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몰입의 효과
"엄마! 오늘 그 날이잖아! 왜 시간을 잘못 알아?!"
울먹이는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늘 정신없이 바쁘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가끔은 중요한 약속이나 시간을 깜빡할 때가 있었다. 아이에 관한 건 웬만하면 내가 다 챙기는데도, 이렇게 실수를 하면 아이는 너무나 상처받고 원망을 담아 토해냈다. 아이 입장에선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세상의 원칙인데, 그걸 엄마가 틀리니 얼마나 황당할까. 솔직히 아빠가 좀 챙겨주면 좋겠다 싶지만, 뭐... 결국 내 몫이 되는 게 대부분이다. 혹시 이게 치매 초기 증상인가, 아니면 너무 기억할것들이 많아서 잊는 건가 아직 잘 모르겠다. 분명한건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쉼도 쉬어본 사람이 잘하는건가.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그렇게 시작한 것이 자동차 조립이랑 보석 십자수였다. 사실, 아이랑 같이 해보려고 먼저 고른 취미였는데... 막상 내가 더 푹 빠져버렸다. 복잡한 일상은 늘 정리가 안 되는 숙제 같고,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다 보면 집중력도 떨어져 기억력마저 감퇴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노동은 가끔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공장 참관 가서 야채 선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딱 '무념무상'의 평온함을 느꼈었다.(적어도 그 시간엔 아무도 나를 안찾으니까...) 그 기억이 떠올라, 어쩌면 나중에 마늘 까는 알바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던 나였다.
처음엔 건물도 짓고, 우주선, 배 이것저럭 미니 블럭을 해보다가 자동차 조립이 제일 재밌어서 이걸로 정착했다. 자동차 정비하신 아빠의 피를 받았던가... 나 좀 소질있네? 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모형 자동차를 조립할 때 설명서대로 부품이 ‘착착’ 맞아 떨어질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석 십자수는 우연히 조카 장난감으로 알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어떤 작품을 고를지도 또다른 재미! 만날 때 마다 부엉이, 해바라기 그림이 갖고싶다던 친정 엄마의 말이 기억나서 부엉이와 해바라기가 한판에 그려진 작은 그림을 선택했다. 작은 큐빅이 픽셀처럼 모여 그림이 되는데 완성하고 보니 그럴듯 했다. 보석 십자수는 도안의 번호 안에 작은 큐빅을 ‘딱’ 맞출 때의 쾌감! 이게 뭐라고 이렇게 뿌듯한지. 심지어 큐빅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여러 개를 붙일 수 있는 도구까지 샀는데, 결국은 하나하나 ‘착착’ 붙이는 손맛이 제일 좋았다.
자동차 조립은 한 번에 여러 개를 할 수도 없고, 한 단계 한 단계, 비슷하게 생긴 부품들을 크기와 방향을 맞춰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도 이런 설명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딱딱 맞춰지는 인생의 설명서만 있다면, 후회 없이 나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그런 설명서가 있다면, 그냥 그 '예상된 자동차'만 만들 수 있는 거겠지? 이 조립의 특징은, 한 번 완성하면 끝이라는 거다. 두 번은 못 한다. 한 번 완성하고 나니 뒷목은 좀 뻐근했지만, 이런 소소한 성취감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를 또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딱딱 맞춰 떨어지는' 작업들은 스트레스 완화에 엄청 효과적이라고 한다. 온전히 한 가지 활동에 몰두하다 보면,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시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야채 선별할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설명서대로 하다 보니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 조립이나 보석 십자수처럼 눈과 손을 정교하게 움직이고, 집중해서 하나의 목표를 완성하는 과정은 뇌를 쉬게 하고 몰입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려준다고 한다. 소노동으로 얻은 개운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완성품을 보면서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정말 뿌듯하고, 내 안의 창의력을 깨우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서재방엔 벌써 내 작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덕분에 요즘, 작은 쾌감들을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때론 이렇게 예상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며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나를 위한 '나만의 설명서'를 계속 찾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