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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Jan 30. 2023

아나운서로 태어날 내토끼에게

착한 동물은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수년 전, 나는 토끼를 한 마리 키웠었다.

모피로 쓸 만큼 털이 고운 '더치헤드' 종이었는데, 달마시안이나 젖소처럼 흑백의 점박이가 있는 아주 귀여운 수컷토끼였다.

어쩌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키운 토끼였지만, 동물병원에서도 놀랄 7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다보니 이런저런 추억이 정말 많다.




토끼는 말을 못 한다.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표현한다. 개도 고양이도, 울음소리로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데 토끼는 소리를 내지 못하니 말이다.

하지만 녀석도 의사표현을 한다.

가령 장난을 자주 치는 동생이 가면 군기 잡힌 인형처럼 굴고,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아빠가 옆에 가면 그 예민한 귀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피차 서로 관심 없고 아쉬울 것 없는  소 닭 보는 듯한 관계다.

내가 가면 주변을 빙글빙글 깡충깡충 뛰었다. (토끼가 상대를 좋아한다, 신이 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엄마가 가면 정말 엄마인 것처럼  아가처럼 편안하게 품에 안겨있거나, 귀여워해달라는 듯 코를 내밀고 가만히 있는다.




아주 웃기고 단순한 녀석이었는데, 태어나서 토끼를 본적은 물론 개, 고양이를 본 적도 없는 녀석을 동물병원에 데려갔더니. 신기하다는 듯 제 몸집의 5배는 될법한 큰 개를 신기하는 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개의 엉덩이를 앞발로 툭 친다.


"왕- 왕왕"


크게 짖는 게 당연하다. 얼마나 황당할까. 그 개는. 당돌하고 겁이 많은 내 토끼는 그때부터 사시나무 떨듯 떤다. 덜덜덜.. (쯧...)

집에 와도 도통 진정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우황청심환을 작게 쪼개줬더니 슬쩍 맛을 보더니 안 먹는다.


"그래?"


동그랗게 굴려 설탕을 살짝 묻혀줬더니 잘 먹는다.


또, 주 푼수 같은 녀석이라 초식동물이면서 삼겹살 굽는 냄새에 크게 반응했고, 건초 편식도 심해 '초롱이'라는 건초만 잘 잡쉈다.

천둥번개가 치면 뒷발을 바닥에 쿵쿵-내리치며 나름의 위협을 가하는 (어림도 없지만) 용맹한 면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엉뚱하고 귀엽고 사랑스런 7년이란 시간을 보낸 녀석의 어느 날이었다.


남자친구랑 놀다가 집에 왔는데 '어라?'


늘어져있다. '아침엔 괜찮았는데ᆢ괜찮았는데!!'


숨은 쉬고 있는데 이미 죽은 것처럼. 동물병원으로 녀석을 안고 막 뛰어갔다. 병원에 도착해서 수의사 선생님을 봤을 때 숨을 거뒀다.

동물이지만, 가까이서 처음 겪는 죽음은 너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한동안 생각지도 못한 순간 눈물부터 흐르는 일이 잦았다. 특히 회사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내 의지와 또 모든 상황도 무관하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누수가 생겼다.


"우리 돈 모아서
토끼를 한 마리 사줘야 되는 거 아냐?"


회의 때 팀내부에서는 심각하게 논의가 이뤄졌고,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타 부서 차장님은 내게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토끼일은 유감입니다."


그런 그리운 녀석에게 생전에도, 죽은 뒤에도 내가 자주 얘기해 준 말은 "다음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꼭 아나운서가 돼"였다.



내 목소리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하고 살았으면 했다.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코와 가슴이 동시에 아프다.




어제 도서관에서 우연히 엘렌 심 작가가 쓴 <환생동물학교>라는 책을 봤다.  

제목을 보고 뭔가 싶어 쓱 넘겼는데,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만화책 형식이라 쉽게 읽혔다. 내용도 더 쉽게 마음을 두드렸다.

책이 이야기하는 골자는 착한 동물들은 다음 세상에 인간이 된다는 점이다. 환생하기 전에 우선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생전의 동물적 습성을 모두 지우는, 인간으로 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늑대소녀의 이야기를 들며 학교에서 책임감 있게 교육하지 않으면 그런 습성이 환생 후에도 남아 아이들이 다음세상에서 적응에 곤란을 겪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러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고 감동을 주지만,  그중 저마다의 동물들이 주인이 자신들이 없어 곤란해하고 힘들어할까 봐 걱정하고 울고 있는 장면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내가 신문을 물어다주지 못하는데ᆢ
우리주인은 신문도 못보고 있는거 아냐?'

'우리주인은 나없으면 산책 못갈텐데'

'내가 아침에 깨워줘야 하는데ᆢ어쩌지??'


순수한 영혼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더 줄 수 없어 마음 아파한다.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모든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하나만, 생각해도 돼.

이제는 그래도 돼.
너희들이 충분히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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