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a Jul 19. 2019

10. 그 날의 분홍색 공기

파리에서 INFP 2명이 처음 만났을 때 전개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준비해 온 피크닉 준비물 주섬주섬 꺼내서 세팅하기, 돗자리에 앉아서 에펠탑 위로 생기는 비행기구름 멍하니 바라보기, 여행객보다 오래 파리에 머물 수 있는 특권 덕에 탄생한 이야기 공유하기, 노을 지는 풍경 사진 100장 찍기.


파리에서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을 하는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프랑스 관련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이 글을 우연히 읽고, 별 망설임 없이 바로 연락을 했다. 글을 올린 사람이 바라는 것이 나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곳 파리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바로 옆에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오늘 내가 만난 날씨와 풍경을 상상이 아닌 경험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 그건 여기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있는 한국의 친구들과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사님은 이름이 뭐예요? 자기 이름이 성주라고 이야기 한 뒤에 성주는 나에게 물었다. 내 카톡 프로필 이름에 천사 이모티콘이 있어서 그렇게 물어봤다고 했다. 성주 외에도 카톡으로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몇 명 더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천사님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나이까지 말고 그냥 반말할래? 어차피 여기 외국이잖아.라고 했을 때 어떤 망설임이나 되물음도 없이 너무 좋다! 그러자 그럼~이라고 바로 대답했던 사람도 성주가 처음이었다.


성주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어떤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얘기했다. 여자가 센 강을 등 뒤로 한 채 잘 세팅된 피크닉 매트 위에서 와인잔을 들고 있고, 그 배경으로는 에펠탑이 꽤나 크게 보이는 사진이었다. 우리는 그래서 에펠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일 우리의 만남이 별로 좋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에펠탑, 세느 강, 와인, 피크닉. 이 풍경들의 조합은 어떤 별로인 상황도 선물처럼 포장해 줄 수 있는 포장지가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지내왔던 2월의 다른 날들과는 조금 다르게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고, 다른 날과 비슷하게 에펠탑 앞에는 사람이 가득해 혼잡스러웠다. 파리에 온 지 오래되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를 찾느라 조금 헤맸다. 혹시 저기 서 있는 트럭 보여? 회전목마는? 주변의 사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성주가 눈에 들어왔다. 까만 머리에 흰 옷이라 눈에 단박에 들어왔다. 별로 어색하지도 않게 안녕하며 첫인사를 하고 난 뒤 바로 어느 장소로 가야 우리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만남은 이렇듯 마가 뜨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말과 행동을 물색해야하는 것만큼 어색한 일은 많지 않으니까.


우선 눈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가기로 결정했다. 다리를 건너는 중에 세느 강에 정박해 있는 여러 요트들과 유람선이 내려다보였다. 사진 안에서 봤던 잔디밭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잠시 고민했지만 우선 중요한 건 에펠탑과 세느강이니 요트 선박장도 괜찮다고 적당히 타협을 보았다. 그리고는 에펠탑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각자 챙겨온 피크닉 준비물을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파리에서의 피크닉을 기대하고 한국에서 미리 챙겨온 돗자리는 사진에서 봤던 로맨틱한 피크닉 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늘색과 하얀색의 줄무늬를 배경으로 사과와 토끼 캐릭터가 환하게 웃고 있는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돗자리였으니까. 이거 봐, 내 돗자리 귀엽지 라고 웃으면서 보여주면 모두들 캐릭터처럼 따라 웃게 되는 돗자리였다. 나는 이미 뜯겨 있는 땅콩 봉지와 선물받은 스웨덴산 과자, 마트에서 사온 치즈케이크와 와인, 그리고 플라스틱 와인잔을 꺼내들었다. 성주가 들고 온 중국어가 써져 있는 봉투 안에서는 집에서 싸온 사과, 마트에서 사온 감자칩과 블루베리 주스, 집에서 가져온 사과와 줄기가 달려있는 오렌지가 나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들이었지만 세느강과 에펠탑을 프레임으로 삼자 그럴싸해 보였다. '파리빨' 이라고 우리는 킬킬댔다.    


마주 앉아서 나눈 얘기들 중에 처음 찾아낸 공통점은 MBTI 성격 검사 유형에서 둘 다 INFP로 분류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범주에 속해있는 사람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었던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 나눈 이야기와 생각들은 서로에게 쉽게 공감받을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이었으면 서로가 속해있는 사회나 나이대에 대한 공감부터 시작했어야했을텐데, 타지에 나와있다는 이유로 인해 서로가 좋아하는 것 부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파리에 대해 실컷 얘기했다. 잠깐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 아닌 오래 머무는 우리같은 사람들의 특권에  대해서도 떠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파리를 두고 떠나야하는 아쉬움에 대해서도 나누었다. 성주는 말했다. 파리에 태어나서 당연히 파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모를거야.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맞아, 그게 바로 우리같은 사람들이 원하는 행운이야. 에펠탑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비행기 구름을 바라보면서 분명하고 아름답지만 언젠간 있던 흔적도 남지 않은 채 사라질 파리에서의 내 흔적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이 무거워져서 나 비행기 구름 보는 거 좋아해, 라고 뱉어내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도 좋아해, 라는 선명한 대답으로 돌아왔고 그건 나름의 위안이 되었다.

어느덧 분홍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리 위로 올라가 감상하기로 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분홍색 하늘과 에펠탑과 세느강이 그림처럼 섞여있는 전경은 우리를 들뜨게 했다. 연신 찰칵대며 이 풍경을 남기는 데 열중하다가 문득 멈추고는 다리에 몸을 기대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이 풍경을 오랫도록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옛날에 어디에선가 우울한 마음을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지금 있는 장소의 공기에 좋아하는 색을 입혀 그 색깔의 공기가 심호흡 할 때 마음 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갈 수 있게 하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방법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회사 사무실 안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구역질이 날 때, 친구들 사이에서 망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 장소의 아주 짙고 어두운 검은색의 공기로 인해 나는 어김없이 실패했다. 


하지만 아주 선명하고 확실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전경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검은색의 공기가 가득차게 되는 순간이 올 때, 검은색을 덮을 수 있는 분홍색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통 분홍색이라서 정말 예쁘지 않아? 하며 내뱉은 내 중얼거림에 응 그러게. 진짜 다 분홍색이야. 진짜 예쁘다. 라는 대답도 나는 그 순간의 분홍색 공기와 함께 차곡하게 담아두었다. 나중에 차분히 꺼내 볼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9.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