악착같이 영어 문법과 단어들을 열심히 외운 건 언젠가 만날 외국인들과 하루빨리 유창하게 말하고 싶어서였고, 먼 훗날 언젠가 떠나게 될 유학 생활을 위해서였다. 하루는 쉬는 시간에도 열심히 공부 중인 친구에게 "오, 이 문제집 뭐야?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다~" 하며 관심을 보였더니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서점 가면 다 팔아."라고 정색하며 문제집을 닫고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친구는 없었고 그 자리엔 경쟁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 협력하며 학습이든 정서든 같이 성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살벌한 중학교 교실의 모습만이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중간, 기말고사 시험을 통틀어 한 문제만 오답이 나와도 3등급이 되어버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나는 환상을 꿈꿨었던 것 같다. 단지 좋아하는 영어 수업 비중이 높다는 이유로 외고에 지원하겠다고 하는 것은 큰 사치였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음악, 미술, 체육 어느 과목 하나도 뒤쳐짐이 없는 1등급 친구들에게나 지원서가 돌아가는 구조였다. 나의 꿈은 종이짝처럼 가벼워 높은 장벽을 날지 못하고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최상위권의 학생이 아니었던 나에게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외고 합격은 어려울 것 같으니 특목고보다는 자사고로 진학해 거기서 다시 상위권 도전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나는 외고에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었고 예상했던 대로 낙방하였지만 준비 과정 속에서 한 뼘 더 자라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추첨 배정으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엘 가게 되었다.
영어과목만은 자신 있었기에 게시판에 공고문대로 열려있는 모든 기회를 찾아 최선을 다해서 도전했었다. 각종 영어 말하기 대회, 영어 에세이 쓰기 대회, 팝송 부르기 대회, 모의 유엔 토론 등 좋아하는 영어 과목을 이용하는 모든 대회를 도전했었지만, 나는 최상위권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상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자신감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뚝 떨어졌다. 물론 공교육 선생님들의 변도 일리는 있다. 명문고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재학생들을 SKY 권 대학에 많이 합격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금이라도 합격 확률이 높은 최상위 성적의 학생들에게 상장을 밀어줘야만 하고 학생생활기록부에 수상 이력 기재를 많이 만들어 줘서 모든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라는 증거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 이미 수상할 수 있는 학생들은 문, 이과 합쳐 10명 내외의 학생들임을 감지한 나는 그저 내가 처한 현실이 영화 속 '설국열차'에서 춥고 배고픈 꼬리칸에서 아등바등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입학할 때의 성적으로 열차의 어느 칸에 들어가게 되는지가 결정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골고루 주며 참 교육을 실천하시는 선생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냥 그렇게 최상위권 친구들의 들러리로 '어중이 떠중이'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출발선이 달랐던 경쟁 상대들과 시간이 갈수록 더 불리한 게임 속으로 빠져 들어만 갔다. 무기력해졌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수상의 기쁨과 박수는 그 몇몇 학생에게 향해 있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루저 같은 나의 학교 생활은 당연히 흥미를 잃어갔고, 고구마 백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해 매일 울며 지낸 것 같다. 같이 밥 먹을 친구도 없을 정도로 주변엔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이 훨씬 많았었던 기억이다. 어느 날엔가 고1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중에 무엇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공 적합성을 어학으로 밀고 가자고 하시는 말씀에 "저는 성적만을 위해서 하는 쓸모없는 영어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답했더니 내게 돌아왔던 말은 어이없게도 "넌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니?"라는 외마디 였었다. 아! 나의 열정을 꺾어놓으시던 그 한 마디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최선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쳤고, 어머니의 권유로 자율형 사립학교로 전학을 결심했다. 결원이 생기는대로 성적표를 제출하고도 추첨까지 거치는 입시를 다시 한번 치르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는 자사고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이 첫 번째 고등학교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학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배우려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님들 사이에 스스럼없는 질문이 오갔다.
동아리 활동이든 교내 경진 대회든 학생의 열정을 캐취 하신 선생님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셨다. 시험을 위한 영어뿐만 아니라 유용한 영어 표현들을 배우기도 했다. 한국에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이 있다면 영어권에는 'Betty Bought A Bit of Better Butter'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영어 얘기만 나오면 내가 발표하게끔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 당시, 영국식 영어의 매력에 빠져있던 나는 영국식 발음으로 멋지게 발표했더니 반 전체가 환호성을 지르며 칭찬해 주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학교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너무도 소중했고, 충분한 지혜와 지식들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정 시간에는 털실로 모자를 떠서 아프리카의 난민 어린이들의 저체온증을 막기 위해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하였으며, 그토록 하고 싶었던 농구 대표팀도 해보고, 영어 수업에서는 반 친구들과 즉흥 영어 연극을 하기도 했으며, 국어 시간에는 모의고사를 위한 지문 읽기 대신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졌고, 음악시간에는 다양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흥미로운 음악사를 배우기도 했다. 학교 홍보 대사를 하며 안내 도우미로도 활동했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 학교의 입학 설명회에 참석하러 오신 예비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에게 이 학교의 재학생으로서 학교를 소개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한 순간도 있었다.
같은 반 친구 중에는 제주도가 고향이라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친구도 있었고, 지방 사투리를 맛깔나게 쓰며 우리들을 웃게 만들어준 친구 등 다양한 배경의 개성 있는 친구들이 진정한 고교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성적으로 입장을 통제하는 도서관이 아닌 진정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에겐 언제든 열려있는 학교 도서관과 자습실은 늘 학생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곳에는 경쟁으로 담을 쌓는 일은 없었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달다구리 초콜릿 우유로 당 충천하면서 공부하라고 서로를 북돋으며 함께 했던 17세 소녀들의 순수한 열정만이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 놓여 있었다.
새롭게 사귄 친구들에게서는 시기심과 질투보다는 협력과 배려가 있는 성숙된 친구들이었기에 나 또한 행복한 학교 생활을 보냈고, 친구들을 본받아 나 또한 나 자신의 학업에도 충실했지만 공부가 부족한 친구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야무짐도 발휘했다. 풀리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서로 돕던 친구들의 우정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보석처럼 남아 있다. 감사했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렇게 두 번째 고등학교에서의 행복감을 잠시 뒤로 한채 마주한 호주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기회는 내 마음을 움직였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해외에서의 학업과 생활의 기회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