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초 Oct 15. 2021

찰리와 초콜릿 공장

교복 입고 등교하는 마지막 날

호주 학교에서는 Muck Up Day라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수능 시험 전에 등교하는 마지막 날처럼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호주 학교의 연례행사다. 졸업 학년인 12학년 학생들은 그 해의 키워드를 정하고 테마 주제에 맞춰 학교 전체를 꾸미고 교복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리폼해 입고 등교를 한다. 작년의 테마는 인어공주 Under the Sea, 재작년은 Alice in Wonderland 였다고 한다. 전작들만 들어도 올해의 테마는 또 얼마나 상상력 넘칠 주제일지 기대가 되었다. 당일 아침 등교하기 전까지는 졸업반 외의 다른 학년들은 어떤 테마의 축제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내 머리 위로 쉐이빙 크림이 뿌려지더니 금가루 콘페티와 사탕들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교 전체가 페스티벌 같았다. 초콜릿 분수를 중심으로 온 사방에 사탕이 뿌려져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보라색 모자를 쓰고 있는 학생 회장 언니, Nerds 사탕 (한국의 짝꿍 캔디)으로 분장한 언니들이 보였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영화의 윌리 웡카 테마였다!  힙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패션쇼의 S/S 컬렉션 같은 멋지고 창의적인 교복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게 변신해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교복은  화려한 뮤지컬 의상으로 감쪽같이 리폼되어 있었다. 언니들의 리폼 실력에 또 한 번 놀라고 신나는 노래에 심취해 아침부터 몸을 마구 흔드는 졸업반 언니들의 대단한 모닝 텐션에 또 한 번 놀랐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까지 떠있었다. 우리 학교 주변 동네의 여러 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이 극도로 흥분해 너무 심한 장난으로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관리 차원으로 헬리콥터를 띄웠다고도 한다. 인생의 마지막처럼 오늘을 불사 지르는 언니들은 Muck Up Day에 진심이었다. 그들의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그들은 학교를 작은 원더랜드로 변신시켰다.  


친구들과 한창 초콜릿과 사탕을 집어먹고 있는데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쳤다.

 "Go to class! (수업이나 들으러 가!)" 

나머지 학년 학생들에게 재촉하는 12학년 언니들이다. 수업을 들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언니들의 얄미운 목소리에 밀려 밍기적대며 교실로 향했다. 초콜릿 분수 옆 갓 구운 브라우니를 하나 더 챙겼다. 교실에 들어와서는 'I luv  year 12 (난 고3 언니들을 무지 사랑함)'이라고 적혀 있는 스티커를 서로의 등과 어깨에서 떼어주기 바빴다.


나에겐 정말 신선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Muck Up Day를 하자는 건의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수능이 끝나고 그동안 풀었던 문제집과 교과서를 찢어 버리면서 해방감과 자유를 축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렇게 크리에이티브하게 '우리만의 마지막 날'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벌써 하고 싶은 Muck Up Day 테마도 생각해내며 하루빨리 내가 졸업반이 되어 Muck Up Day를 기획하고 싶은 설레는 마음이 솟구쳤다.


Muck Up Day에 12학년 언니들이 하는 일은 윌리 웡카 원더 랜드만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렸던 점심 조회시간은 언니들의 차지였다. 교장 선생님 대신 학생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했던 조회 시간은 아직도 내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대신 졸업반 언니들이 단상에 서 마이크를 휘어잡아 가장 기억에 남는 학교에서의 추억들이 전교생이 모인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마지막 조회시간만큼은 그게 가능했다. 짜릿한 맛이 있었다. 언니들이 엄청난 혁명을 일으킨 것 만 같아 괜히 멋지기도 하고 그 조회시간이 또 다른 축제가 되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보낸 지난 8학년부터 12학년의 추억을 담은 파워포인트 발표와 선생님들이 12학년 학생 이름을 알아맞히는 퀴즈 타임까지 준비해온 언니들 덕분에 모두가 깔깔 웃기도 했다. 같이 지내온 친구들은 아니지만 그 짧은 조회 시간 동안 많은 추억들이 공유되면서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를 떠나보내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오랫동안 정을 나눈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자작 랩에 담아 멋지게 래퍼로 변신해 퍼포먼스를 선보인 언니도 있었고,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에 가사만 바꿔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 공연을 한 언니들도 있었다. Muck Up Day는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졸업반 언니들은 오늘이 끝나면 마지막 호주 수능 시험과 졸업만을 앞두고 있다. 그것마저 모두 끝나면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어떤 기분일까. 많은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나도 곧 2년 뒤면 겪을 일이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교복이 없다. 한 해를 같이할 각자의 반이나 피구 게임을 할 체육 시간도 말이다. 혼자 설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전 07화 배움의 희열을 느끼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