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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강 Jan 01. 2024

박제가 된 천재가 백화점 옥상에서 겨드랑일 긁을 때

없는 날개 돋아보겠다고 우리 집 베란다에서 겨드랑이를 긁어봤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모더니스트 소설가 이상이 1936년 <조광>지에 발표한 소설 <날개>의 첫 문구는 87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새롭고 또 새롭다.


지금은 익숙한 말인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이 소설은 아내에게 기생하다시피 살던 1930년대 지식인의 자아 분열과 회복 의지가 담긴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중고생이든 서울대 갈 애든 누군가는 반드시 읽어야 할 현대 소설 모음집’ 같은 데서 중학교 2학년 즈음에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던 시절.

김동인의 <감자>같이 때로는 야릇하고 서슬 퍼런 낫자국이 찍히는 소설이 훨씬 더 와닿던 폭풍의 10대였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문학 자습서에서 안내해 주는 대로 이건 자아고 저건 의식의 흐름이고 이건 모더니즘이라는 걸 학습하며 외우다시피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소설가의 정확한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첫 대사와 끝 부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소설 <날개>.


겨울엔 미디어 파사드가 화려하게 빛을 낼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에서, 주인공은 ‘현란을 극한 정오’에 불현듯 겨드랑이에 간지러움을 느끼며 외쳐 보고 싶어 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 다시 보게 된 작품들이 꽤 있다.

<날개>도 그중 하나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었을 1930년대.

아내가 주는 불순한 안온함에 기대어 사는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았을까.

하는 것도 없이 먹고 자고 움직이는 생활에서 그는 생의 의지를 찾았을까.

아내가 준 약이 두통약이 아니라 수면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백화점 옥상에 서 있을 땐 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도 나만큼 죽고 싶었을까?


우울이 극심하던 5월에 창밖을 바라보면 아파트 사이로 난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다.


'저 사이로 떨어지면 좋으련만.'


퇴근을 하고 빈 거실에서 거실 베란다 난간에 발을 딛고 한참이나 숲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고소공포증이 심해 아래로는 쳐다볼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푸른 나무와 그 사이에 어우러진 오밀조밀한 창들을 바라보며 저 네모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잠을 자지 못했고, 밥을 먹지 못했다.

밥을 먹지 못하니 배변도 불가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먹고, 자고, 싸고, 가 안 되는 삶.

정말 기본적인 것조차 안 되는 삶이라 괴롭고 또 괴로웠다.

이렇게 사는 건 삶이 아니니 죽어서 이 고통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럴 때마다 베란다 난간에 매달렸고 용기가 없어 내려왔다.


우울이 심해서 유서를 남길 힘조차 없었다.

지나고 나서야 생각하지만 금방 떨어져 죽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일 때문에, 애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문득 내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잊고 지냈던 단어처럼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애들 때문에 죽기에는 내가 너무 불쌍한데?'


애들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죽고 싶지만 그 이유에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끼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너무 싫었다.

그들은 나에게 소중하긴 하지만 나만큼 소중하진 않았다.

나는 나로서 죽고 싶었다.

문득 이렇게 대접받지 못하는 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다.


내가 죽고 나서도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은 삶을 이어갈 것이다.

죽으면 나만 억울해질 생각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죽는 것보다는 사직하는 것이 낫다.

사직하더라도 설마 죽기야 하겠나.

답은 없겠지만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겠지.


정말 그 시시하고 쪼잔한 생각들이 나를 살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불쌍히 여기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먹고 자고 싸는 것부터 시작하자.
기본적인 것부터 해 내고 그다음을 준비하자.


3개월 만에 병원에 다시 가게 된다.

작년보다 심각한 상황에 선생님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여러 가지 약을 처방해 주셨다.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도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그 또한 삶을 위해 버텨야 하는 과정이었다.


정말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하면서 서서히, 아주 느리게 삶을 회복해 갔다.

약은 아침과 저녁 자기 전에 골고루 먹었고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같이 처방받았다.

내일이 온다는 생각에 잠에 들기 어려워서 자기 전엔 항불안제를 먹고 잠들었다.

위산으로 요동치던 속이 태풍이 끝난 듯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깨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정말 잠만 자도 살 것 같았다.

커피 향기에 행복했다.

죽을 먹고 지내더라도 배변 활동을 할 수 있으니 살아 있다고 느껴졌다.

똥을 싸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다니!


삶은 정말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서 생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줬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날개를 돋아보겠다고 겨드랑이를 긁어본 적은 없다.

난 지식인도 아니고 모더니스트도 아니어서 거창한 데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신생아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에서 의미를 찾았다.


살자.

살자.

하루만 더 살아보자.


하루살이처럼 살았더니 어느덧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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