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윤민정 Jun 26. 2020

1.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외도 이야기

   *

아 몰라. 나 또 부끄러운 얘기하는 거야? 제 얼굴에 침 뱉는 그런 이야기 같은 거. 완전 내 전문인 거. 그런데 정말 모르겠다. 어떤 게 부끄러운 얘기고, 어떤 게 아닌지. 내 기준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가족’이라는 관계로 만났던 이들은 부끄러워한다. 지금 하려는 이런 얘기 같은 거. 배우자의 외도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이런 얘기를 하면 나도 수치심을 느껴야하는 건가?


이 글을 시작하는 지금으로부터 3일 전에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우자가 얼마 전에 퇴사한 회사에서 직장 동료와 깊은 관계였단 걸. 깜짝이야. 놀라워.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창원에 놀러 갔던 날, 두 사람이 대낮에 만나서 섹스도 하고 밤새 얘기도 했다지. 나에게는 보고 싶다고, 떨어져 있는 게 힘들다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동시에 이 일이 일어났다지. 너와 전화통화하는 나. 친구 만나서 너무 좋다고 얘기하는 나. 그리고 나와 전화통화하는 너. 그 여자를 만나러 걸어가는 너. 이 두 가지 장면의 병치를 생각하면 아프다. 이미지가 칼날이 되어서 몸에 꽂히는 것 같다. 피가 철철 나기는 하는데 웃겨. 이 모든 촌극에 있는 힘껏 웃어버리고 싶다. 이렇게 중요한 수업을 해줬는데 내가 수업료를 안 내도 됩니까? ‘관계에 대한 환멸’이라는 수업,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

영원히라니. 쓰고 보니까 별로 이 말도 진실되진 않다. 순식간에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어느 쪽을 보느냐의 문제다. 뒤를 보면 고통스러운데 앞을 보면 덤덤하다. 감정의 일부분을 마비시켜놓은 걸까? 이 얼어붙은 감정이 어느 순간 일시에 녹아내리는 걸까? 단순히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인가? 안 날 만도 하다. 2016년에 결혼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결혼한 게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남편이 있다니! 문득 생각하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결혼도 이런데 이혼이 실감나면 이상하다.

가끔 이런 내가 걱정된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느끼자. 이렇게 미뤄놨던 감정들이 어느 순간 일시에 덮친다면? 그날이 내가 죽는 날일까? 어쩌면 미뤄놓은 것 따위는 없는지 모른다. 나는 그냥 냉정한 사람인지도. 엄마가 그렇게 말했고, D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자주 말했듯이.     


내가 이 관계를 알게 된 것은 두 사람이 고백했기 때문이다. D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직장 동료인 JR이 자꾸 ‘들이댄다’는 식으로 나에게 띄엄띄엄 이야기해왔다. 자신이 퇴사한 이후에도 JR이 계속 연락한다면서, D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막상 스피커폰으로 세 사람이 통화를 시작하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D도 직장 동료도 술술 털어놔서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용서받을 줄 알았어.”

D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몸을 떨었다. 내가 아주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길가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나도 D도 그랬다. 이 마스크 덕분에 표정을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기억해. 잘 들었다가 지켜. 두피염 신경 쓰기. 일 빨리 다시 시작하기. 밥 잘 먹고 잠 잘 자기. 자책하지 말기.”

마스크 위에 드러난 D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떨지도 울지도 않는 나를 보면서 냉정하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

이 글을 왜 쓰나? 억울하고 원망스러워서? D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고발하고 싶어서? 아니올시다. 내가 소리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기혼여성 같은 기혼여성이 될까봐 늘 무서움에 떨었던 사람이다. 맨날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나. 기혼남성들이 모여서 결혼 생활의 부자유에 대해 토로하는 모습이.

“우리 마누라는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요새는 집에서 여자가 왕이지.”

그들이 야유하는 이 ‘아내’라는 존재를 한국 사람들은 익히 안다. 지겹고 억척스럽고 통제하고 간섭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그 존재. 남자의 자유를 앗아가는 괴물. 나는 그런 존재가 될까봐 늘 조심하면서 살았다.     


나에게 처음으로 이 두려움을 심어준 존재는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성직자들이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기 한 달 전, 혼인 교리를 들었을 때다. 반나절쯤 이어지는 수업을 수료해야 성당에서 식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D와 나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으로 갔다. 사제였던가 수사였던가 하는 남자가 <서울대교구 혼인강좌>라는 제목의 책자를 나눠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수업이 결혼을 앞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넘겼는데 이런 문장이 나왔다. 


남편에게 말을 거는 아내의 목소리가 격하고 크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1) 겁에 질려 떤다. (2) 고분고분 듣는다. (3) 맞서 싸운다. (4) 도망간다.

정답은 3번과 4번입니다. 남편의 경우 아내의 크고 격한 목소리를 듣게 되면 전두엽에 피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이성마비 상태가 됩니다. 결국 남자는 일단 살고 봐야겠다 하는 뇌의 명령에 지배받게 되어서 아내의 격한 목소리를 듣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 맞서 싸우거나 도망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 부부 사이에 다툴 일이 생기면 아내가 먼저 톤을 낮춰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하십시오. 남편이 화를 낼 경우에는 무조건 20분을 기다립시오.     


아찔했다. 내가 추락하는 속도가 아찔했다. 세심하게 배려하고 떠받들어야 하는 꽃다운 ‘신부님’에서, 지겹고 짜증나는 ‘마누라’로 추락하는 이 속도. 앞에 나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성직자는 물론이고 옆에 앉아 있는 D조차도 내가 느끼는 공포를 모르는 것 같았다.

회관 안에 결혼을 앞둔 커플이 여럿 앉아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머리가 길고 옷차림이 화사했다. 나 역시 생애 그 어느 때보다 공들인 외모였다. 웨딩 촬영을 하고 드레스를 고르고, 피부과에 다니며 그 어느 시기보다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고 살 때였다.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코르셋’을 수행하는 여자들을 비웃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다이어트를 하고 결점 없는 흰 얼굴을 만들고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트리트먼트에 힘쓸 때 무엇을 꿈꾸었는지 안다. 우리는 행복을 꿈꿨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일요일에 성당에 다니는 일상. 대단히 특별할 건 없어도 남부럽지 않게 사는 보통의 삶. 그 천진한 기대를 생각하면 나는 도무지 우리를 비웃을 수 없다. 이런 작은 바람조차 철저하게 모욕하는 세상에 화가 날 뿐.


수업이 마무리 될 때쯤 성당에선 우리들에게 임신에 힘쓰라며 달력을 나눠줬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정점인 아이를 낳는 일이 중요하며, 우리에겐 그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아 그림이 그려진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스티커가 한 묶음 딸려왔다. 달력 날짜 아래의 조그만 빈칸이 스티커를 붙이는 곳이었다. 나는 이 굿즈를 받아들고 회관에서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여성단체에 가입하자. 이 혐오를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어.     


*

결혼식을 올리고 4년 후. 직장 동료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줄 모르겠다고 D가 말했을 때까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 직장 동료가 자신에게 고백했다고, 자신은 전혀 관심 없고 난처하기만 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도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 직장 동료를 찾아가서 남의 가정을 깨려 한다고 머리채를 잡아야할까?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아내처럼? 셋이 만나서 쓰리썸이라도 하자고 해야할까? 싸구려 예술 영화에 나오는 아내처럼? 이 상황에서 아내라는 존재가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나는 그저 물러나 있었다. 이런 일이 내 일상을 간섭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일찍 들어오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있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미디어에 나오는 아내, 82쿡/네이트판 게시판에 등장하는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이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마음속에 메아리치는 말들을 자신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예컨대 거울을 볼 때 떠오르는 말들. 나 못생겼나? 매력 없나?

자, 이제 완벽하게 진부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남편 간수 못한 아내. 남편이 바람 피워서 자존감이 추락한 아내. 내 몸을 미워하는 여자. 그토록 뻔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자리다.     


내 머릿속에 여러 목소리가 와글거린다. 2018년에 온라인에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를 연재했을 때가 기억난다. 시가 구성원들과 ‘아주버님, 형님, 도련님, 아가씨’ 등의 호칭 문제를 놓고 싸웠던 과정을 적은 글이었는데, 네이버 랭킹 뉴스에 오른 다음에 엄청난 악플 세례를 받았다.

“저렇게 피곤한 여자랑 어떻게 사냐.”

“내가 남편이라면 당장 이혼했을 거다. 지금쯤 이혼했겠지.”

“집안을 다 때려부수는 미친년, 다른 가족의 감정은 일말도 신경 쓰지 않는 싸이코패스.”

“저 계집년, 언제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할 말 다 하면서 살 수 있는지 보자.”

나는 그 말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다른 삶을 구현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나니까. D와 민정이니까. 제3의 길을 찾고 싶었다. ‘갈등 끝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도 아니고, ‘갈등을 봉합하고 화목하게 잘 살았습니다’도 아닌,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가족의 서사를 내 삶으로 쓰고 싶었다.

그런데, 짠. 내 글에 달렸던 악플대로 된 것이다. 고소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들에게 놓치지 말고 구경하러 오라고 초대장이라도 보내고 싶다. 평등한 부부 관계, 정의로운 가족 관계는 현실에서 구현불가능한 이상이었을까?     


*

‘나 못생겼나?’ 사실 이건 그다지 타격 없는 질문이다. 외모를 의식하지 않고 산지 꽤 되어서인지. 그것보다 더 두려운 질문은,

나 사람 숨 막히게 하나? 우리 엄마처럼?

이혼 서류를 접수한 다음 D는 같은 말을 계속했다. 정말 나뿐이라고. 자기 마음속엔 나뿐이었으며, 직장 동료에겐 그저 인간적 연민과 안쓰러움만 들었다고. 잘 달래고 수습해서 나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내 앞에서는 항상 자격지심을 느꼈다고. 자기가 볼 때 나라는 사람은 항상 바르고 강하고 당당해서 자신이 초라했다고. 그런데 그 직장 동료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고.

이런 얘길 들으면 당장은 화가 나다가도 희미하게 불안한 예감이 든다. 앞으로 언젠가 나는 분명히 이 말에 휘둘리겠지. ‘바르다’라는 말은 옳고 그름이 지나치게 확실하며 그 기준을 남에게 강요했다는 말이 아닌지. ‘강하다’라는 말은 좌절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인간미가 없었다는 말이 아닌지. 차갑고 냉정했단 말이 아닌지. ‘당당하다’는 말은 오만하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 아닌지.

나,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었나.     


몇 해 전 엄마와 우리 부부, 남동생 부부가 함께 차를 타고 갈 때였다. 엄마는 남동생의 배우자인 A에게 자꾸 말했다.

“너는 그렇게 앞머리를 내리지 말고 싹 넘겨야 깔끔한데.”

A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앞머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머니, 이 더듬이는 제 생명이란 말이에요.”

나라면 시어머니한테 헤어스타일을 지적 받는 게 엄청 기분 나쁠 텐데 A는 성격도 좋구나. 나라면 절대 저렇게 유머러스하게 받아치지 못했을 거야.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정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라고 웃으면서도 도저히 A의 앞머리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엄마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A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서 귀 뒤에 꽂아주고야 말았다. A의 머리를 향해 다가가던 그 손을 보면서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앞머리를 넘기는 집요한 손을 보며 유달리 불쾌했던 이유는 엄마의 기분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흡족하지 않은 상황을 견딜 수 없는 마음. 너는 왜 내가 좋다고 생각한 대로 하지 않느냐는 원망. 나도 이런 나 자신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


D에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헤어스타일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태도를 감시하는 사감 선생님 같았을까. 미용실에 다녀온 D를 보면서 거듭 말했던 날이 있었다.

“원장님이 네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줬구나. 왜 그랬을까. 다음부터는 사진을 꼭 가지고 가. 갈 때부터 사진을 찾아서 가지. 왜 이렇게 잘랐을까.”

D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정말 머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머리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

그를 보고 있으니 자신이 너무 싫었다. 동시에 이런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길 바랐다. 사실 내가 D와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 큰 이유는 그가 내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어서였다. 우리 착한 강아지. 내 말만 잘 들으면 쓰다듬어줄게. 게임하지 말고 들어와서 자자. 밤에 술 마시지 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 청소하고 책 읽고 강연 들으러 가자.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우리 백년해로하자.     


*

작년 여름에 우리는 이탈리아로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도 몇 번 다퉜지만 어찌됐건 좋은 휴가였다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제야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알아챈다.

여행 중에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갔다. 바로크 미술의 정수인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기대했다. 나는 바로크 미술의 극적인 느낌을 꽤 좋아했는데, 이 미술관을 둘러보고 고전주의자들이 바로크 미술을 악취미라고 혹평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반쯤 열린 입술, 지그시 감은 눈, 힘줄이 도드라진 남자의 팔에 여자의 허리가 감겨 있는 모습뿐이었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넘실거리는 미술관에서 걸어가면서 나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D가 나에게 ‘헤어스타일이 바뀌어서 성욕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탈코르셋 운동을 접한 이후부터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리본이 달린 원피스 대신 헐렁한 바지를 입고 살아왔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내가 행하는 일인지 D도 이해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여성복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이 운동에 동조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소릴 하지? 나는 힘없이 말했다.

“난 달라진 게 없는데. 똑같은 사람인데. 머리만 잘랐을 뿐인데.”

“아니, 머리가 짧아진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야. 그냥, 만나던 사람이 갑자기 스타일이 달라지면 낯설어지잖아? 그래서 왠지 자기한테 거리감이 느껴져.”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게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길이었을까? ‘코르셋 벗으면 남자친구 떠나간다. 남자친구는 네가 아니라 코르셋을 좋아한 거다.’ 이런 내용의 문장을 SNS에서 봤던 적이 있었다. 이 문장의 완벽한 사례가 되는 게 비참했다. 내 삶, 우리의 관계가 그토록 얄팍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잠자코 걸었다. 전시실을 다 둘러보고 아래층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커피와 빵을 앞에 놓고 D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요새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는 당시 이미 직장 동료 JR과 깊은 관계로 진전된 상태였다. 그것을 모르던 나는 네가 많이 힘든 시기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예전에 내가 너에게 받은 사랑만큼 내가 돌려줄 차례라고 생각하면서, 울고 싶은 자신을 추스렸다.     


법원에 가서 이혼 서류를 접수할 때 직원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내분은요?”

나를 '남편'으로 착각한 것이다. 마스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머리가 짧았기 때문인가. 옷차림이 문제인가. 아마 머리 길이가 가장 주요한 판단 기준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에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나님…. 천국에 가면 모두 삭발을 하고 있나요? 그곳은 머리카락이 없는 세상인가요? 아니면 거기서도 여자는 미사보를 쓰고 머리카락을 가려야 하나요? 우리는 언제쯤 머리카락 길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요?     


*

일곱번 째 단락을 쓰는 지금, 나는 D와 그의 외도 대상이었던 JR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사과를 하겠다고 한다. 사과를 받는다고 달라질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 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서 합의서도 쓰기로 했다. D와는 재산분할협의서, JR과는 손해배상에 대한 합의서. JR에게 처음 연락했을 때, 그는 선뜻 나에게 돈을 주겠다고 했다.

“얼마를 생각하시는데요?”

내가 묻자,

“천만 원 드릴 수 있습니다.”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돈 말고 다른 배상 방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돈을 내겠다고 말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먼저 손해를 배상하라고 얘기했던 게 실수일까? 그 말 이후 JR은 돈을 치르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긴 그의 생각이 옳기도 하다. 내가 JR을 때리겠는가, 잡아다가 일을 시키겠는가? 어떤 방식으로 사과를 해야 내 기분이 풀리겠는가? 아니, 왜 내가 이걸 고민하고 있지?

자몽에이드를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알콜이 든 것 같다. 왜 이렇게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다가 어젯밤엔 12시간을 내리잤는데, 지금도 자꾸 눈이 감긴다. 정신이 아주 맑을 줄 알았는데 모든 게 꿈같다. 자몽에이드엔 비타민이 많이 들었다지. 지금의 상황에 좋은 선택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어떨까? 덤덤할까? 나 혼자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나올 걸 그랬나? D의 어머니라도 대동해서 한 사람의 아내이자 며느리라는 윤리적 우위를 즐겨볼 걸 그랬나? 내가 그토록 지겨워했고 싫어했던 자리가 얼마나 안전한 자리였는지 생각한다. 내가 만약 동거 상태였다면 JR에게 당당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 어려웠을까? 책임을 물어도 결혼 파탄만큼 중요한 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함께 살다가 기만당하고 헤어지는 건 똑같은데, 법적 사회적으로 인정된 관계라는 건 취급이 다르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아내이자 며느리라는 자리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지금 나에게 도덕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결국 이 자리인가. 이런 걸 보면 결혼하기 잘한 건지 모르겠다. 하하.     


*

만남을 끝내고 돌아왔다. 기억에 남는 장면 두 개다. 먼저 첫 번째 장면.     

나: 당신은 당신이 뭘 망가뜨렸는지 모를 거예요. D와 스킨십을 할 때는 오직 자기 욕망만 생각했겠죠. 이후에 관계를 이어갈 때도 마찬가지고요. D의 삶은 제 꿈의 일부이기도 했어요. 당신은 그걸 부숴버린 거예요. 미안하긴 한가요? 당신은 자기 감정, 자기 욕망만 중요한 사람이니까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끝까지 모를 거예요.

JR: 나도 알아요. 미안하다고 생각해요.

나: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JR: 미안하다니까요. 그런데 미안함이 안 느껴진다고 하면 어떡해요?

나: …지금 저한테 신경질 내시는 거예요?

이 이후 잠시 티격태격 말다툼이 있었다. 어린애들 장난처럼. D가 내 삶의 일부였다는 말은 써놓고 보니 조악한 멜로영화 대사 같지만 진심이었다. 그가 나와 함께 걷다가, 나무에 앉은 새가 눈에 띄면 항상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감탄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새들의 맑은 울음소리, 가벼운 움직임에 깊이 감동하곤 했다. 그 천진한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두 번째 장면.

D: 모두의 관계가 이렇게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끝나는 것보다 더 낫게 끝났으면 해. JR은 자기랑 취향이 비슷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나 <윤희에게> 같은 영화도 재미있게 봤대.

나: 그래서? 그 얘기가 지금 무슨 상관이야?

D: 자기 작업실에서 JR이 글을 쓰면 어떠냐는 거지.

나: (놀람) JR과 내가 작업실에서 같이 글을 쓰라고?

D: 같이 작품을 하라는 건 아니고…. 자기 작업실에서 하는 글쓰기 워크숍에 JR이 참여하면…. JR이 글로 쓰면 자기한테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전달이 될 수도 있고…. 자기도 말했잖아. 이 관계에서 진부한 역할 하는 게 싫다고.

나: (한숨) 내가 변호사 찾아가기 전에 구글에 무슨 키워드로 검색해본 줄 알아? ‘상간녀 합의금’으로 검색해봤어. 지금 우리 상황은 끔찍하게 진부한 상황이야. 이 사람이 ‘상간녀’라면 나는 ‘조강지처’쯤 되려나? 막장 드라마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이 상황이 현실이야. 네가 매 순간 했던 선택이 오늘날 이 토할 것처럼 진부한 현실을 만든 거야. 그걸 받아들여.     


*

JR은 그 자리에서 합의서를 쓰고 천만 원을 내 계좌로 송금했다. 이게 그 사람 방식의 사과겠거니 생각하는 수밖에. 못내 찜찜한 것은 JR에게서 받은 자기도취적인 인상이다. 잘못을 저지른 다음 책임지는 자기 자신의 역할에 대한 도취. 눈을 부릅뜨고 단호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금전적 여유가 좀 있으신가봐요?”

내가 묻자 JR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얼굴을 보고 나니 덤덤했다. 얼굴을 보면 화가 나거나 상처받을까봐 걱정했는데, 마주하고 나니 오히려 모든 일이 한결 시시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했던 스킨십, 교환했던 체액. 상상해봐도 딱히 질투가 날 것도 없고 그저 시시할 뿐. 화분 속에서 말라버린 식물을 뽑아 버리는 것처럼 딱 그 정도의 지저분함, 딱 그 정도의 번거로움만이 나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다.


만약 JR이 나에게 없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질투가 났을까? 위축됐을까? 얼굴이 동그랗고 보조개도 있고 웨이브펌을 한 갈색 머리카락에 빵집을 하는 여자였다면? 따뜻하고 부드럽고 나누어줄 것이 많은 여자였다면? 그것이 빵이든, 애정이든.

JR을 본 이후 D의 한결 같은 취향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나를 만나기 전에 네가 사귄 여자들도 그랬지. 어린 나이에 사업체를 경영하거나,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는 여자들. 스쳐가는 이야기로 들었을 뿐이지만 그들의 얼굴을 상상할 수는 있어. 진지하고 엄격한 얼굴과 그 꽉 다문 입매를 그려볼 수 있어.     


*

이혼 서류를 접수한 다음 D는 집을 떠났다가 이틀 만에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 벤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얼굴은 뼈가 그대로 드러날 만큼 여위어있었다. 원망도 복수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하고자 하는 일을, 우리의 삶을 분리하는 일을 원활하게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미안해.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방바닥에 그의 눈물 방울이 고였다. 나는 말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니. 어떻게 나와 쌓아온 일상 대신 그 사람과 육체적 관계를 택했니. 어떻게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해한다. 용인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다. 하찮은 충동 때문에 가장 사랑했던 것을 망가뜨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더이상 D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

반면 D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JR과 그러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잘 실감이 안 났어요. 그저 원만하게 매듭짓고 다시 자기와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감정적으로 그 사람을 자극하면 자기한테 알릴지도 몰라서 겁이 났어요. 자기한테 혼나기 싫었어요. 싸우기 싫었어요....”

엉엉 울면서 매달리는 그를 뿌리치기 쉽지 않았다. 엄마를 찾는 아이를 버리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잠에서 깨어나서 혼자 집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공포, 엄마도 아빠도 모두 일터로 떠났고 나 혼자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밀려오던 숨막히는 외로움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말한다.

“JR은 가정 형편이 어렵지 않니? 네 직장 월급은 내가 빤히 알잖아. 그쪽 아버지가 수술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나한테 이런 돈을 줘도 괜찮은 거야?”

“잘 모르겠어요.”

“너희 부모님은 어때? 우리 결혼하면서 네가 가져온 돈, 어머니와 아버지가 힘들게 모았을 텐데. 형이랑 너랑 결혼한다고 어머니가 오래 살았던 정든 아파트도 팔았잖아. 그 돈을 나한테 다 넘겨도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돈 얘기 했을 때 부모님은 별 말씀 없으셨어요.”

“네가 너무 불쌍해. 정말 네가 불쌍해.”     


*

얼마나 많은 일들이 빠르게 과거가 되는지 모르겠다. JR이 천만 원을 제시하기에, 나는 이천만 원을 달라고 했었다. 천만 원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천만 원은 어떨까? 속이 좀 쓰릴까? 돈 마련한다고 고생할까? 그러면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할까? 변호사와 상담했을 때 JR을 상대로 이천만 원 정도의 배상금을 예상하고 민사소송을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셋이 만나고 돌아온 후에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D에게 D가 감당해야하는 몫의 후회가 있는 것처럼, JR에게도 그 몫의 후회가 있겠지.

나는 결국 며칠 후에 JR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에게 돈을 더 주지 않아도 된다고. 저임금 직장에서 힘들게 번 돈일 텐데 받는 마음이 편하진 않다고. 악연은 이쯤에서 끝내자고. JR은 ‘그게 민정씨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면 그렇게 진행하시죠’라고 답장했다.

바보야, 내 마음이 편하자고 이러겠니? 나는 네가 급하게 돈 마련한다고 사채를 쓰고 성매매 업소에 가게될까봐 걱정해서 그랬단 말이야. 당장은 아니라도 그 길의 초입으로 내가 밀어넣는 걸까봐. 한국 사회에서 돈이 필요한 여자의 몸이 얼마나 취약한 위치인지 알기 때문에. 이게 페미니스트로서 내 윤리란 말이야. 짜증이 나다가도 더 무슨 대화를 나눌까 싶어서 문자 창을 닫는다.


D는 한 쉐어하우스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쉐어하우스 입주 계약서를 검토해줬음 좋겠다고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가 지금 나한테 의지하면 안 되지 하다가도, 네 모습이 떠올라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기 싫어요, 자기랑 떨어지기 싫어요.’ 통곡하던 네 모습.

이제 어느 정도 길이 정해지고 정리가 된 것이다. JR과 내가 더 연락할 일도 없고, D는 재산을 나에게 넘겨주고 독립하고. JR과 D의 인연이 더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D는 JR과 함께 만나곤 했던 지인 그룹의 두어 사람에게, JR과 외도를 했고 지금 협의이혼 중이라고, 앞으로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아마 이 사건은 D가 다니던 직장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똑같이 스캔들에 휘말려도 남자인 D보다 여자인 JR이 감당할 수치심의 크기가 클 것이다. 이 사실이 또 화가 난다.


D와 JR을 떠올리면 참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한없이 떠받들고 귀찮을 정도로 애정 표현이 잦았던 D, 새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줄 아는 D, 나를 속이며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만들었던 D.


JR도 마찬가지다. 연극적일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단호한 말투로 말하는 JR,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싶고 미안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는 JR, D를 많이 의지했다는 JR.


여기서 나는 어떤 인물인가? 나는 나라는 사람을 가장 모르겠다. 구속하는 아내가 될까봐 겁먹다가 기만당한 아내. 다른 아내들처럼 남편한테 집착하지 않는다고 자만했던 아내. 이혼한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실패자이고 나는 행운의 별의 수호를 받는 사람이라고, 삶의 어떤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던 여자.

페미니즘에 눈뜬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남자를 사랑하기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D라는 한 인간과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 비혼 비출산을 외치는 목소리에 공감하고, 기혼여성은 가부장제 부역자라는 소리에 위축이 되면서도, 아무리 내가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도 내 삶을 검열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여자.

‘저렇게 드세게 할 말 다 하면서 살더니 남편이 바람피울 줄 알았다’

‘아직도 남자에게 희망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을 보고 깨달아라’

두 가지의 이야기 다 그 사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여자. 내 삶을 파편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나라는 사람의 삶은 어떤 주장의 사례도 아니라고 지금도 소리치고 싶은 여자. 이 생각 뒤에 밀려오는 초라한 기분을 감당하는 여자.

‘상간녀’를 욕하고 남편을 감싸는 그 숱한 아내들을 비웃으면서 나는 그렇게 안 산다고 우월감을 느꼈던 여자. 배우자의 외도를 덮고 산다면 남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 겁내는 여자.

이 여자가 나인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실감 나지 않는 상태로 평생을 살다 가는 건가 싶다.     


마지막 문단을 2020년 4월 1일 작업실에 앉아서 쓰고 있다. 내가 내 삶을 편집하고 해석할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쓰고 있다. 유일하게 실감 나는 일은 이것이다. 글 쓰는 것. 나는 다른 무엇도 아닌 글 쓰고 있는 사람이다. 배윤민정이라는 인물에게 들이닥치는 사건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471778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