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를 나왔습니다만, 영어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영어가 필요한가요?

by 천유


'다 인연이 있는 거야. 때가 있는 거고.'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수없이 쓰면서 깨달았다. 어떤 수업에서도 배울 수 없는 채용사이트와 이력서, 면접을 바닦까지 싹싹 긁어가며 온 몸으로 부딪혀 깨우친 진리였다.


똑같은 이력을 가지고 비슷한 자소서(개인의 자소서가 비슷한 질문에 얼마만큼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를 내면서도 어떤 시기에는 정말 너무나 잠잠했고, 어떤 시기에는 거짓말처럼 잘 나가는 연예인 행사 뛰듯 오전, 오후 심지어 시간대가 겹치기까지 했다.


"아. 그날요? (가만있어보자, 겹치는데? 어디 면접을 가볼까?)"


정말로 그랬다. 그러니까 다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거다. 내가 잘났고 못났고 문제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당시에는 4대 보험, 주 5일 근무, 9-6 근무 등 기본 조건만 맞으면 무조건 지원했다.


당연히 채용공고를 보는 요령도, 지원서를 쓰는 것도, 면접을 보는 노하우도 나름의 원칙과 규칙 같은 게 생겼다.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반면, 몸으로 부딪히면 원치 않아도 매뉴얼 같은 현장 노하우와 본능적인 감각 같은 게 생기는 법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소개팅을 나가듯 면접을 즐기게 됐다. 너만 나를 떠보는게 아니라, 나도 널 간보러 온거다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나에게도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두려운 그 질문은 항상 서두가 똑같았다.

"영문과 나오셨네요?"
"네...(아... 올 것이 왔구나.)"
"영어 잘하시겠어요?"
"아니요. 잘하지는 못 합니다. (내가 지원한 업무랑 영어가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면접관들은 잘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례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겸손은 한국인의 미덕이니까. 진짠데.. 진짜 못하는데.


영문과 출신의 '남다른 영어능력'을 궁금해하는 이들의 공통된 질문은 바로 이렇다.

1) 자기소개 좀 영어로 해보시겠어요
2) 지원동기 좀 영어로 해보시겠어요?
3)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어로 해보세요.


처음에는 안 되는 영어를 더듬더듬해보았다. 그런데 정말 형편없어서인지 다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굳게 마음 먹었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도 아니고

'회화학원 수강증 내가 당장에 끊지'가 아니라

'응, 안 해. 어차피 나 안 뽑을 거잖아. 안 해'라고.

영어가 필요한 업무가 아니었다. 내가 지원한 업무는 단 한 번도 영어가 필요한 업무가 없었다.


당시 내가 느끼기엔 그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면접관들은 의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에서 생긴 반발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들의 구경거리가 아니야. 정말 꼭 필요한 것만 묻고 확인해.'


물론 같은 값이면 당연히 나라도 다홍치마다. 결론적으로 내가 아주 영어를 유창하게 잘한다면 가산점을 받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영어 실력자가 아니었다.


여행지에 가서 화장실을 못찾아 개망신 당하지 않을 정도였다. 입사해서 내가 영어를 쓸 일도 없지만, 절대 영어로 돋보여서 뽑힐 사람도 아니라는 주제파악이 제대로, 상황파악이 업데이트 됐다.


왜, 영문과를 나와서도 돋보일 수 없냐고?


최근 들어 영어를 너무나 유창하게 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졌다는 점. (심지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나는 영어권 나라를 단 한 번도 여행조차 가보지 못한 영문과 졸업생이라는 점. 토익시험조차도 취업준비도 아닌 퇴사 후 어느 날 꾸역꾸역 한두 번 본 영어 기피자라는 것.


그런데 반해 내가 앉은 이 자리엔 이미 유창하게 영어솜씨를 뽐내고 간 다른 지원자들이 휩쓸고 갔을 테다. 그렇지 않다면 나 이후의 지원자들이 그럴 테지. 최소 1~2명 이상. 다들 취업준비로 영여스터디, 토익학원은 다니니까.


거기서 어줍잖은 영어 말하기? 가산점은커녕 사람 우스워보이기 십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신 안볼 사인데,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로 했다.
나름 비장한 결심이었다.
뽑히기 위해 뭐라도 해야하는 자리에서
시키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사실 내가 원래 영어를 기피했던 것은 아니다. 영어를 너무나 좋아했다. 심지어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영어를 너무나 사랑했다.


파닉스를 끝내자마자 이 이상한 언어를 활용하고 싶어 벼르다 해외 펜팔을 시작하기도 했다.


팝송이 너무나 좋았고, 그렇게 사랑에 빠진 영어 덕분에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물론 모의고사, 수능까지 싹 다 만점, 혹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당연히 영문과를 갔다. (외국계 음반회사에 취직하고 싶었었다.)


그렇게 간 영문과에서 어마어마한 한국 친구들을 만났다. 나와 같이 수능을 본 그 한국 아이들은 영어를 미국사람처럼 했다.


갓 스물,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동일선 상에서 시작한다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입학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신경이 안쓰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이었나보다.


대학 입학 이후 영어회화 첫 중간고사.


앞에 나와 자유롭게 자기소개를 하는데 속으로 백번을 넘게 생각하고 외우고 되뇌였던 말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쉬운 마이 네임, 마이 패밀리가 기억이 안나다니. 그야말로 백지상태가 되었다. 거짓말처럼 입이 굳어버렸다.


딱풀을 입에 문 것처럼, 정말. 기가 막히고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식상한 '마이 네임 이즈'를 겨우겨우 넘기고 '마이 패밀리'를 시작할 차례였는데 공교롭게도 'my father'에서 얼었다. 얼음!!!!!!

"my father.. my father...m...y......fa....the...er ...(으흐흐흑)"



땡. 땡하란 말야. 제발ᆢ이란 내 안의 간절한 외침은 눈물보를 터트렸고. 순식간에 강의실이 술렁거렸다.


맞은편 얼음장 같기로 소문났던 jenny 교수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그리고 한국말로 애처롭다는 듯, 안쓰럽다는 듯 버터를 묻힌 한국말로 나를 토닥였다.

"oh..shia.....괜찮아. 괜찮아."
"I'm sorry.........(어흐흐흐흐흑)"


민망해서 더 크게 울음이 터졌다. 친구들도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하필 울음을 터트린 그 기가 막힌 타이밍이 하필..'my father'. 다들 나의 아빠가 이 세상에 안 계시거나, 크게 편찮으신 줄 알았단다. 모두 단단히 오해했다. (아빠, 미안!)

그렇게 입도 못 떼었던 나의 영어회화 중간고사는 동정표를 받았는지, 기말을 잘 봤는지 C+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 후로 '어디 한번 보자'식의 평가받는 자리에서 영어 말하기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영어를 못하는 영문과'는 나의 콤플렉스로 단단히 자리잡게 됐다. (근데 영문과는 주로 오래된 영국문학을 탐구하는 과랍니다. 영어회화과가 아니라.. )


무튼 그렇다 보니 나름의 냉정한 평가 끝에 '나는 영어로 내세울만한 구직자는 아냐, 나는 당당함이 내 무기지.'라는 면접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고, 면접장에서 영어를 하지 않고도 이런저런 취업이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영문과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시한폭탄이 가슴에 심어져 있는 것과 같았다. 언제든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영문과 출신은 취직을 해서도 걸핏하면 "영문과 나왔잖아. 영어 잘하겠네."라는 순간을 자주 직면해야 했으니, 영어가 필요하지 않는 업무를 하고, 영어를 하지 않는 일상에서도 혹시라도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떠나 늘 조마조마하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콤플렉스를 날려줄! 쿨내의 상징!! 나이스 가이인 '그'가 나의 면접 인생에, 구직 인생에, 그리고 직장생활에 나타나 큰 획을 긋게 된다.


전문지 경력기자 면접이었다. 3명의 면접관이 배석했는데, 국장은 정신과 의사 출신이었고, 나머지 둘은 조선일보 등 출신의 베테랑 기자이자 차장이었다. 쿨가이, 나의 멋진 남주는 바로 국장이었다.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금테 안경을 쓰고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어디서 많이 본 눈빛으로 예리하게 훑더니 쓱 내뱉는다.

"영문과 나왔네?"
"(아...... 망했다..) 네......................"


수많은 면접장을 누비며 온갖 면접관과 맞대응(?)하며 탄탄히 쌓아올린 자신감과 당당함이 땅으로 꺼질 새도 없이 공중에서 증발돼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이젠 시켜도 안 하기로 마음 먹었으면서.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릴한다.

"영문과, 영어 못하잖아?"
"(뭐?????? 그걸 아세요?????) 네!!!!!!!"


할렐루야!!!!! 그렇게 당당하게 대답할 거린 아니었는데, 너무나 반가웠다. 아시는구나!!!!!

싶은 마음에 울 뻔했다. 그동안 영문과는 다 영어를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국장은 나머지 차장 둘을 보며

"우리가 영어 할 일은 별로 없어. 영어 필요하면 영어 잘하는 애, 하나 데려가면 되지."
"그렇죠"


차장 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이 회사에 꼭 취직하고 싶어졌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알아봐 주고, 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회사! 그래, 이거지!!


해피엔딩, 나는 단 한 명을 뽑는 면접에서 합격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해 최선을 다해 근무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생각한다.


'그래, 모든 업무가 영어가 다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싶어.


이런 나를 알아봐 주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싶어.

잘하지도 않는 영어를 잘하는 척 꾸역꾸역 연기해서 취업해서도 죄인처럼 사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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