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차, 사아군 - 렐리에고스 30.7km
8월 18일
새벽 내내 끙끙대다가 진통제를 한 알 먹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도 몸이 가벼웠다. 어제 많이 걸어서 근육통이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까지 천천히 해 먹고 그제야 발걸음을 떼었다. 그래봐야 7시 반이지만 평소보다 푹 쉰 느낌이 들었다.
사아군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젠 너무 힘들어서 구경할 의욕이 나지 않았었다. 오늘에서야 겨우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나서, 잠시 들르는 패키지 관광객 마냥 슬그머니 사아군을 벗어났다.
다리를 건너 다시 들판으로 향했다.
조금 가다 보니 눈에 익은 천 조각이 말뚝에 걸려있었다. 온타나스에서 만난 제이가 웃옷 대신 걸치고 있던 것이다. 티벳 승려의 행색을 하고 다니는 홀란드 출신의 그는 전에 태권도 선수였었다고 했다. 앞차기, 옆차기 등 기술 이름을 한국어로 매우 정확하게 발음하였으며 차는 폼도 그럴듯했다.
그는 탁발과 노숙으로만 몇 번이고 계속 산티아고로 간다 하였고, 실제로 식당에 들어가더니 빠에야 한 그릇을 순식간에 얻어오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곤 비결을 알려주었는데, 개에게 준다며 남은 것을 달라면 쉽다고 하였다. 또 나에게는 내일 아침에 먹을 또르띠야 한 조각을 부탁하였는데 2.50유로를 “허허” 웃으며 대신 치러줄 수밖에 없었다. 또르띠야를 받고 날아갈 듯 나에게 합장하고 들판 어딘가로 사라진 그, 그런데 여기 그의 상의 역할을 하던 것이 걸려 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도통 궁금해졌다. 혹시 노숙 중에 바람이 불어 날아간 것을 누군가 걸어 두었는지, 본인이 일부러 여기에 남겼는지, 아니면 사고라도 당한 것인지, 아무튼 궁금해도 천은 그 자리에 남겨두고 나는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날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하늘에 구름이 깔리고 바람이 불어, 때 이르게 선선한 가을 날씨 속에 메세타를 수월히 걸었다. 돌멩이 없이 부드럽게 깔린 흙을 밟으며 절로 행복해졌다. 흙길에 돌멩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뻤다. 큼직한 플라타너스가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워, 간간이 해가 얼굴을 보일 때에도 시원하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기에 조만간 소나기라도 오려는가 코를 킁킁해 보아도 비내음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부드럽고 걷기 좋은 길이 계속 이어졌다.
해바라기씨는 이미 영글어 고개를 겸손히 숙였고, 끝없이 늘어선 옥수수들은 한창 알알히 살쪄가는 중이었다.
편안한 걸음을 이어가 11시 반에 엘 부르고 라네로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를 지나는데 주인장이 밝은 목소리로 부엔 까미노를 외쳤다. 밝은 인사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까페에 가려던 마음을 돌려 여기서 음료수를 샀다. 레모네이드를 한 병 사서 테이블에 앉으니 이윽고 칩스 한 봉지를 내어왔다. 극구 사양해도 끝내 과자를 테이블에 놓고 안으로 사라지는 주인장.
호세 그리고 마리사 부부이다. 마리사는 전에 런던에 살았어서 영어를 할 줄 안다 했다.
가게의 이름은 라 티엔디나 델 솔이고 3주 전에 오픈하였으며 앞으로 한국 라면도 팔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원래 2층에서 민박을 했었는데, 지금은 식품점뿐이며, 돈을 좀 더 모아 다시 알베르게를 열고 싶다 했다.
뭔가 도와 드릴 일이 없는가 물었더니 구글 지도에 가게 이름이 잘못 나와 있다며 고치는 것을 도와 달라 하였다. 전혀 해본 적 없는 일이나, 검색해 가며 더듬더듬 도와드리고, 가게 이름의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어 드렸다. 그리고 친절하니 잘 될 것이라며 덕담도 해드렸다.
마리사가 하몽을 넣은 샌드위치를 큼지막하게 두 개나 싸주었다. 자기 때문에 길이 지체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좀 늦어지긴 했으되 뒤에서 따라올 친구들을 기다려서 같이 가면 되겠다 싶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좀 더 쉬며 때마침 도착하는 페데리카, 니꼴로 1, 로렌조, 이레네를 차례로 불러 앉혔고, 곧이어 알렉산드로 2와 니꼴로 2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가 도착해 앉았다.
모여서 왁자지껄 간식을 꺼내 먹고 가게에서 저마다 음료수며 맥주며 식품을 샀다. 모여 있는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다른 순례자 친구들을 계속 불러들여 가게는 더욱더 바빠졌다. 역시 가게는 사람이 와글와글하고 봐야 한다.
과자 한 봉지의 친절이 이런 효과를 가져올 줄 호세는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다 한번 들러보시면 그들의 환하고 다정한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시간이나 이 가게 앞에서 놀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호세와 마리사가 또 초콜릿 바를 가져와 떠나는 우리 손에 쥐여주었다.
페데리카와 내가 앞으로 치고 나섰다. 오늘의 길은 막바지에 다다랐고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페데리카가 뒤로 처져서 뭔가 꼼지락대더니 폰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 새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놨다
렐리에고스가 얼마 남지 않은 쉼터에서 이탈리안 키즈 그룹이 다시 합류했다. 이번에는 남자애들이 앞으로 나서 빠르게 사라졌고, 나와 페데리카가 그 뒤를 이었다. 이레네는 다리를 절며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입술을 꼭 앙다문 채 한손에 쥔 스틱에 의지해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었다. 날렵한 콧날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러나 진한 눈썹 밑 날카로운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렐리에고스에 도착하니 이미 5시가 되었다. 페데리카와 이레네는 예약해 놓은 알베르게로 가고 나는 혼자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리셉션은 비어있었다. 순례자들이 한창 몰려올 시간이 한참 지난 탓이었다.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뻬예그리노, 알베르게를 외치니 오스피탈레로가 나타났다. 아까 마을 입구 바르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던 분이었다. 페데리카에게 어느 알베르게로 향하느냐 물었었는데 사립으로 간다 하니 일행 모두가 그리 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거기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도 혹시 공립에서 묵을 순례자가 있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 위층에 위치한 큰 방 두 개 안에는 이층 침대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주방 기구가 충실한 편이고, 주방 공간이 넓었다. 마을에 식품점도 있으니 단체로 모여 해먹기 좋은 곳이다. 전기 충전할 곳은 많이 부족하다. 무료 공공 와이파이도 2층까진 오지 않는다. 숙박 8유로 + 1회용 침대커버 1유로 별도.
아침 일찍 출발했을 JP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온 순례자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수타로 밀가루 국수 반죽을 하고 있었는데, 파스타 대신 쓸 예정이라 했다. 수타면을 한 그릇 얻어먹었는데 쫄깃하니 맛이 좋았다.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어제 많이 걸어서 앞사람들을 따라잡은 것 이기에,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이 교제할 마음이 크게 들지 않았다. 아마 어제의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만사 귀찮아진 것일 게다.
여기는 공립인데 무려 통금이 없다. 열 시가 되어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청춘 남녀들이 바르에서, 알베르게 앞 벤치에서 밤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일이 레온에 들어가는 날인데 그렇게 설레지 않았다. 도시에 관심이 급격히 식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아군 ~ 렐리에고스
7:40 ~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