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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윤민정 Mar 06. 2021

담요 한 벌

에세이스트 B씨는 종종 한밤중에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잠시 앉아 있었던 줄로만 알았는데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가 종종 빠져드는 상태였다.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술기운이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게 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의 사고는 늘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 끝에서 마주치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과연 왜 살아야 하는가?"


B씨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생명체로서의 자기보존 본능을 제외한다면 굳이 번거롭게 생을 이어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몇 가지 삶의 조건, 다시 말해서 집과 사무실 계약, 출판사와의 계약 등등이 단기적으로 그를 이 자리에 묶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죽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때면 B씨는 느닷없이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마치 인류 최초로 삶의 비밀을 꿰뚫어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삶이 괴롭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요모조모 따져봐도 사는 게 더 나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택한다는 발상이 B씨를 고양시켰다. 역시 나는 똑똑해. 나는 강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어. 추진력과 결단력이 있어. B씨는 자기 머릿속에 포말처럼 터지는 자살 사고에 매혹되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얼마나 전형적인 주정뱅이의 모습인지 그 자신만 몰랐다.



B씨는 지금까지 하나의 비전을 좇으며 살아왔다. 아주 평범한 비전이었다. 가족을 만드는 것. <심즈>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에 빗대어서 얘기하자면, 그는 '가족' 야망을 추구하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심즈>에서 캐릭터를 만들면 '가족', '인기', '로맨스', '지식' 등의 야망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가족' 야망을 선택한 캐릭터는 배우자와 금혼식에 도달하고 아이는 열 명, 손주는 스무 명쯤 있는 삶을 원한다. 이보다 스케일은 작았지만 B씨의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을 만들면 비로소 마음을 다 놓고 잠들 수 있으리라. 마음 깊은 곳에 뚫린 구멍이 메워지리라. 그는 눈이 펑펑 오는 크리스마스에 벽난롯가의 소파에 앉아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트리 아래 쌓여 있는 선물을 풀어볼 것이다. B씨가 문득 어깨에 닿는 손에 고개를 들면, 사랑과 감사에 가득찬 표정의 배우자와 눈이 마주칠 것이다. 이내 모두가 얼싸안고 이 행복에 도취되어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강력한 판타지로 B씨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삶이 달려가는 기차라면 석탄을 태우는 연료 칸이 이곳이었다. 그는 조금만 더 견디면 나에게도 가족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동력 삼아서 이십 대를 보냈다. 그는 가끔 창문 너머에서 엄마와 아이가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가족만 만든다면 다시는, 세상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이 나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슬픔에 빠지지 않겠지.



애석하게도 현실에서 B씨의 결혼은 이 꿈이 실현 불가능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차별을 맞닥뜨렸을 때 크게 분노했다. 이 분노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도 했지만, 그 격렬한 감정의 밑바탕에는 유아적인 배신감이 깔려 있었다. 예컨대 그는 시가에서 '아내'나 '며느리'로 자신의 존재가 해석될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이 생기면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게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평생 기대해왔던 것이다.


'왜 당신들은 가족이라고 하면서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서 나를 바라보지 않지? 왜 내 꿈을 방해하지?'


어떻게 보면 그가 배우자와 시부모에게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군주가 요구하는 절대적 충성심에 가까웠다. B씨는 시가에 갔을 때 모두가 일렬종대로 서서 손뼉치기를 바랐다.


"B님, 우리와 가족이 되어주셔서 기뻐요!"


"우리 모두 B님을 사랑해요."


"B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요."


B씨는 할 수만 있다면 배우자와 시부모의 몸에 솜을 집어넣고 꿰매버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단추 눈을 달고 검은색 실로 웃는 입 모양을 박음질해 넣었으리라. 이런 상상의 장면이 B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 그는 묻는다. 다른 방식의 사랑은 뭘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


그에게 가족 관계는 전부가 아니면 무였다. 함께 있는 시간이 100% 행복하지 않다면 관계의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가 배우자의 외도를 알았을 때 날이 밝자마자 법원에 달려가서 이혼 서류를 접수했던 것도, '온전한 사랑'이라는 환상이 그의 결혼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씨는 시간을 돌려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확신에 쓴웃음을 짓는다. 이제 그의 환상은 깨어졌다. 가족이라는 집단의 사람들 안에서 쉬겠다는 꿈. '마음을 다 드러내되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영구불변한 관계'. 그는 이것이 가족은 물론이고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구현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있다. 요즘 그는 자기 안의 이 끔찍한 결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는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생각한다. 나는 도넛이야. 반죽 단계에서 구멍 없이 구웠으면 좋았겠지만 어찌 됐건 구멍 난 상태의 도넛이 되었다면, 이 구멍을 애써 메우려 발버둥치는 것보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삶을 돌아보면 기쁨과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 급부가 따랐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곤 말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눈에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이 보였다. 책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면서 베풀기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론 글쓰기는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였다. 그가 사랑하고 경외하는 작가들은 눈앞에 있는 이 책에 자신의 삶을 다 내어줬고, B씨는 그들의 책을 담요처럼 덮으면서 살아왔다. 그가 늘 누워서 책을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몰랐다. 유년을 보내고 나이가 들면서 B씨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위로해준 사람들처럼 담요 한 벌을 짜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성실하고 강한 사람만이 타인에게 자신을 줄 수 있을 텐데, 그는 구멍을 두려워하는 도넛에 불과했다.



물론 모든 책이 B씨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밤에는 오히려 책 앞에서 더 외로워졌다. 때로는 세상에 위로와 공감이 너무 많아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다정한 응원의 말이 넘실거리는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면 B씨는 자기 혼자 문 밖에 서 있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문 안쪽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그는 주먹을 꽉 쥐고 겨울 바람을 맞고 있다. 아무도 B씨에게 서 있으라 시킨 사람이 없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인데도 심술에 가득차서 그러고 있는 것이다. B씨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줄은 알지 못하지만, 최소한 저 문 안에서 웃고 있는 치들보다는 지적으로 우월하다 믿으면서 그 착각에 기대어서 꼿꼿이 버틴다.


'나만은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고 속지 않는다.'


그는 문 안쪽의 죄 없는 이들을 힘껏 미워하면서 다짐한다.


'내가 단 한 숟가락이라도 세상에 희망을 더하나 봐라.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오손도손 손 잡고 서로를 위로하나 봐라.'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B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예쁜 미소는 아니고 이기죽거리는 표정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비웃고 싶은 기분을 참을 수 없어지면 그제야 B씨는 슬그머니 책상 앞으로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웃음과 코웃음으로 만들어진 이 담요는 추위를 막는 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이 서늘한 감촉이 그의 체질에 맞았다.


그는 여전히 거리에 서서, 담요를 계속 만들어가는 게 나을지 자기 존재를 없애는 게 나을지, 무엇이 궁극적으로 추위를 이기는 방법인지 고심 중이다. 우리는 집 안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B씨의 부질 없는 시위를 지켜보자. 행여나 선한 마음으로 핫팩이라도 갖다 주려 한다면 단념하는 게 좋다. 얼어붙은 몸에 따뜻한 것이 닿는 순간 B씨는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는 이렇게나 고집불통의 까다로운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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