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정리]마음의 안정과 옷의 화려함

- 이 둘의 반비례 법칙

by 엘사 B

문득 옷장을 열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보인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흘려들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제 경험을 통해 그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한창 마음이 피폐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낳고 회사다니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나를 잃어버린 듯한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시간이었다. 신제품을 개발하고 양산하는 과정에 항상 40℃ 이상의 취반기, -30℃ 이하의 냉동기 밥공장이나 기름쪈내 가득한 튀김공장에 다녀오자니 좋은 옷은 아예 입을 수 도 없다. 한때 유행하던 냉장고 바지와 홑겹 반팔옷을 입고 공장에 출장가기 일 수 였다. 음식 냄새와 땀냄새 번범벅인 위생복을 갈아입으며 거울의 내모습을 보고 '하, 이런 옷은 안입고 싶다..'라며 다짐했다. 집에 와서 애키울때도 마찬가지. 콤팩트 하나 겨우 바르고 눈썹은 도대체 어디간걸까...편한옷, 편한 신발이 최고지.

기분전환 차 옷가게에 가면 신기하게도 그럴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은 빤짝이는 스팽글 장식이 달린 옷, 쨍한 형광색의 강렬한 색감의 옷들이었다. 지금 보면 내가 이런옷을 선택했다고?? 믿겨지지 않았다. 마치 갑옷처럼 화려한 옷으로 나를 감싸 숨기고 싶었던 걸까?


이상하게 그 어떤 옷을 걸쳐도 어색하기만 했다. 억지로 웃어보려 해도 표정은 굳어 있었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심지어 내가 어떤 스타일을 좋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내 스타일 없이 조각조각 산 옷들을 매칭하자니 꾸밀 수록 안하느니만 못했다.


어느 날, 문득 셀카를 찍어 보았다. 화면 속의 낯선 여자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굳은 표정, 부자연스러운 미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 사진만 찍고, 제 자신의 모습을 찍어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보는 아이와 세상에 맞추다 보니, 정작 제 자신의 모습은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나'를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편안함을 느꼈는지, 아주 사소한 것부터 되짚어 나갔다. 동시에, 곪아있던 마음의 상처들을 하나씩 보듬고 다독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용한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했다.


신기한 변화가 찾아왔다. 마음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니, 더 이상 화려한 옷에 눈길이 가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수수하고, 가볍고, 편안한 옷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몸을 억압하는 듯한 옷 대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소재, 은은하고 차분한 색감의 옷들이 나를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언제는 대학생 스타일까지?!! 편하게 어울리더라.


마음의 변화는 외면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굳어있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억지웃음 대신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칙칙했던 낯빛도 맑아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화려한 옷으로 감추려 했던 불안함 대신, 편안한 옷차림과 밝아진 표정은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은 화려함으로 포장하려 했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평온을 찾으니 굳이 겉모습을 꾸미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것을 깨달았다.

주말 오후, 따스한 햇살 아래 편안한 옷을 입고 글을 쓰는 이 순간의 소소한 행복은 그 어떤 화려함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값진 깨달음을 주었다. 칙칙했던 옷장 속 화려한 옷들은 이제 편안하고 수수한 옷들로 채워지고 있다. 마치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상자를 열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 안에 비로소 나에게 편안하게 맞는 것들로 채워 넣는 기분이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며 겪었던 힘든 시간들은 나를 잃어버린 듯한 불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평안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잃었다고 느꼈던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헤매었던 과정,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편안함을 주는 방식을 찾아낸 경험은 그 어떤 값비싼 옷보다 빛나는 성장이었다.

이 작은 변화를 통해 나는 앞으로도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잃지 않고 나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경험이, 혹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잃어버린 듯 느끼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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