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떤 환경에 꾸준히 노출시키면 나는 그걸 원하게 될까?
건축학도가 마음에 찰랑였던 찰나를 글로써 기록합니다. 건축과 공연, 글쓰기를 늘 곁에 두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오늘은 내 프로필 소개글에 적어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건축과 공연, 이 두 존재는 각자 명확한 이유로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어김없이 복잡하게 엉킨 마음을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나는 건축학과다. 건축 하나만 바라보며 대학교에 왔고, 어느덧 3학년 2학기를 다니는 중이다. 크리틱에서 고칠 점이 이해될 때 나는 행복했다. 그런데 명쾌하게 그걸 고쳐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몰입을 한 순간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건축을 하며 일순간 확 행복했다거나 심장이 쿵쾅거린 적이 있었나 물어보면 미친 듯이 과거를 헤매게 된다. 촤르륵 시간을 펼쳐 샅샅이 뒤져봐도 없다. 잘 모르겠다. 건축은 나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존재인 것 같다. 고백하기도 전에 매번 차이는 기분이다.
음악 없는 삶은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자연스레 가수도 좋아했다. 음악과 가수를 좋아하는 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은 수험생 신분인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었다. 세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된 나는 수험생활 때의 한을 풀 듯,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공연을 가기 위해 공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겁 많고 행동력이 없는 나지만 보고 싶던 공연이라면 주저 않고 먼 지방에 내려가기도 했다.
콘서트가 제일 좋지만, 사실 뮤지컬이든 클래식이든 발레든 가리지 않고 정말 즐겁게 봤다. 곁에 앉은 관객들 라인업까지 좋으면 거의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될 정도로 기억에 남았다. 힘들 때 습관처럼 돌려보는 기억의 9할은 공연과 연관되어있다. 공연에 가기 전부터, 공연을 보는 중, 공연을 나온 후, 기억을 되짚으며 긴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까지 공연과 관련된 모든 일이 좋고 행복했다.
문제는 어느 순간 내 눈이 스태프분들에게 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공연을 보는 것만 좋아한 게 아니라, 공연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공연장을 찾아갈수록 그 마음은 커져만 갔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무슨 말로 이것을 설명해야 하지?
없다. 그런 말은.
나는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방송부였다. 초등학교 때 나는 기계부 홍일점이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에 아침방송 예고를 한다. 단상을 놓고, 학교 로고가 새겨진 스크린을 내리고,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연결하고, 애국가를 틀고, 조그만 방송실 구석에서 뚱뚱한 티브이로 모니터링을 하고, 다 같이 한 층씩 나눠 뛰어다니면서 전교에 방송이 잘 나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방송이 끝나면 모든 걸 정리하고 아침 조회가 다 끝난 교실에 들어갔다. 방송실을 들락거리는 것은 나의 일상이었고, 너무도 당연했고, 방송반이 주는 책임감은 언제나 행복했다.
그 기억을 잊지 못한 나는 중학교 때도 서류부터 면접까지 하나하나 준비해서 기어코 방송반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을 이야기할 때 방송반을 빼면 나는 시체였다. 점심방송 멘트를 쓰고, 선배에게 피드백받고, 마이크 들고 방송하고, 매달 학교 소식을 모아 뉴스를 만들고, 편집했다. 특히나 축제 때 방송제에서 드라마를 제작하고, 선생님들을 모아 광고까지 만들었다. 그걸 보며 돌아오는 친구들의 뜨거운 반응과 팀원들끼리 나누던 수고 했다 한마디… 난 그냥 그게 너무 재밌었다. 강당 꼭대기에 있는 방송실의 텁텁한 먼지향기가 그때부터 좋았던 것 같다. 그건 지금도 공연장에 갔을 때 맡을 수 있다. 곰팡이 냄새일 수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원래도 모 아니면 도인 성격이긴 한데, 중학교 때 방송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공부를 잘 안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고등학교 때도 방송반 하면 내쫓아버린다고 하셨다. 나도 심각성을 알고 있어서 안 들어갔다.
… 방송부 친구들을 부러워만 했다.
더 이상 무대 뒤편이 아닌 관객으로서 공연장을 찾는 나는 또다시 무대 뒤편으로 가고 싶어졌다. 방송부 시절의 그리움은 무서운 속도로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현실은 학생 때의 내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 어려움을 알고 싶어서 찾아간 무대크루아카데미도 너무 재밌었고, 심장이 뛰었다.
나는 공연에 가는 것을 일종의 현실도피로 생각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힘들 때마다 느닷없이 공연장에 가는 일을 좋아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인간관계가 마음대로 안 풀릴 때, 지금 일이 재미가 없을 때, 해결책을 아무리 떠올려도 아무 생각할 힘이 없을 때… 되도록 내가 있는 현실과 멀지 않은 지점에서, 빠르게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게 수험생 시절 미술 전시였다면, 요 몇 년 사이에는 공연뿐이었다.
힘들 때 공연이 필요했던 건지, 공연이 필요해서 힘든 건 지 헷갈리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 검은 옷의 스태프분들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내 모습을 깨닫고 나니 내가 이 일을 정말 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힘들어서 공연에 가려 했던 게 아니라, 그냥 공연장이 좋고, 그곳에 있는 내가 좋았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 일이 왜 좋냐고 물으면 솔직히 명쾌한 답이 돌아오진 않는다. 나는 좋아하는데 이유에 그냥 끌린다,라고만 말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건축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공연과 훨씬 친밀함을 느낀다.
이 일은 인간관계랑도 비슷하다. 가까이 붙어 있다면 친구가 될 가능성은 높지만, 가까이 있다고 무조건 친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어쩌다 얘랑 친해졌지 생각해도 결국 우린 친구가 될 사이었나 봐~ 얼버무리고 만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될 뿐이었던 거다.
솔직히 미련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송부에 있던 시간은 3년의 수능준비 때 산산이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했지만 부모님은 내가 방송반에 치중했던 그 시간 때문에 내가 열아홉부터 20대 초반의 2년을 날리고,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결국 나는 또 이 일을 하고 싶어졌다.
며칠 전 인스파이어 아레나 백스테이지 투어를 다녀왔다. 그곳의 방송실은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신비감을 주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질문이 솟구치고 물어보고 답을 듣고 또 기어코 기억을 만들어 버렸다.
지금 나는 여전히 건축학과 학생이고 2학기 프로젝트는 공교롭게도 공연장 설계이다. 어쩌면 좋을까? 공연장에 가까워지면 건축과는 한 발짝 멀어지는 것 같다. 그게 솔직히 너무 무서운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피하던 게 아니라 좋아했다는 걸 알수록 더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결국 나는 공연장에 또 갈 것을 알고, 언젠가 그곳에 머무를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