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차, 칼사다 - 토산토스 26.8km
8월 11일 (2) 편
토산토스의 기부제 알베르게, San Francisco de Asís Albergue이다.
200여 년은 족히 넘은 낡은 시골 건물인데, 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살려 그대로 기둥, 대들보, 서까래로 사용했다. 계단과 나무 바닥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침대가 아니고 찜질방에서나 볼법한 매트리스를 깔고 잔다. 기상시간은 6시이며 그전에는 일어나면 안 된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은퇴 신부이자 오스피탈레로 호세 루이스의 지론이 “순례자는 잘 쉬어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낡은 건물인 만큼 시설이 깔끔하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와이파이도 없다. 현대 문명과 잠시 멀어져 순례자들끼리 영적 교류 및 유대감을 나누는 컨셉이다.
기부제 알베르게의 숙박과 식사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순례자가 원하는 만큼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료일순 없다. 또 무료여서도 안된다. 손님을 맞이하고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출은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른 숙소에 묵었다면 썼을 비용만큼은 기부하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숙소 안내를 듣고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 다른 순례자들을 만나러 갔다. 과연 어떤 분들이 이런 곳을 찾는 것일까? 신비주의자? 원리주의자? 이런 분들은 지팡이조차 산신령이 쓸법한, 뭔가 주렁주렁 붙어 있는 것을 들고 다닐 것만 같다. 무교자인 나에겐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어디선가 악기 연주 소리가 들렸다. 마당 쉼터에 나가보니 누군가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에서 ‘띵’ 하고 벨이 울렸다. 사실 강선생님과 헤어진 며칠 사이, 악기를 하나 가지고 다니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우쿨렐레를 구입할 예정이었다. 이게 바로 칼 융이 말한 동시성 현상인가? 물론 동시성 현상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까미노를 시작하고 매일 뭔가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이것조차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동시성 현상(synchronicity)
칼 융은 두 사건이 독립적이거나 비인과적이지만 의미 있는 우연이 일어났을 때, 두 사건에 보이지 않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칼 융의 일화 하나.
융이 어떤 여성 의뢰자와 상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말하길 꿈에서 예쁜 풍뎅이 모양의 브로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그때 융이 바라보던 창문 밖으로 예쁘게 생긴 풍뎅이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융은 그녀에게 브로치가 이렇게 생겼었는지 보라고 하였는데, 그녀는 똑같이 생겼다며 놀라워하였다. 융은 이를 두고 꿈이 현실에 영향을 미쳤거나 두 사건을 연결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고리가 있지 않을까 여겼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같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심심찮게 일어나는 모양이기도 하다. 누군가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그 사람의 문자나 전화가 온다던가 하는 일을 겪어보지 않았던가.
나는 그동안 종교나 신비주의를 비이성, 비인과적인 일로 혹은 미신으로 치부해 왔다. 그런데 까미노를 걷는 요즘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 정도의 중립쯤으로 약간은 생각을 바꾸었다.
굳이 우쿨렐레 건을 인과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우쿨렐레는 스페인에서 널리 사랑받는 악기이니, 몇 명쯤 가지고 다닌다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과 조우하다 보니 그중에 한 명과 마주친 것이다. 확률이 낮아도 시행수가 자꾸 늘어나니 자꾸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 게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까미노 기적의 정체일 것이다. 집 밖으로 나와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 기적처럼 보이는 일어난다
사실 처음 일기 연재를 시작했을 때는, 매일 같은 일과라 글이 금방 단조로워질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 여기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어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들의 사생활이 걸려 있어 지면으로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흥미진진하다. 조작이나 과장이 아닌가, 어떻게 매일 사건이 일어나느냐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전부 사실임을 맹세한다.
커뮤니티 디너 - 공동체 식사는 준비, 식사, 설거지, 뒷정리까지 모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식사 준비를 다 같이 한다는데 순례자 수가 많지 않아서 양이 평소보다 적은 모양이다. 별 도와달라는 말 없이 오스피탈레로들이 척척 하고 있었다. 빵과 야채를 써는 간단한 일을 도왔다. 커다란 빠에야를 만들어 먹을 모양이었다. 호세가 빠에야 가운데 파프리카로 화살표를 만들어 두었다.
화살표는 순례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생판 처음 가는 길을 누군가 그려놓은 화살표만 믿고 걷기 때문이다. 화살표는 곧 신뢰의 상징이다. 그리고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약속의 증표다.
단순한 샐러드와 빵, 빠에야가 각자의 접시에 돌아갔다. 음식이 풍족하거나 맛이 훌륭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온갖 따뜻함이 버무려져 있었다. 하루의 고생을 마치고 먹을 음식이 있었으며, 함께 걷는 동료들이 옆에 앉아 있었고, 인정 넘치게 맞아주는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라뇽이라든지 토산토스라든지 지역마다 유명한 기부제 알베르게가 있으니 한 번쯤 참여해 보시길 바란다.
식사를 마치면 저녁 기도 시간으로 이어진다. 맨 꼭대기 층의 기도실로 올라가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 참여하게 된다. 오늘 여기 모인 순례자들의 국적에 따라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한국어로 진행될 예정이다. 나도 한국어로 성경 한 구절을 읽는 파트를 맡았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3:1-6 (개역한글)
성가도 배워 다 함께 부르고, 각국의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기도문을 언어별로 읽고 함께 기도해 준다.
한국 분이 남기고 간 기도문 하나를 크게 읽었다. 순례자가 기도문을 남기고 가면 20일간 함께 읽고 기도하며, 20일을 넘기면 산티아고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다시 1년간 보관할 박스로 옮긴다고 한다. 그리고 1년간 보관한 기도는 마지막으로 교회로 가져가 불에 태우는데, 그게 바로 내일이라고 했다. 멀리 보이는 절벽 중턱에 굴이 있고 거기 교회가 있다 하였다. 절벽의 동굴은 아마도 이슬람과의 전쟁, 즉 레콩키스타 시절의 흔적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기도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식당으로 내려가 뒷정리를 마저 하며 기타 연주와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나도 아리랑과 만남을 열창하고, 우쿨렐레를 빌려 몇 곡을 함께 불렀다. 한국인이 오면 호세는 아리랑을 으레 부르는듯하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이제 노래자랑과 담소도 끝이 나고 잘 시간이 왔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탈리아 부자의 코골이가 어찌나 큰지 다른 층에서 자던 오스피탈레로들까지 올라오는 코골이 대소동이 벌어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들이 아버지가 너무 코를 곤다며 미리 미안해했었는데, 알고 보니 부자가 똑같이 코를 골아 쌍고동이 울렸다. 결국 둘만 남기고 모두 다른 방으로 이동해서 잤는데 그 소동이 벌어져도 둘은 끝까지 깨지 않고 잘만 잤다. 코 고는 사람들은 자기들 소리를 못 듣는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처음에 제일 먼저 불평하던 독일 아가씨도 코를 고는 것이었다. 방을 옮겼는데 거기서도 코를 고는 사람이 있으니 참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참 괴로워했었다.
5:50 ~ 2:40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토산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