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아니라 감사로 남은 사람 (행성 -18)
텔레비전에서 초당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바삭한 콘 위에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하얀 소프트아이스크림.
한입 베어 무는 장면이
유난히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이스크림을 언제 먹었는지 떠올려 보니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언젠가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곳에 가서
혼자라도 먹어봐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그때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하려다
무심코 화면을 잘못 눌렀는지
친구 소식 사진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사이에
초당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게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반짝이는 타일 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타일 벽에
희미하게 비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선명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였다.
그 순간, 마음이 잠시 멈춘 듯했다.
내 휴대전화 앨범 어디에도
그녀의 사진은 없다.
그런데 타일 벽에 비친
그녀의 흐릿한 모습 하나가
내 하루를 흔들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었는지,
무표정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족들 사이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질투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래,
저렇게 가족들과 함께라면
행복하겠지.
그녀는 가족들과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리움을 애써 밀어 두고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글을 써야 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몸이 고단했는지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다시 타일 벽 앞에 서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 속 구도도 사라졌다.
그녀만 조금씩 확대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도, 찡그림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무의 표정.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얼굴은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
'나였다.'
무표정으로 서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바라봤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보기만 했다.
그때 휴대전화 알림 소리가 울렸고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내가 아직 그녀를 그리워해서일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일까.
예전 같았으면
눈물이 먼저 흘렀을 것이다.
사진 하나에도
하루 종일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눈물 대신
생각이 먼저 올라왔다.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나는 담배를 끊었고,
술도 멀리했다.
조금이라도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나를 고치려 애썼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 고마운 사람이다.
그녀는 내 인생에서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나를 바꾸고 지나간 사람이다.
그녀의 꿈을 꾸고도
울지 않았다.
외롭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내가 자랐다는 증거 같았다.
마음속에
굳은살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프지 않다는 건
무뎌졌다는 뜻이 아니라,
버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녀의 행복을 바라면서
내 자리에서 글을 쓴다.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마음에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이제 그리움이 아니라
감사로 남아 있다.
나를 조금 더 다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다.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