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며칠 전 작업실에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아이 씨, 정말 이럴 거야? 아줌마, 아줌마!”
밖을 내다보니 한 남자가 길에 서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작업실이 이 층인데도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 아줌마가 진짜…”
몇 번이나 ‘아줌마’가 욕설로 쓰이는 것을 듣다가 나는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서 남자의 앞에 도착한 다음 말했다.
“조용히 좀 해주세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데 방해됩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이봐요. 조용히 좀 하시라니까요.”
나는 다시 말했다. 여전히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지금 팔을 뻗어서 남자의 몸을 건드리면 싸움이 벌어지겠지.
“조용히 하세요.”
다시 말했지만 그는 끝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자신의 눈앞에 누가 나타나서 말을 시작하면 저절로 시선이 가지 않나?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그 적극적인 무반응에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를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통화 소리는 계속됐다. 그에게서 한 발 한 발 멀어지는 동안 이 느낌이 아주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도, 입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경험. 내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느낌. 살면서 계속해서 이런 진공 상태를 맞닥뜨려 왔다는 기시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을 받는 순간 곧장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치곤 했는데 이제는 분노의 감정이 천천히 찾아왔다. 이러한 순간이 나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며 여성 집단의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에서 오는 슬픔이 내 감정의 속도를 늦췄다.
어떤 사람들은 눈과 입을 타고 나는 걸까?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들의 시선과 발언은 시선과 발언으로 인정받을까?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눈과 입을 빼앗겼다는 박탈감 속에 살게 되는 걸까?
그와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길에 서서 ‘아줌마’라고 쩌렁쩌렁 외치는 남자인 너, 투명 인간처럼 서 있다가 사라지는 나. 이 남자와 나는 팔 하나 길이만큼 떨어져서 서 있을 뿐이었지만, 이 거리를 좁히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 같았다. 그와 나 모두 죽은 다음 공평하게 잿더미가 되기 전까지는.
이 막막함은 D와 함께 사는 시간 동안 종종 나를 덮쳐오는 감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감정에 형상이 있었다면 눈으로 지켜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 같은 물체가 두 사람 사이의 절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뒤늦게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가 이내 그 팔을 떨어뜨린 다음 말할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야. 이것이 현실의 한계야.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작가 노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제가 남긴 일기라든지, 책에 싣지 않은 조각 글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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