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싸 들도 나름 열심히 산다고요 허허
이제 곧 2020년. 캐나다 생활 6년 차에 접어들어가는 시기. 잠깐 지난날의 천유경을 되돌아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2020년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아싸(아웃싸이더)님들께 존경을 표하며, 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당신들에게 적적한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나에게 있어선 한국에서 보낸 유치원 시절, 초중학교, 그리고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보낸 1.5년은 매일 암흑 같고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항상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뛰어난 재능이나 관심 있는 분야조차 없었으니 학교 가는 매일이 생지옥이었다. 학교 성적이야 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도 한국에서의 고졸은 어쩌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그리고 한국에 거주하는 한 명의 학생이라는 신분의 인간으로서 나는 최소한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고만고만하게 삶을 견뎌왔던 거 같다.
지루한 학교생활과 입시의 압박에 굴복한 내 순두부 멘탈로 인해 나는 고등학교를 자퇴하며 이 당돌한 행동에 대한 일종의 도피처이자 대안으로써 중국 유학을 충동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하하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생의 개고생이 시작된다. ‘니하오’만 알고 갔는데, 18살에 중국어를 바닥부터 배운 실력으로 2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 중국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정말 치열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다 진짜 빨리 죽겠네라는 생각을 거의 매일 했던 거 같다. 나를 너무 채찍질을 한 탓일까,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거 같다며 학교에서 그다음 날 나를 바로 한국에 보냈다. 나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한국으로 반송당했다. 부산백병원에서는 내가 급성 사구체신염에 걸렸다며 학업을 해외에서 당장 중단하고 한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중국 유학생활 만 7개월 만에 나는 19살의 아무 플랜 없는 중졸자가 되어있었다. 내 인생에서 아마 제일 큰 충격이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지 않았나 싶다. 부모님은 직장 가고, 동생은 학교 가고, 할머니는 장 보러 밖에 나가 있을 때 나는 아픈 몸으로 철저하게 ‘한국 루저의 삶'을 체감했다. 신장이 안 좋으니 오후만 되면 거의 반 시체가 되어있었다.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니까 엄마랑 같이 부산에서 꽤 알아주는 입시 및 재수 전문학원에 갔었는데 거기 계시는 상담실장님이 “아직은 한국이 검정고시에 대한 시선이 안 좋으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본인의 이율에 반하는 발언을 하셨다. 몇 년이 지나서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티브이에 나올 정도로 꽤 유명하신 분이었다. 역시 난 인복이 있나 보다.
엄마와 나는 또 다른 멘붕에 부딪혔다. 검정고시학원조차 나를 거절하다니. 오 마이 갓. 나는 그 당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동시에 겪었던 거 같다. 가끔 부모님이 없을 때 부엌에 있는 칼에 의지해 그냥 인생을 마감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억제한 적도 많았다. 어렸을 때 어떤 목사님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난 이미 제세상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영향으로 반강제로 들었던 일요일 아침 설교말씀에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이런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겪으면서 나는 신을 많이 원망했다. 신은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만큼만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왜 나를 아직 모르시냐고 투덜거렸다.
절망적인 여름을 보내던 중 우연히 한 친구가 ‘외국어 고등학교'에 지원해보는 게 어떻냐고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음. 엄마랑 나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중국 국제학교에서 항상 영어는 전교에서 최상위권이었고, 중국어 급수 자격증도 7개월 만에 턱걸이로 통과한 게 있었고, 한국 인문계 고등학교 성적도 중상위권 이상은 되었으니까. 나는 참 운이 좋았다. 내가 그토록 선망했던 부산외고에 2학년 2학기로 중국어 특기자 전형으로 운 좋게 편입을 하게 되었다. 전교에서 그 해 편입생은 나 한 명이라 솔직히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영재들과 수재들 사이에서 나는 약 1년 만에 수능 준비를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학업 도중에 중국에 가버려서 고등교과과정을 처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학교 수업과 과외로 주말에는 학원 수업 그리고 짬을 내어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그렇게 최선을 다한적도 그리고 학교생활을 즐긴 적도 없었던 거 같다. 똑똑하고 편견 없고 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어울리며 너무 즐겁게 학교를 다녔었다.
하지만 수능의 압박인지 내 IQ의 한계인지 내 수능은 완벽하게 망했었고 엄마가 원서를 넣어서 타의에 의해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이왕 간 거 영자신문 동아리 활동도 하고, 봉사활동, 알바 활동, 영어회화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4.44/4.5의 성적도 받는 적이 있다. 항상 외로웠지만 연애를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거 같다. 한 시간씩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백 퍼센트의 효율을 위해 5시간 잠자는 시간 뺴고는 항상 바빴던 거 같다. 심지어 하루에 4시간씩 비싼 강의료를 내고 편입학원도 몇 달 다녔었다. 야망도 엄청나서 천만 원 버는 외국계 다국적 회사에 일하는걸 꿈꿔왔었다.
그 짓을 일 년 반쯤 하다 보니 엄청난 허무감과 무력감 그리고 번아웃이 나를 덮쳤다.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번아웃이 왔으면 잠깐 쉬어가면 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내 자아를 건드렸다. 바로 나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대기업을 목표로만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는 스펙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 깨어있고 열려있는 ‘나'라고 믿으며 살아왔는데 나도 환경에 영향을 받는 어쩔 수 없는 일개 사회적 동물이구나를 자각하는 순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그 중심에 서있는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뭔가 획기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나도 그냥 한국사회라는 틀에서 부모님이 그리고 타인이 욕망하는 ‘가짜 천유경’을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자신을 학창 시절의 우울하고 불행했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실수를 저지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차피 한번 겪어봐서 이미 알지 않는가. 자타공인 '나'라는 사람은 이미 한국사회에 쉽게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는 걸. 거기에 대한 돌파구로 한국에 자리 잡은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내가 가진 학력과 스펙으로는 역부족일 거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또 한 번의 자퇴를 하고 연고지 없는 캐나다에 혼자 왔다. 2014년 6월 18일에. 그리고 오늘은 2019년 12월 19일. 사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다. 퇴근 후 참을 수 없는 심심함이 몰려올 때 펭수를 보거나 브런치를 뒤적거린다. 지금의 리쿠투터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생존을 위해서 여기서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직종의 일을 다양하게 해 본 거 같다. 과연 직업의 귀천이 생존보다 중요한가? 먹고살기 위해 땀 흘리며 일한 다건 정말 고귀한 일이다. 아싸인 내가 그나마 주체적으로 선택한 고생길이라 나름대로 만족하며 산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그러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한국에서 그동안 나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 다뤄왔음을 가끔은 정말 지독하게 지루한 캐나다 생활을 통해 꺠닫는 중이다. 어쨌든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조금이나마 '진짜 천유경'에 가까워지는 2020년을 기대해본다. 아싸 (아웃싸이더) 들이여 당당하라. 그대들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