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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Oct 23. 2021

단짝 친구와 함께
살아본다는 것에 대하여

나의 두 번째 호스트 패밀리

돈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의 방문까지 허락하는 이 자비로운 세상에서의 ‘금지된 여행’이 기대된다.

어떤 집을 방문해서 어떤 집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어떤 관계로 이어질지에 대한 기대 말이다.

어딘가 멀리 나가지 않아도 나는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이 마음 잘 맞는 친구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친구들과 같이 살아보는 것에 대한 로망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같이 살게 될 집 거실에는 어떤 소파를 어떻게 배치하고 방은 침대방과 공부방으로 나눌 건지 아니면 각자의 방으로 나누어 쓸 건지에 대한 자세한 일들을 종종 내 머릿속에서 마구 생각해보았다.


실크 같은 멋스러운 흰머리와 달리 펑퍼짐한 스웻 팬츠를 입고 계시는 틸다의 엄마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셨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보이는 복층 거실과 민트색이 잘 어우러진 미드 센트리 스타일의 부엌은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안방과 2층 내 사무실 빼고 모두 너 맘대로 사용해도 돼. 

아침에는 이 큰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여기 식기세척기, 믹서기, 접시들은 여기 선반에 다 있고......"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털털하게 집을 소개해주시는 틸다의 엄마에게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보스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다이닝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와 영수증은 틸다 엄마가 얼마나 바쁘게 그리고 단단하게 사시고 계시는지 말해 주었다. "너 방은 여기. 틸다 오빠 퍼걸의 방을 쓰게 될 거야." 한 명이 쓰기에 충분히 넓은 침대방이었다. 이번엔 나만의 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좋았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퍼걸의 취향이 그의 LP들과 우드 침대 프레임에서 느껴졌다. 첫 호스트 패밀리 집에서 짐을 푼 이후로 나의 이민 가방 2개는 다시 빵빵해져 있다. 난 오늘부터 나의 호주 베프와 함께 산다. 



퍼걸의 방 = 내 방


틸다와 모의 유엔 클럽에서 만나 부쩍 친해진 뒤로 틸다는 나에게 원하면 호주에 있는 동안 같이 살아도 된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친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개개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사적인 공간을 먼저 오픈해주는 틸다와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게스트가 되고 싶었다. 타인의 집을 탐방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는 일이었다. 집주인의 가치관 안으로 들어가며 나의 취향을 공유하고 그들의 취향을 읽는 일이었다. 허락하는 한 지속적으로 타인의 집을 탐방하고 더 알아가고 싶었다. 친구의 집이라는 또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에 스며드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었다. 나의 세계의 폭과 깊이가 확장되기도 했다.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 일상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발생하는 시너지와 새로운 영감은 내 새로운 일상의 기분 좋은 스파크를 내주었다.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과 재미, 두려움과 설렘이 나를 채웠다.


3명의 어린 동생들과 함께 했던 시끌벅적 마야네 집을 떠나 틸다네 집으로 이사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동생들이 독차지였던 TV에서는 디즈니 채널의 애니메이션 대신 틸다가 추천하는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비롯한 하이틴 영화들이 틀어졌다. 틸다가 좋아했던 <더 브랙퍼스트 클럽>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 등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 호주의 틴에이저 사이에서 무척 유행했던 드라마 <Puberty Blues>에서 깜빡이 없이 공개되는 19금 장면들을 보게 되면서 틸다는 내가 꽤 개방적인 장면들에 충격받은 모습을 보고 깔깔 웃기도 했다. 호주 틴에이저 문화가 오고 갔다면 나도 틸다에게 한국에서 히트를 쳤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케이팝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나는 틸다와 지내면서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도 하고 틸다의 취향을 알아가면서 서로의 세계를 넓혀갔다.


틸다는 엄마 집과 아빠 집을 일주일씩 번갈아 지냈다. 엄마네 집에 짐을 풀고 오늘부터 옮길 아빠네 집에서 지낼 짐들을 꾸려야 했다. 곰돌이 푸처럼 푸근한 미소를 가진 틸다 아빠, 핀바의 집은

핀바의 집

 냄새가 좋았다. 벽난로가 있는 거실과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부엌, 널찍한 파티오가 보였다. 독립한 퍼걸의 방은 여기서도 내 차지였다. 노을이 지는 창문을 갖고 있는 엄마 집의 퍼걸의 방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여전히, 그는 우드 침대 프레임을 고수하고 있었다. 틸다네 집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은 블러드 오렌지 요거트였다. 틸다도 나와 같은 요거트 킬러였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아빠를 따라 시티 뷰가 보이는 헬스장을 다녔다. 운동이라고는 동네 헬스장을 몇 주 갔던 게 전부였는데 이 짐(gym)에서는 Body Balance, Groove Dance, Body Pump 등 의 댄스 수업과 요가 클래스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었다. 틸다는 학교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고 "진짜로? (Seriously?)" 하는 표정과 함께 잠깐 기다리라면서 검은 운동 레깅스를 던져주었다. 꽉 끼이는 그 운동 레깅스는 하의를 아무것도 안 입은 듯한 기분을 들게 했지만 몸매가 잘 드러나는 이런 레깅스를 입고 운동을 해야 더 동기부여가 된다며 서둘러 헬스장으로 향하는 틸다를 따라나섰다. 짐에는 레깅스를 입은 몸매가 완벽한 언니들이 가득했다. 언니들 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상관없이 레깅스를 입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틸다의 가족은 무얼 하든 운동으로 아침을 여는 가족이었다. 틸다와 나는 운동을 하며 운동이 끝난 뒤에는 뭘 먹을지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먹기 위해 운동을 한달까. 틸다와 나는 "나 운동 끝나면 진짜로 스파게티 먹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느리게 가는 플랭크 1분을 버텨냈다. 그러면서도, 스파게티 대신 헬스장 근처의 유기농 주스와 아보카도 샌드위치가 맛있는 푸릇푸릇한 인테리어의 카페를 즐겨찾기도 했다. 요리를 잘하시는 틸다 아빠 덕분에 새로운 음식을 많이 먹어보았다. 지금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그때 처음 먹어본 음식들이다. 새로운 음식의 처음을 기억하는 건 꽤나 진지하게 대하는 일이어야 했다. 어떤 음식이 나와 잘 맞아 얼마나 오래 함께할지 누구도 모르니까. 프랑스 요리인 키시(Quiche)와 아일랜드식 단호박 죽, 그리고 연어 치즈 빵 등 소소하지만 매일 한 끼 한 끼가 기다려졌던 날들이었다. 아이리시 스타일의 삼시세끼랄까. 나영석 PD 님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셨다면 먹음직스러운 음식 인서트 클립을 많이 얻으실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얘들아! 밥 다 되었으니 나오렴!" 하는 핀바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아일랜드 음식으로 식탁을 꽉 채워주시는 핀바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하루는 내가 한국 음식을 요리해드리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과 짜파게티, 그리고 장조림이었는데 우리 사이에서는 나름의 '요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디저트로 드렸던 과자 빠다코코넛을 좋아하셨다.

아빠의 집에서 퍼걸의 방.
핀바 아빠와 틸다

토요일에는 매주 갔던 넷볼 세션 대신 틸다가 다니는 중국어 학교를 함께 따라갔다. 주말 중국어 학교에는 모의 유엔 클럽의 라파엘라와 헤일리도 있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제2 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던 나는 호주에서 틸다와 함께 중국어를 배우고 있을지 상상도 못 했다.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친구인 만큼 자신의 관심 분야에 주말 시간을 투자해 열정을 쏟는 틸다가 멋졌다.

중국어 학교가 끝난 저녁에는 틸다 오빠 퍼걸의 21살 생일 파티를 갔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방을 쓰고 있는 나는 항상 퍼 걸이 궁금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의 이름 '퍼걸'이 매우 아일랜드 식의 이름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처음 볼 생각에 엄청 떨려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보다 3살이나 어린 친구의 파티였는데 그 당시 16살이었던 우리는 황송하게도 맥주를 마시는 어른들의 파티에 초대된 거라며 한껏 꾸미고 멋지게 차려입고 퍼 걸이 친구들과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퍼걸은 맥주 한 병을 들고 여유 있는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 네가 제키구나! 반가워." 하며 악수를 건네는 젠틀맨이었다. 틸다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스웩 넘치는 브로 인사를 나누고는, "원하면 저기 얼음 양동이에 맥주 한 병씩 하고."라고 하곤 유유히 사라지는 퍼걸은 자유로운 영혼의 츤데레 같았다. 틸다는 "오빠가 마시라고 했으니까 마시는 거지." 하며 씩 웃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이끌고 얼음 양동이 앞으로 갔다. 우리는 오빠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며 맥주병 하나씩을 들고 마당에 피워져 있는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16살의 우리가 기억하는 퍼걸의 파티는 거기까지이다. 


어린 동생들과 놀아주며 시간을 보냈던 이전 주말과 달리, 틸다와 함께 보내는 주말은 새로운 바다로 가득 찼다. 친구들과 폰다 Fonda라는 멕시칸 요리 맛집에서 음식을 테이크 아웃해 트램을

 타고 브라이튼 비치를 갔다 오기도 하고,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핀바는 틸다와 나를 데리고 더 먼바다로 드라이브를 데리고 가셨다. 핀바와 틸다는 친한 친구였다. 아직 운전면허를 딸 나이도 되지 않았던 틸다는 아빠와 드라이브를 하도 많이 가서 운전 실력이 좋았다. 핀바가 틸다에게 종종 운전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걷기도 하고 해변가에 줄지어 있는 빈티지 샵을 둘러보기도 했다. 멜버른의 바다는 멕시칸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들었는지 우리의 점심 메뉴는 나쵸가 되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초코 셰이크에 빨대를 꽂았는데 핀바는 나를 평생 호스트 하고 싶다고 말씀해주셨다. 바라보고 있던 바다에 돌고래를 발견한 것 마냥 눈이 휘둥그레지며 "정말요? 오예!!!"라고 외쳤다. 기분이 묘했다. 틸다와 이렇게 평생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날아갈 듯이 행복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틸다와 그의 가족과 보내는 시간들이 더 소중해졌다.

핀바가 찍은 틸다와 나.

틸다네 가족은 그들이 초대된 파티에 나를 데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핀바는 그의 친구들에게 나를 "숨겨진 둘째 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하루는 핀바의 친구들 파티에 함께했다. 호주의 50, 60대 아저씨 아줌마들의 생일파티는 어떨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허락되어질 파티가 될 것 같았다. 하우스 파티라고 해서 여느 평범한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한참을 달려 단데농의 한 와인 농장이 딸린 캐빈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성공을 수확하는 시기의 50대, 60대 어른들의 파티는 장소부터가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이었다. 보기만 해도 달콤해지는 와인 밸리 풍경을 가진 이 집의 호스트는 만나 뵙지 않아도 분명 멋질 것 같았다. 여유로운 풍경을 안주 삼아 어른들은 와인잔을 한 손에 쥐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시작한다. 틸다와 나는 핀바의 친구들에게 소개되어 인사를 드리고는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몰래 빠져나와 얼음 양동이를 찾았다. 마구 널브러져 있는 맥주 박스들 중에 한 병 정도는 둘이 나눠 마셔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베이비 슈와 마카롱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비싼 디저트들을 접시에 한가득 담아 집 뒤편 자쿠지 옆에 우리만의 아지트를 정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부글부글 거품을 내고 있던 자쿠지에 발을 담그고 '노천탕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러다가, 핀바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 앞마당으로 불려 가 어른들의 스포츠, 크로켓 몇 판을 같이 하기도 했다.

17살의 맥주 찾기 도전
6년이 지난 지금 와인을 좋아하는 나는 이 와이너리 풍경만 봐도 와인이 댕긴다.


틸다와 함께하는 시험기간은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틸다 아빠의 집 테라스에서, 엄마의 집 부엌 테이블에서, 그리고 공원 잔디밭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하루는, 시험공부하다 말고 펜을 세게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더니, "안 되겠다, 제키. 우리 나가자." 하더니 틸다는 겉옷을 챙겨 내 등을 떠밀었다. "갑자기 어딜 가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는 얼떨결에 밖에 나와있다. 틸다는 아무 말도 없이 노래를 틀었다. 춤추기 딱 좋은 비트의 노래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다가도 금방 쿰척쿰척 몸을 흔들게 만들었다. "야,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야 ㅋㅋㅋ" 나는 잠옷 차림으로 집 앞에서 춤추고 있는 우리가 너무 웃겼다. "시험공부 너무 스트레스받아. 너랑 춤 좀 춰야겠어." 이제 알아차렸다. 얼마나 스트레스받았으면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왔을까. 이 상황이 계속 웃기면서도 틸다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주고 싶었다. "틸다, 음악 더 크게 틀어봐. 그리고 달려~~~" 그렇게 우리는 집 앞 도로를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찰 정도로 춤도 췄다. 그리고, 계속되는 틸다의 완벽한 선곡에 맞춰 달렸던 길을 다시 걸어왔다. 틸다는 나와 걸어 다니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와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틸다의 그 말은 나에게 의미가 컸다.


틸다와 함께한 기억 중에 가장 선명한 기억이 있다. 2015년 9월 21일 자 그날의 일기에는 단지, 


I've never ridden a bike in the rain but  following tilda on the bike in the rain along the Yarra river made me smile (비가 올 때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는데 비가 오는 날 틸다와 야라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라고만 적혀있지만 그때의 냄새, 공기, 소리 모든 게 아직도 선명하다.

평소와 같이 아침 요가 수업을 듣고, 틸다와 함께 자전거를 타러 나간 오후였다. 틸다가 길을 이끄는 대로 페달을 밟으며 봄바람 부는 야라강을 한껏 느꼈다. 엉치뼈가 뻐근해질 즈음, 신나게 달리고 있는 자전거 손잡이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순식간에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너무 커져 조금 떨어져 있는 틸다에게도 크게 소리치며 말해야 했다. 비 맞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근처에서 잠시 비를 피하자고 말했다. 틸다는, "You know what? Let's just go! 그냥 비 맞고 가자!"라고 한다. 나는 "What?"이라고 말하고는 우리가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 깨달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면 30-40분은 걸렸다. 계속 떨어지는 비를 손으로 막고 있던 틸다는 "그냥 맞고 가보자. 재밌을 거야!" 하며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못마땅한 틸다의 제안에 나는 어쩔 줄 몰랐지만 정말 멀리 와버렸다.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몰랐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갈 때 즈음에는 어둑어둑해질 것 같았다. "으응, 알았어." 비 속의 달리는 자전거에서는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등을 낮게 웅크리고 실눈을 뜬 채 페달을 있는 힘껏 굴려댔다. 운동화가 축축해지고 입고 있던 레깅스가 다리를 더 조여왔다. 비가 조금 약해졌을 때, 꽤 경사 있는 내리막길을 만났다. 이 내리막길 경사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저승길로 직행할 것 같았다. 자전거를 세우고 다른 길을 찾고 있는데 틸다는 날 한 번 보고 씩 웃더니 그 내리막길을 직행했다. '!!!!!!!!!' 아니, 여길 어떻게 내려가란 말이야! 롤러코스터 맨 앞자리에 탄 기분이었다. 틸다의 자전거는 이미 저만치 굴러가고 있다. 또 용기를 내야 했다. 자전거 운전대를 꽉 부여잡고 이를 악물고 내려갔다. 비를 맞으면서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혼자 타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운전을 해야 되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을 수도 없었다. 다리로 자전거를 세게 밀고 다시 다리를 페달에 붙였다. 그리고, 무서웠던 만큼 눈을 더 치켜뜨고는 멀리 봤다. 그 높은 언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롤러코스터'는 내가 페달을 한참 굴리지 않고도 오래갔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때 처음 빗속에서 희열을 느꼈다. 해보지 않았던 일 앞에서 하고 나면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두려웠다. 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되더라도 그냥 빗속에 나를 맡겨보니 이제는 빗속에서 무얼 하든 싫지 않게 되었다. 빗속에서 나는 아늑해졌다. 그런 내가 신기해서 나 혼자 어이없이 웃으며 앞서 기다리고 있던 틸다 옆으로 자전거를 멈췄다. "어때? 재밌지?" 틸다는 내게 이 기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던 틸다가 그다지 이해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를 보고 비를 맞으러 함께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비는 우리가 집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주차할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샤워를 하려는데 틸다는 "제키야, 우리 트램펄린 타자."라고 한다. '뭐라고??? 장난해?? 홀딱 젖은 생쥐꼴인데 안 씻고?'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비가 좋아진 나였다. 빗속의 트램펄린이라니. 이미 젖은 김에 해보지 뭐. 빗속에서 트램펄린을 타는 건 비 오는 날 바이킹 맨 뒷자리에 타있는 듯한, 장기들이 모두 없어진 것 같은 붕 뜬 느낌을 주었다. 넓은 트램펄린에서 틸다와 점프를 하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슬로 모션으로 회상된다. 정신없이 트램펄린을 타다가 우리는 트램펄린에 대자로 쓰러져 누웠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떨어지는 비를 받아냈다. 자유로워졌다. 이 날을 기록한 사진이나 영상은 아무것도 없다. 비가 심하게 와서 폰을 꺼내지도 못할뿐더러 길을 잃지 않으려고 비 속의 틸다를 찾아 따라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비가 뭐라고. 누군가 나에게 그 작은 순간에 자유라는 의미부여를 굳이 하냐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비 오는 날만 기다렸다가 우리가 했던 대로 해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비 오는 날 트램펄린.

 

나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고 서로의 영감을 공유하며 나의 일상을 함께 해줬던 한 명의 친구 덕분에 나는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동경의 마음으로만 바라봤던 하이틴 영화 속 두 베스트 프렌드, 외국 틴에이저가 유튜브 브이로그에서 소개하는 친구와의 일상은 어느새 내 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가득할 공간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여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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