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바욘으로 향하는 야간열차
7월의 마지막 날
더 이상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출발하는 날을 맞았다.
태평한 건지 안일한 건지 스스로에게도 궁금했지만 답은 곧 찾아올 것이었으니.
바욘행 열차를 타러 파리 Austerlitz 오스떼를리츠 역으로 향했다. Gare de Lyon 파리 리용역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스떼를리츠 역이다. 신기하도록 맑고 선선한 날씨가 7월 내내 이어졌는데, 이번주는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전통적으로 기차역엔 큰 시계탑이 서있다. 기차는
정시에 떠나지만 예전엔 시계가 아주 귀해서 개인들이 가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가 모바일폰이나 시계를 가지고 다닌다. 같은 시간에 일이나 공부를 시작하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으러 가며, 같은 시간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 시계가 항상 필요한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시계를 덜 보게 될 것이었다. 눈을 뜨면 걷고,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는 그런 생활을 할 것이므로.
역과 플랫폼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파리 곳곳이 단장하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여 기차 시간을 놓칠까 꽤 이르게 나왔기 때문에 한 시간을 넘게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여유 시간이 나자 곧 마주하게 될 순례길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이 함께 찾아왔다.
여행 전에는 항상 겪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알게 되리라. 걱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드디어 출발 시간이 가까워져 모니터가 출발 정보를 알려주었다.
러시아 열차는 3등 칸도 침대인데 프랑스 3등 칸은 그냥 의자다. 장거리 이코노미 비행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밤새 앉아서 가는 여정이다. 침대칸을 끊거나 TGV를 탔어야 하는데 프랑스의 야간열차 3등 칸을 처음 타봐서 벌어진 일이다. 프랑스는 러시아만도 못한가 푸념을 했지만 물론 프랑스는 죄가 없다.
이건 그저 다른 점 일뿐이고, 사실 프랑스엔 공짜란 게 별로 없다. 모든 서비스는 거기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 공원이나 지하철역에 무료 공중화장실은 전혀 없고, 물을 마시는 음수대도 찾기가 힘들다. 짓고 유지하는데 돈이 드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장거리 여행을 할 땐 식수를 넉넉히 챙기시라. 기차 안에도 공짜로 물을 마실곳은 없으니 말이다. 기차 안 매점이 문을 닫고 나면 이를 몰랐던 여행객들은 너도나도 물통을 들고 이 칸 저 칸 물을 찾아 돌아다니게 된다. 급한 사람들은 심지어 화장실 물을 받아간다.
나름 물을 챙긴다고 챙겼지만 500ml 작은 병은 자정 이전에 다 비워버렸고, 출발 전 마신 와인 때문인지 새벽녘에 깊은 갈증이 찾아왔다. 정말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오직 물 한 컵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배낭을 뒤져 바나나 두 개를 찾아먹고 나서야 좀 참을만해졌다.
22:10에 오를레앙을 지나고 나면 밤새 정차역 없이 달린다. 7:22엔 카톨릭 성지로 알려진 루르드를 거친다.
필리핀에서 온 대가족이 같은 차량에 탔는데 루르드를 가신다고 했다. 가족 단위 승객이라 시끌벅적했다.
밤사이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저기가 루르드 성당인 모양이다. 지나가며 차창밖으로만 구경했다.
8월 1일
10시가 다 되어 바욘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프랑스의 서남쪽 끝단이다.
도착하자마자 다시 비가 시작되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없었는데 산과 바다가 가까우니 변덕스러운 날씨는 어쩔 수 없다. 출발하는 내일이 맑기만 기도할 뿐이다.
제일 먼저 가게에서 물을 한병 사고, 다리를 건너 올드타운 쪽 대성당으로 향했다. 생장행 기차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바욘 대성당에서도 크레덴셜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시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웅장한 대성당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검색해 보니 역시나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골목길 사이로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성당 안에 봉사자 할머니 한분이 앉아 계셨다. 크레덴셜을 구하러 왔다 하니 프랑스길 가느냐 북쪽길 가느냐를 먼저 물어보셨다. 프랑스길로 간다 하니 생장에 가서 받으라고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그건 저도 아는데 미리 받고 싶었답니다 ㅠㅠ.
순례자 여권은 받지 못하였어도 바욘 대성당을 구경하고 천천히 바깥으로 나왔다. 이때는 날이 궂기도 하여 거리의 경관에 시선이 미치지 않았지만, 얼마 후 날이 개고 보니 오래된 거리엔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여기 출신 친구에게 듣기로 햄이 유명하고 바스크 지방 음식도 맛나다 하였다. 물론 자기 지방 음식은 다들 맛있다고 하니 맹신은 금물이다.
잠을 제대로 못 자 입맛이 별로 없고 커피만 자꾸 생각 났다. 카페에 들어가 햄이 들어간 퀴시와, 본고장의 갸또 바스크를 주문했다. 갸또가 프랑스어로 케이크라는 뜻인데, 갸또 바스크는 이 지역 특유의 치즈를 넣고 바삭하게 구운 케이크이다.
바스크는 바스크인들이 거주하는 이 지역의 이름이고, 지금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걸쳐 나누어져 있다. 바스크인들은 강한 민족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 안에서도 독립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지역이다. 예전에는 분리주의자들이 극렬하게 활동했었다고 한다
길거리는 물청소가 한창이었다. 축제가 바로 어제 끝났다고 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축제를 즐겼을 관광객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카페와 식당을 가득 메웠다.
노란색의 앙증맞은 미니 버스가 관광객 운송을 맡고 있다.
이것저것 먹고 쇼핑몰이며 공원이며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5시가 다 되었다. 생장행 기차 시간을 맞추러 역으로 돌아왔다.
생장으로 가는 중간 지점으로만 여겨지는 바욘,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여기서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여러분도 시간이 나면 한 번쯤은 들러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