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원체 성격이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이었던 터라 어느 정도의 우울은 나와 항상 함께였고, 심지어 가끔은 그것을 센티하다는 감정으로 포장해서 곁에 두곤 했으니까.
그러나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구역질이 날 때, 지하철 역에서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부터 핑 현기증이 날 때, 출근해서 지문을 찍으면서부터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 그 눈물이 일하는 도중에 눈에서 뚝뚝 떨어져 내릴 때, 회사 옥상에서 아래를 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잠이 들기 전 이대로 영원히 눈을 안 떴으면 하고 바랄 때. 이런 '때'들이 지속되는 나날들은 확연하게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분명히 고장 났고 고치지 않으면 아주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나는 나의 병에 대해 눈치채게 되었다.
사람들의 우울을 위로하고자 하는 책들이 유행처럼 서점에 빼곡히 들어서 있던 시기였다. 아주 화려하고, 대단하고, 남들이 누구나 다 부러워할 만한 사람들도 본인의 우울증에 대해 고백하고 공감받았다. 책 속의 사람들도, TV 속의 사람들도 정신과에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가야 할 것 같았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덕분에 큰 결심이나 용기 같은 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오전 반차를 쓰고 가게 된 정신과의 대기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평범해 보였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신과가 아닌 그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꽤 긴장을 하며 들어간 진료실 안에서 처음 만난 선생님은 다정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같았다. 눈빛도, 표정도, 말투도 다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가 힘드셔서 오셨냐는 사무적인 멘트 한마디에 빗장이 걷혀서 그 안에 꾹 담아두었던 우울들이 겉잡을 새도 없이 터져나왔다. 눈물과 함께.
3년 동안 다닌 회사에서 저를 인정하지 않아요. 개고생 하면서 다녔는데. 신생이던 팀에 들어와서 매출을 이만큼이나 올렸는데. 그리고 다른 팀 사람들은 저를 욕하고 다닌대요. 제 연봉까지 전부 까발려졌어요. 쟤가 뭔데 왜 저렇게 많이 받는지 모르겠대요. 별 거 없는 주제에. 회사 사장 아들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있었대요. 근데 그 사람들 제 앞에서는 웃으면서 말 걸던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회사에 너무 가기 싫어요. 그렇지만 그만두고 나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른 곳에 취직은 할 수 있을까요? 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요즘 다들 취업하기 어렵다잖아요. 그럼 저는 이렇게 매일이 지옥 같은데 참으면서 회사에 다녀야 하나요? 하지만 회사를 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모든 게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요. 낭떠러지 끝에 서있는 것 같아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요.
선생님은 이런 일이 익숙한 것 같았다. 휴지를 건네주고는 많이 힘드셨겠어요, 하면서 또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현재 내 상태에 대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사방이 하얗고 노트북만 놓여 있는 좁은 방에서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상태를 체크해 내려갔다. 중증도 우울증과 불안장애라는 병명이 선생님 입에서 나왔다. 처방받아야 될 약과 부작용을 설명해주는 동안 이제 다시는 내가 살던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약 봉투와 다음 예약 날짜와 함께 병원을 나와서 회사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타서 나는 또 울었다. 회사에 출근하고 나니 나를 이렇게 만든 이 안의 많은 것들이 너무나도 미웠다. 전부 야구방망이로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는 상상을 하다가 옥상에 올라가서는 또 뛰어내릴까 하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먹을 만큼 먹어버린 것 같은 내 나이가 불안했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서웠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불투명한 내 앞날이 우울했다. 빨리 어디로 멀리 도망가지 않으면 영원히 잡혀버릴 것 같았다. 이 우울과 불안에. 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아주 멀고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예쁜 것으로 가득해서 머무는 순간마다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 곳을 원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웅크리고 누워있던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파리 지도였다. 그래, 파리로 가자.
도망칠 장소를 정하고 나자 다른 것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1주일만에 비행기표와 숙소를 구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평소 혼자서는 여행도 가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에, 아주 작은 결정에도 오랜 시간에 걸리는 우유부단함의 극치에, 여행 전에 아주 꼼꼼하게 모든 계획을 세우던 것과는 정 반대의 행동이었다. 아마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함이 나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는 솔직할 수가 없어서 허세를 부렸다. 그냥 다니기 싫어서 퇴사했어. 요즘 1달 살기가 유행이니까 1달 정도 쉬다 와서 다시 취업 준비하지 뭐. 공기업이 평생 직장이라고 하니까 공기업 준비할거야. 우려와 걱정의 말들에는 오히려 반발심이 들었고 나는 그걸 어린애처럼 합리화시켰다. 이미 그런 걱정은 내 안에 한가득이나 있어. 덕택에 지금 죽기 직전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에서 파리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