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진짜 딱 3초만, 창피해도 용기를 내는 거야."
'영어 공부 시간'이라는 개념을 없앴다. 따로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영어라는 것 자체를 내 삶 속에 녹여내려고 했다.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영어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 치면서 파워 포인트 준비하고 아빠의 눈물까지 보고 왔는데 이제 와서 힘들다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영어로 해보자.'
수업시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는 것은 물론이고, 아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습관을 쌓기 시작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기다리고, 거리를 걷는 순간까지의 시간도 팟캐스트와 팝송으로 등하교 시간을 채웠다. 영어로 가득 채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처럼 영어가 쉽게 따라오지는 않았다. 일종의 배신감이랄까...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해야 하는 거냐고!!... 그나마 자신 있었던 수학 시험에서는 영어로 적힌 문제를 이해하고 식을 세워야 하는 서술형 문제에서만 점수가 팍팍 깎였고, 영어 시간 <동물 농장> 원서를 이해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데 원서 요약본을 정리해놓은 네이버 블로그 리뷰를 붙들고 있기 바빴다. 한국에서도 영어를 좋아했기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나였는데 실제로 해외에 거주하면서 ‘역시 언어 장벽은 절대 피해 갈 수 없구나’를 느끼며 와르르 무너졌던 좌절의 날들이었다. 내가 노력하는 많은 부분들이 높은 언어 장벽 때문에 가려져 보여줄 수 없는 게 억울해 울다 잠든 날도 허다했다. 결국, 대망신을 당했던 생물학 수업의 시험에서는 내 인생 최저 점수를 받고야 말았다. Biology: D. 저 원래 D 받고 그런 사람 아닌데요, 생물학 단어들이 적힌 포스트잇들 신발장에, 변기 앞에, 세면대 거울에 붙여 놓고 이 닦을 때도 달달 외우고, Khan Academy (수학, 예술, 컴퓨터 프로그래밍, 경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금융, 역사 등을 무료로 학습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동영상 강의 더 찾아 듣고, 염색체 나오는 꿈 꾼 적도 있는데요... 그런데 Fail 직전의 D라고요?
그 당시 17살의 나는 그런 ‘위기’가 찾아왔을 때, 오기가 생겨서 더 나댔다. 영어를 못하니까 자신이 없어 아무 말 못 하고 움츠러드는 내 모습은 상상하기 싫었다. 영어를 못하니까 더 나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학교에서 가입할 수 있는 동아리와 소모임 활동, 이벤트들은 다 참여하고 가입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매 학기마다 팀원을 모집한다는 학교 뉴스 레터 메일이었다. 언어로 크게 소통할 일이 비교적 적은 스포츠 활동도 4학기 내내 열심히 불사 질렀다. 테니스, 축구, 농구, 네트볼, 배드민턴 등 잘하지 못해도 해볼 만하면 일단 가입해봤다.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면 친구들과 얘기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 팀을 나눌 때 내가 선택받아 두 팀 모두 데려오려고 할 때나 득점을 해 하이파이브를 할 때면 소속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괜히 더 좋았다. 외부 학교에 가서 경기를 뛸 때면 학교를 대표하는 자부심이 모두 가득 찬 상태라 팀워크는 최상으로 치솟으면서 서로 더욱 가열하게 응원해주며 다른 학교 팀의 내 포지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는 어떻게 경기를 하는지 비교 피드백을 공유해주기도 했다. 오랫동안 한 학교를 다니며 어릴 때부터 끈끈한 사이를 유지한 호주 친구들 사이에 뚝 떨어진 교환학생은 그렇게 점차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교내, 연합 동아리 할 것 없이 영어를 더 활용할 수 있을만한 동아리란 동아리를 계속해서 찾기 시작했다. 먼저 생각난 건 토론 클럽이다. '내가...?' 원어민 친구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토론 클럽 가입 신청서에 밑도 끝도 없이 내 이름을 쓱 적어냈다. '아, 몰라!'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실력에 상관없이 들어가게 해 달라는 무언의 근자감으로 토론 클럽에 구태여 입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얘 뭐지?" 하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말발 좀 세고 똑 부러지는 딕션으로 논리적인 언변을 보이는 학생들은 다 모였다. 안경을 머리에 걸치고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쓰며 부드러운 톤이었지만 야무진 표정과 눈빛으로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첫 토론 클럽 미팅에서는 못 미더웠는지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 이렇게 웃고 있는 내가 못 미더웠을 것이다) 다짜고짜 토론할 대본을 미리 준비해오는 게 좋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팀에 피해를 덜 끼치는 쪽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당분간 나의 등하굣길은 발걸음 한 번을 더 가볍고 신나게 해 줄 팝송들과 폰 대신에 친구들의 목소리로 녹음이 된 대본과 큐카드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다음 미팅에서 내 발표를 할 때쯤에는 굳이 큐카드 대본을 매번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자연스웠다(고 생각했다). 나의 토론 실력을 처음으로 보여준 모의 토론이 끝난 후의 분위기는 처음과 같았다. "얘 뭐지?" 팀원들은 예상치 못했다는 놀란 표정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뭐야, 재키. 너 너무 잘하는데?" 그 누구도 못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난 이런 순간을 원했다. 편견을 박살 낸 순간. 아오 짜릿해.
영어를 잘하는 척이라도 하려면 기본은 해야 했다. 친구들의 칭찬에 탄력을 받고는 '나 못하진 않아. 더 잘할 수도 있을걸?' 하면서 더 열심히 나댔다. 토론을 끝장나게 하는 고등학생들의 결승전 영상들을 찾아보며 톤, 제스처, 표현 등을 마구 마구 익혔다. 어떻게 보면,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어디서나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기에 그런 에너지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 심리가 그렇지 않나.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더 인정받고 싶어 더 잘하고 싶은 마음. 교내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 결국, 일을 냈다. 학교 대표 팀으로 토론 대회를 출전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척을 해왔을지언정 이제는 척하면 척을 알아챌 사람들과 맞짱을 뜨러(?) 간다. 이를 악물고 밤낮으로 준비했다. 원어민 친구들보다 5배, 10배씩 더 준비해야 했다. 친구들에게 계속 피드백받기는 물론, 방과 후 집 마당에 누워있던 고양이를 앞에 가서 앙칼진 상대방 팀원이라고 생각하고 열성적으로 연습하기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호스트 패밀리 앞에서 연습하며 피드백도 받았다. 대가족인 호스트 패밀리 5명 + 1명의 다른 교환학생 언니 앞에서 하는데도 떨렸다.
연합 토론 대회 당일, 나는 하루 종일 토론 대회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속은 모르지만 매우 편안해 보였던 영어가 모국어인 같은 친구들을 보면 또 한없이 작아졌다. '내 모국어가 영어였다면...', '실전에서 다 망치면 학교 대망신인데 어떡하지.' 저녁을 먹고 지정된 다른 학교에서 다시 팀원들을 만났다. 우리 학교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으리으리했던 건물이었다. 면접을 보러 가는 느낌이었다. 제시된 주제에 대해서 준비한 우리 팀의 논점을 강타할 어떤 공격이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히지 않는 게임이었다. 잔뜩 긴장해 하얗게 질려있는 나를 보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신 호스트 아빠는 끊임없이 재키는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셨다. 생각해보면, 친딸도 아닌데 먼 학교까지 데려다주시고 대회를 끝까지 관전해주시는 앤드류에게 참 감사했다. 대회 첫 발표 타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Strathcona 팀 첫 발표자는 일어나 주세요." 의자를 빼고 일어났더니 뒤에 앉아계신 호스트 아빠가 보였다. '할 수 있어!' 하는 눈빛을 보내오셨다. 나는 미소가 지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대회는 시작되었다.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 We, the affirmative team believe that this statement is true (저희 찬성팀은 이 주제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숨 막히는 논쟁이 오갔다. 내가 앉고 바로 이어서 상대 팀도 뒤질세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박을 해왔다. 상대 팀 마지막 스피커의 발표가 끝나면서 대회는 끝났다. 심판들끼리 몇 분 정도 시간을 가지더니 우리 팀이 연합 토론 대회 우승을 했다고 발표했다. "왁!!!"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활짝 웃고 있는 앤드류가 두 팔 벌려 만세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기뻐하며 온 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로 상대팀과 악수를 했다. 팀 전체뿐만 아니라 토론 스피커 개개인 점수 또한 매겨진 노란색 차트 표도 공개되었다. 모든 팀원들과 동일한 점수가 매겨졌다. 지난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란 하루들이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했던 값진 시간이었단 걸 깨닫는 순간이다.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그 학교는 더 이상 으리으리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떨고 긴장했는지 앤드류에게 얘기하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실실 웃다가 정말 뿌듯한 나머지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제야 감격의 울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신감을 얻었다.
'해볼 만하네. 나도 할 수 있네'
운동하면서 친구들과 하이파이브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고등학생 토론 대회 우승한 게 그리 대단한 건 아닐지 몰라도 언어 장벽에 수없이 부딪힌 나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볼 수 있는 짜릿한 순간들이었다. 지금도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걸 어떻게 기회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그저 털썩 주저앉아버리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스릴 있는 어드벤처를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