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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May 04. 2023

아빠부자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빠부자다.

“큰아빠가 왜 큰아빠인줄 아냐?”


“혹시라도 아빠가 없으면
아빠 대신 아빠가 될 사람이야.

그래서 큰아빠, 작은아빠.
아빠라는 이름이 붙는 거야.

그렇게 알고
큰아빠, 작은아빠에게 잘해야 한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봄,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앞둔 전날이었다.


그 정신없고 바쁜 날, 뜬금없이 동생과 나를 거실에 불러다 앉혀놓고 묻는 아빠의 말이 당시에는 와 닿지 않았다.


흔히 하는 말로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나이보다 다소 조숙하고 현실적이었던 나는 ‘아빠가 아빠지, 아빠가 없으면 우리가 어리니 친척이 돌봐는 주겠지.’ 정도의 마른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이튿날, 우리가족은 육지 끝에서 세로로 쭉 길게 거슬러 이사를 갔다. 이삿날은 어수선한 새집을 대신해 아빠 바로 위의 큰아빠 집에서 잠을 잤다. 전학 간 학교의 첫 등교는 엄마가 초등학생인 동생의 학교에 함께 갔기에, 나는 큰아빠의 차를 타고 큰엄마의 손을 잡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조카의 첫 등교를 위해 반짝반짝 광을 낸 큰아빠의 까만 차, 밝은 주황색 투버튼 원피스를 차려입은 단정한 상고커트 머리의 키다리 큰엄마, 그리고 낯설지만 두렵지는 않았던 당돌했던 열네 살의 나.


아빠만큼이나 무뚝뚝했던 큰아빠는 살갑게 말을 먼저 걸어주는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내가 인천으로 이사 간 뒤로는 해외출장을 가실 때면 동갑인 사촌여동생의 선물과 함께 내 것도 똑같은 것을 하나씩 더 사오는 속이 깊은 분이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가 스물여덟. 시집을 가게 됐다.


식을 올리기 전, 집에 아빠의 형제분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던 날이었다.


한분 한분 집에 오셨는데, 큰아빠는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오셨다. 반짇고리세트, 공구함세트, 구급함세트 등. 살림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사지는 않지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오셨다고... 당신 딸이 결혼하면 주려고 어디서 생길 때마다 하나하나 모으신 거라고 했다. 울컥했다.  


180cm가 넘는 큰 체구에 환갑이 넘은 무뚝뚝한 큰아빠의 그날이 아직 나는 가끔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것들을 건네며 보인 큰아빠의 설레던 표정과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혼에 보태라고 축하한다고 건네는 축의금보다도 더 큰 감동이었다. 내색하기를 쑥스러워하는 나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큰아빠에게 그깟 감사하다는 간단한 말조차 못한 바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한 부유한 무엇을 가진 양 너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은 두고두고 오래 남아 요즘도 생각이 나면 신랑에게 자랑을 한다.  


“우리 큰아빠, 참 귀여우시지? 나이도 많은 남자어른이, 그 큰 사업을 하는 분이.. 세상에 그걸 어떻게 다 모아서 가지고 오셨지?”  


중학생이었던 나도 이제
어른이 됐다.


살면서, 또 나이가 들면서 새삼 느끼는 건 옛말, 어른들 말씀 틀린 게 정말 없다는 사실이다.


때론 돈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말. 그리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형제만큼 귀한 재산은 없다는 말. 가슴에 자주 새긴다.  


우리집은 부자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빠부자다. 나의 할머니는 아이를 일곱이나 낳으셨기 때문이다.


나의 아빠 위로 큰아빠가 세분, 아래로 고모 한분, 작은아빠 두분이 계시다.


일찍이 돌아가신 큰아빠는 요양하실 때 잠자리를 손수 잡아서 건네주던 다정한 분이셨고, 나에게 정말 멋진 사촌오빠를 선물해주신 분이다.


그 다음 큰아빠는 항상 내게 ‘니가 최고다’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없는 곳에서도 ‘그만한 애가 없다’고 내존재 이상을 칭찬해주신다.


그 다음은 무뚝뚝한 모습으로 묵묵히 사랑을 보여주시는 큰아빠, 그리고 우리 아빠.


그 다음은 정 많고 사랑 많은 우리 홍일점 고모.


학창시절 가장 친했던 작은아빠는 말하지 않아도 센스 넘치게 조카의 아쉬움을 채워주시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이셨다.


막내 작은아빠는 아빠가 사경을 헤매던 당시에 온몸으로 뛰어 수술할 병원과 병원비를 걱정해주셨다.


한분 한분 너무나 든든한
나의 큰아빠, 작은아빠들 덕에
나는 아직도 철이 없다.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고.

영원히 그러지 못할까봐 가정의 달을 맞아
용기 내어 글로나마 써본다.

나의 소중한 아빠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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