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정리]우연히 발견한 행운

비오는 날 서울의 운치

by 엘사 B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 순간 순간들을 더 깊이 즐길 줄 알게 되는 것일까. '운치가 좋다'는 말,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 그것도 강남 번화가 대신 고즈넉한 광화문이었다. 아침부터 꽤나 부산스럽게 치장하고 집을 나섰다. 뭐랄까, 평소에는 집콕만 하며 지내니, 가끔 이렇게 세상 밖으로 멋 부리고 나서는 것도 리프레시가 된다.


엊그제부터 온다던 야속한 비는, 기어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내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약속 장소인 광화문 도심 한복판 5층 샤브샤브 식당에 들어서자, 창밖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꽤나 운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살짝 어색하면서도 무척 반가운 분과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색함을 날려버리려 신나게 고기랑 채소를 리필해 가면서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나누는데,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창밖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변한다.


조금 힘주어 내려다보니 건물 3층쯤 한켠에 도심 정원이 보이고 아무도 없이 비의 발자국이 보인다. 창밖에는 작은 나무들이 빗물에 촉촉이 젖어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키 큰 가로수들 사이로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들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비와 어우러져 한없이 평화로웠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질 멈추고 한참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도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밥먹다말고, 사람 옆에 앉혀놓고 평소에 찾기 어려웠던 집중력이 확 올라 온다

'무념무상'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이 고층 식당에는 따로 카페가 없었다. 하긴, 샤브샤브에 고기랑 야채를 신나게 먹어댔더니 배가 빵빵해서 커피까지 마시기엔 좀 버겁기도 했다. 친구는 다음 미팅이 있다며 서둘러야 했고, 굳이 커피까지 마시고 가라고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친구를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그 운치 가득한 기분을 더 느끼고 싶어서 발길 닿는 대로 주변 카페를 찾아 나섰다.


사실 나, 폴바셋 커피 정말 좋아한다. 진하고 고소한 라떼 맛은 정말 최고이다. 아뿔싸, 오늘 찾아간 폴바셋은 하필 창문 하나 없는 구조였다. 아, 여기가 아니었다! 싶어서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비 오는 날의 운치를 즐기려면 역시 넓은 창문은 필수이다. 결국 그렇게 30분을 비를 맞아가며 걸어서 찾아낸 곳이 바로 지금 앉아있는 이 카페이다.


고작 몇 층 올라왔을 뿐인데, 통유리창 너머로 하늘과 구름, 그리고 비에 젖은 광화문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역시 아이스 라떼는 사랑이다.


다음에 내 공간을 꾸리게 된다면,

꼭 이렇게 통유리로 된 3층 위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차들이 오가는 시끄러운 소리,

사람들 담배 피우는 모습 대신,

그저 하늘과 건물, 빗물에 반짝이는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공간.


솔직히 지금 마시는 이 카페의 커피 맛은 평범하다. 그러나 이 은은한데 익숙한 디퓨저 향과 압도적인 통유리 뷰가 모든 것을 용서하게 한다. 마치 내가 상상하던 꿈의 공간을 미리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 공간에서는 맛있는 커피도 준비해야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정정리]모형 자동차 조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