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레온 입성

18일 차(1), 렐리에고스 - 레온 24.4km

by 한번만 더

8월 19일 토요일


6시 반을 살짝 넘어 알베르게를 떠났다. 떠나면서 슬쩍 보니 로베르토, 그리고 얼굴만 아는 이탈리안 여자애가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분명 로베르토는 어제 사아군에서 나와 한방을 썼고 일행이 없었는데, 어제 저녁 사이에 둘이 속닥대다 눈이 맞은 모양이었다. 잠을 깨울까 봐 살그머니 방문을 닫고 나왔다. 특별한 일은 나에게만 생기는 게 아니었다.



왼쪽은 어제 사아군에서 같은 방에 들었던 발레리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론세스바예스 저녁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었다.


다음 마을 까페에 들러 커피를 한잔했다. 레온까지 25km 조금 안될 테니 느긋하게 쉬었다. 한 팀이 앉으면 그다음부터는 자꾸 지나가던 이들이 합류해 규모가 커진다. 한 테이블에서 시작해 급기야 테이블 네 개를 붙일 만큼 커졌다. 물론 여기의 공용어는 이탈리아어다.


이야기가 끝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슬쩍 먼저 나왔지만 굳이 발걸음을 재촉하진 않았다. 큰 오르막이나 돌밭 없는 편안한 길이 계속 이어져 힘들이지 않고 여러 마을을 통과했다. 마을마다 강과 수로가 이어져 물이 풍부하다. 까리온부터는 꽤 큰 강들이 마을 주변을 흘러간다. 아니, 물 주변에 마을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물놀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뿌엔떼 비야렌떼의 멋진 다리를 건너, 나무가 우거진 숲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이 나무 이름을 전엔 알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루나무 비슷한 종류 같기도 하였다



아까 까페 옆자리에 앉았던 스페인 남부 출신 어거스틴이다. 함께 걸으며 대화를 텄는데 어쩌다 보니 니체와 우버멘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여기선 다들 철학같은 내면에 관심이 많다.




아르카후에자의 샘을 만났다. 이젠 산티아고도 300 여 km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300km를 “정도”라고 부르는 나의 거리 감각엔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산술적으로 열흘 내외로 닿을 거리이니 슬슬 산티아고 다음의 계획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그날그날 목적지를 정하는지라 내일 어디서 쉴지도 모르고 이 여정이 언제 정확히 끝날지도 아직 모르겠다. 아마 100km 안쪽으로는 들어가야 그나마 윤곽이 잡힐듯하였다.


물을 마시고 한참 앉아 쉬었다. 괜히 노래가 부르고 싶어져 크게 몇 곡이나 불러댔다. 어차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시 외곽의 공단 길이 시작되었다. 길 위의 기름얼룩은 기억의 멍자국처럼 지워질 듯 지워질 듯하며 서글프게 스며 있었다. 곧 포장 공사로 덮일 예정이었다.


부르고스에 들어갈 때도 주말이었는데, 레온도 주말에 들어가게 되었다. 덕분에 공사의 소음 없이 중장비와 차량 전시장, 기계 판매장이 늘어선 구역을 조용하게 지났다.


아주 가끔 커다란 트럭이 적막을 깨뜨리며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여기선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는 느낌이다. 지난 주말에 어머니와 대화한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또 주말이 왔다.


다음번엔 좋은 카메라를 가져가리!


드디어 언덕에서 레온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흰색의 대성당이 마치 미니어처처럼 앙증맞아 보인다. 모노폴리 게임판에 작은 건물 하나를 올려놓은 그런 모양새다. 폰 카메라로는 멀리서 좋은 사진을 찍기가 어려워, 이럴 땐 조금 더 좋은 카메라를 가져올까도 싶다. 순례 횟수가 거듭될수록 짐은 점점 줄어든다는데, 나는 다음번에 짐이 더 늘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자연히 다음번의 순례를 떠올리게 된다.



레온 시가지에 들어왔다. 중세에 지어진 성벽이 남아있다. 군데군데 로마시대의 성벽이 남은 곳도 있다.


골목을 지나 오늘의 숙소로


8유로짜리 Carbajalas 알베르게에 들었다. 리셉션이 마당에 있어 특이한데 시설은 양호하다.



샤워 수압과 수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온수는 뜨거웠고, 냉수는 차가웠다. 온수가 뜨겁고 냉수가 차갑다는 건 매우 당연한 말 같지만 어느 쪽을 틀어도 그저 그렇게 뜨뜻 미지근할 때가 많았었다. 찬물을 몇 분이고 펑펑 맞으며 몸을 식혔다. 물을 마음껏 쓰는 것은 커다란 사치다.



숙소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길래 농담 삼아 ’군대 막사 같은 곳이다‘ 라고 했지만 표현할 만한 적당한 단어는 끝내 찾지 못했다. 취사는 불가하고 마이크로웨이브만 사용 가능하다. 알베마다 취사 가능한 부엌은 점점 없어지는 추세로 보인다. 코로나 때 없앤 이유도 있거니와, 제대로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청소하는 입장에선 그게 훨씬 편하리라. 하지만 식당의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레온 2편으로 이어집니다.

부르고스부터 온타나스 - 프로미타스 - 까리온 - 사아군 - 렐리에고스로 이어진 메세타 구간을 마무리하고 레온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늘이 6일째 날이네요. 이 구간을 하루 줄이기 위해 좀 더 많이 걸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니 하루빨리 간다고 딱히 도움 되는 게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메세타라고 크게 단조롭거나 어렵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오히려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묵고 싶은 마을이 있으면 거기 묵기도 하고, 하루의 걸음을 조금 일찍 끝낸 다음, 개인 정비하고 밥도 여유 있게 지어먹고 마을 구경도 하며 가는 게 최고지 싶습니다. 걷는 거리를 늘리니 스트레칭과 마사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을 둘러보는 시간과 글 쓰는 시간이 자꾸 줄어들어 좋지 않더군요. 게다가 많이 걸어 피곤하고 저녁만 되면 비몽사몽인데,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니 몇 번이고 고치지 않으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정도의 글이 나옵니다. 밥은 안 먹을 수 없고 잠도 안 잘 수는 없으니 다른 시간을 희생할밖에 도리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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