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배가 좀 부르니 주변 경치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철학의 길 주변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는데 거리는 생각보다 몹시 한산했다.
교토는 사람이 정말 많은 도시였지만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조용한 골목을 마주할 수 있었다. 수국을 말리는 따가운 햇살과 작은 2층 건물들이 만드는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골목은 무척 평화로웠다.
곧 철학의 길에 도착했다. 철학의 길은 은각사 근처 작은 하천을 따라 가로수가 늘어진 작은 골목인데, 교토의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가 사색에 잠기면서 자주 걷던 곳으로 1972년에 정식으로 철학의 길이라는 명칭을 받았다고 한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분위기 있는 명칭 덕분에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등장했다. 걷고 있으면 사색에 빠질 것 같고 괜히 약간은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이 곳을 찾는 모두가 어느정도 이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름이 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철학의 글과 관련된 글귀 중 아래 구절을 무척 좋아한다.
뭐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었어.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 모리미 도미히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6. 호호호좌(서점)에서 추천해준 카페는 휴일이었다. (처음 찾아갔던 아오 오니기리 바로 옆집이었다. 나란히 월요일은 휴일-) 구글맵에서 가까운 카페를 검색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는 평이 꽤 좋았다. "이 카페에 앉아 바라보던 철학의 길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라는 후기를 보고서는 나쁘지 않겠구나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는 작았다. 개인 주택을 카페로 활용하는 느낌이었는데 창 쪽 공간과 부억으로 연결되는 거실이 전부였다. 거실에 놓인 테이블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 두 명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철학의 길을 바라보는 창 근처 다다미방에 앉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나뭇잎과 조용한 골목사이로 내리쬐는 볕이 참 예뻤다. 별 것 아닌 풍경이었는데 별 기대없이 들어섰던 곳이라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친절한 할머니가 내어주신 아이스라떼. 맛은 없었다. 심지어 곁들어져 나온 떡도 맛이 없었다(어떻게 그럴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교토에 간다면 분명히 다시 찾아갈 카페다. 할머니 꼭 계속 운영해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가고 싶어요. 나란히 맛 없는 아이스 라떼를 홀짝이며, 손을 맞잡고,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할 그런 공간이었다.
마지막까지 기분 좋은 미소를 보내주신 할머니:)
#7. 교토의 관광지들은 모두 일찍 문을 닫았다. 빠르면 5시, 늦으면 6시 정도? 철학의 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동하고 싶어서 2시 반쯤 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나왔다.
사진과 같은 경치가 이어졌다. 종종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수학여행을 온 것 같은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교토 여기저기에서 쉽게 이런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을 때우려고 다리위에서 서성이고 있는 듯 했다. 수학여행을 교토로 오다니 부럽구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수학여행으로 경주보다는 애버랜드나 제주도에 가고싶어했다. 저 친구들이 지겨워 보이는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8. 언젠가 가을에 교토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9. 예전에 교토에 왔을 때 은각사를 제일 인상깊게 방문했었다. 그 기억에 다시끔 찾아왔지만 다시 온 은각사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너무 너무 좋았던 곳이니 꼭 다시 가야해! 무조건 가야해!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산책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사진을 찍었다.
언덕길을 오르는건 무척 더웠다. 처음 왔을 땐 이곳에서 무척 감탄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덥구나 덥다 어머 더워.. 라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10. 오래된 건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 사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봐도 봐도 좋았다.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니 비슷비슷한 골목 사진이 무척 많다.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골목 햇살아래 누군가 서 준다면 기쁘게 셔터를 누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낡은 목조 주택은 오래된 상점이었고 호기심에 들여다본 창 너머로는 주인분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티비를 보고 계셨다. 손님이 찾아오긴 할까? 손님이 올거라고 기다리고 있는걸까? 아니면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뿐일까.
걷고 걸어 기온거리에 도착했다. 사진 속 요지야에 들려 친구들 선물을 몇 가지 샀다. 원래 같이 교토에 오고싶어 했던 친구가 요지야 핸드크림을 좋아했던게 생각나서다. 왠지 친구가 더 그리워졌다.
기온거리 안쪽에는 친구가 추천해줬던 "고키나나"라는 카페가 있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이코가 종종 찾는다는 예쁘다던 카페는 생각보다는 현대적이어서 실망했지만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맛 본 순간 물개박수가 나왔다. 짝짝.. 이때는 이미 해가 져서 사진을 찍지 못한게 아쉽다. 보기에도 예쁘고, 맛은 더 좋았던 파르페. 글을 쓰는 지금도 아이스크림 위에 올려져있던 과일과, 바삭바삭 씹히던 씨리얼을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서울 시내에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맛있게 하는 곳을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길었던 첫째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모든 우연한 만남이 예정된 일정보다 즐거웠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