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한 달로 정해져 있었던 파리에서의 생활은 더 머물고 싶은 욕심에 따라 유기한 연장되었다. 관광 비자로 머물 수 있는 최대한의 기한은 90일. 돌아가는 항공권을 취소했을 때는 이미 30일 정도가 지나버린 뒤여서 내겐 60일 남짓의 한정된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짧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끝이 정해져 있는 유한한 시간이었다. 유한함은 초조함을 동반했다. 대책 없이 마냥 흘러만 가는 파리의 시간, 풍경, 사람 모두를 잡고 싶었다. 흐르는 그 어떤 것도 절대 움켜쥘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러던 중 파리에 오래 사신 분의 집으로 초대받게 되었다. 종종 내 손을 꼭 잡고서는, 파리에서 살 생각은 없어? 하시던 분이었다. 어디 좋은 남자 있나 살펴봐야겠다, 결혼해서 여기 살면 좋을 텐데. 같이 오래 있고 싶어서 그러지. 호호호. 하는 웃음과 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무심코 울적해지곤 했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마음은 항상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계산하게 만든다. 우울증은 희망과 관련된 계산에 0을 굳이 데려와서 곱하게 만드는 나쁜 성질이 있었다.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이 생길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항상 0만이 도출될 뿐이었다. 그 0은 나에게 항상 말을 걸었다. 정신 차려. 주제를 알아. 너한테는 0만 있을 뿐이야.
그분의 집으로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다. 여행에서 내 마음이 가장 소란해질 때 중 하나는 지상을 지나가는 지하철 안에 몸을 싣고 있을 때다. 그 안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특히 그러하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미련하고 분주하게 기억에 담아두려 애를 쓴다. 전부 가볼 수 없는 내 취향의 가게들, 의도치 않게 엿보게 되는 누군가의 집 안의 모습, 무심히 자신의 일과를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표정과 같은 것들을. 나는 항상 이러한 풍경들을 동경했다. 이곳에서 시간의 한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평범한 이 풍경을.
목적지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동네였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역 안의 모습을 흘깃 살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조금도 없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심한 일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만 바라보며 동경하던 평범한 풍경 속으로 섞여 들어온 느낌은 무척 생경했다. 파리와는 다르게 단독주택이 올목졸목하게 모여있는 동네는 나에겐 오늘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미지로 남았을 공간이었다. 또 마음이 분주해져서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뒤를 좇아갔다. 오후 여섯 시와 잘 어울리는 소리들이 담벼락 너머로 간간이 들려왔다. 가족들 간의 대화 소리,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가 기쁘게 짖어대는 소리, 대문이 열리는 소리는 따뜻한 색의 햇빛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 공기를 감돌아 흐른 뒤 조용히 사라졌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하는 말 덕분에 그 동네의 여러 단독주택 중 하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심으셨다는 나무들과 제멋대로 자라난다는 꽃들이 아우러진 모양은 다른 정원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이 아름다웠다. 예쁜 꽃은 꺾어서 가져가라는 말에 잠시 멈추어 예쁜 것만을 골라 꺾어 모았다. 결국 시들 것이 잠시 걱정되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보인 것은 현관문 바로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밥그릇과 물그릇이었다. 고양이일까, 강아지일까 추측하던 기분 좋은 시간은 멀리서 들려오는 야옹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집 고양이지만 마음대로 바깥에서 실컷 놀러 다니다가 밥시간 때는 들어와서 배를 채우고 가는 팔자 좋은 녀석이라고 했다. 자유로운 시간, 굶지 않을 거란 확신, 사랑받는다는 믿음.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고양이의 삶이 부러웠다.
집안 구경의 종착지는 김치 냉장고가 있는 지하실이었다. 그 안에서 귀하다는 직접 담근 파김치를 꺼내 부엌으로 올라왔다. 고기가 삶아지면서 나는 고소한 기름 냄새와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도마를 두드리는 칼 소리 모두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모든 것이 이곳에서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좀 더 길게 이어진 건 그 이후에 일어난 일도 큰 몫을 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에는 2층 다락방으로 함께 올라갔다. 평소에 자주 와서 머물면서 기도하는 곳이라고 소개해주신 그곳은 아늑하고 편안하게 꾸며져 있었다. 다락방 특유의 낮고 경사진 천장 탓에 조명은 구석에서 조용히 빛났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성모상들과 십자가와 묵주에는 꾸준하고 성실했을 기도의 궤적이 묻어있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에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건네 오는 칭찬과 격려의 말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어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속에 달콤하지 않은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예쁘다, 착하다, 잘될 거다, 기특하다, 대단하다...
내가 이야기할 차례가 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 보일지 잠시 고민했다. 밝고 즐거운 이야기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가득 차 있는 우울이나 불안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정한 건 일종의 믿음 덕분이었다. 이 집의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가진 것은 아니어도 그중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은 가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 믿음은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장담하게 한다. 그건 우울과 불안의 힘을 받아 희망을 0이라는 결과로 도출하게 만드는 알고리즘을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결국 장담한 대로 내 우울과 불안은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위한다는 느낌만 있다면 아주 평범한 말에서도 특별한 위안을 찾아내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쳐다본 다락방의 천장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오늘같이 맑은 밤에는 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창을 열어 밤하늘을 바라보자 북두칠성이 눈 앞에 들어왔다. 여행자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별자리였다.
우울할 때는 확실히 달콤한 것이 필요하다. 가끔 시간과 공기 자체가 달콤함으로 가득 차는 위로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보통 아무 예고와 기대도 없을 때 나타나서 더 달다. 이 날 들은 달콤한 단어들, 맛있는 음식, 밤하늘의 별, 정원에서 꺾어서 가져온 꽃... 그런 것들이 모여서 엄청나게 달짝지근한 위로가 되었다. 꺾어왔던 꽃은 설탕을 녹인 물에 담가 두었다. 언젠가는 결국 시들겠지만 그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달콤한 설탕물 덕분에 조금은 더 오래 싱싱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