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Oct 25. 2021

아빠가 엄마를 잃었다.

할머니를 보내며...

아빠가 엄마를 잃었다.

21년 전, 엄마가 엄마를 잃었듯이.


다 크진 않았지만, 마냥 어리다고는 할 수 없던 나이에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던 날. 나는 울지 않았다. 조금 늦게 도착했던 언니는 크게 오열했고 그 슬픔에 모두 한번 더 눈물을 훔쳤다.

 "언닌 저리 우는데 니는 안 슬프나?"

친척 중 누군가 내게 물었다. 인정머리 없는 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장지를 따라갔던 건 나였고, 혼절하듯 울부짖는 엄마를  지켜보았던 것도 나였다. 나는 그때에도 한 발짝 물러서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조금 닦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크게 슬퍼하지 않았던(것처럼 보였던) 나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초겨울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추운 다리를 문지르다 아무런 매개 없이 느닷없이 떠오른 외할머니 생각에 목구멍에 밥알을 넘기지 못하고 울컥이며 아침을 맞이했다.


전공을 배우고 그로부터  한참 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나는 깨달았다. 극한 상황에서의 나는 언제나 억압과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아서 안 운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울지 못했다.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면 무너질 것 같았다. 나까지 울면 엄마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내 삶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사람 밑에서 안 운 직원은 너뿐이래."

 "너는 헤어져도 별로 안 힘든 것 같더라."

내가 들었던 이 말들이 그 뜻을 함께한다. 강인해서가 아니라 너무 약해서 고통을 드러내지 못했고 극한의 감정을 표출해본 경험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당시에 충분히 애도하거나 슬퍼하지 못했던 감정들은 나도 모르는 심연 깊은 곳에 남아 난데없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터져 나오거나 아무 의미 없는 드라마 대사에 몇 시간이고 폭풍오열을 해대기 일쑤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어떤 일을 겪고 즉시 울음을 터뜨리면 생각한다.

'아.. 울 수 있는 정도의 일이구나. 견딜 수 있는 일이구나. 곧 지나가겠구나.'


 주말, 붐비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며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나처럼 슬퍼하기 위해 가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생각하다가 이제는 필요한 때에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감정을 드러내 보리라 다짐했지만 역시 다짐에 불과했다.

 입관이 시작된 직후 도착한 내게 큰 집의 큰 숙모는 휴지를 한 움큼을 쥐어주며 할머니 마지막을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이미 와 있던 다른 손주들도 있었는데 왜 입관식에 들어간 손주는 유일하게 나 하나였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태어나 처음 지켜본 입관식. 할머니의 얼굴은 이미 덮여 볼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저리도 작았나,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저렇게 작아지는 걸까, 순서대로 입관식을 진행하며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매일 지켜보는 저 직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엄마.. 엄마.. 내내 처절하게 소리 지르며 우는 고모들은 걱정되지 않았다.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애도하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천천히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확신했다.

 내가 마음을 쓴 사람은 5남매 중 유일하게 울지 못했던 아빠와 평생의 반려자를 잃은 거동조차 쉽지 않은, 구순이 넘은 할아버지 두 사람이었다.

 "할머니 마지막이라는데 보실래요?"

내 말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가 이내 숨이 차신지 1분도 되지 않아 "내 앉을란다" 하시며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시던 할아버지.

 지난 추석 연휴, 몇 년 만에 찾아간 할아버지 댁에서 헤어질 때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다음에 니를 또 볼랑가 모르겠다."

그 말에 울컥하며 아무 대답을 못했던 건 나 또한 그게 왠지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일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틀렸다. 인생은 그렇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나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났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제주도에서 주말 표를 변경하지 못해 하루 늦게 도착한 언니는 21년 전 그날처럼 오열을 했다. 나 또한 21년 전 그날처럼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그런 언니를 지켜보며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나는 슬퍼하지 않았으니 위로받을 수 없었다. 타인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만 판단할 뿐이다. 또 누군가는 뒤에서 평소에도 얼굴 보기 힘들더니 매몰차네.. 하고 욕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 어쩜 나는 마음껏 슬퍼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올라오는 감정을 억눌렀다.

 발인 날, 할아버지 아침 식사를 챙겨드린다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할머니 꿈을 꾸었다.

 마루에 서 있는 사람이 할머니라는 것을 인지하던 순간,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런 꿈이구나'를 깨달았다. 할머니는 내게,

 "내 인제 간다." 짧게 한 마디를 하셨다. 나는 울면서 잠에서 깼고 돌아누운 옆 자리에는 일찍 깬 조카가 말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조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람들이 이래서 자식을 낳는 건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살면 살수록 경사보다는 조사가 많아지는 삶의 무게, 그 무게를 견뎌내고 잊기 위해서 자식을 낳아 새로운 기쁨을 찾으려는 걸까.


 화장을 시작하겠다는 직원의 안내에 짐승 같은 무더기 오열이 또 시작되었다. 유족 대기실로 안내되어 올라가는 동안 우리 다음팀의 오열이 새로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똑같은 곡조의 똑같은 울림으로. 이곳은 오로지 슬픔으로만 가득 찬 공간이구나. 내가 모르는 슬픔의 종류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슬픔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갑자기 삶에 대한 두려움이 훅하고 밀려왔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져 다리가 후들거렸다.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차에 올라타며, "슬프다."라고 하는 조카에게 "그럼. 슬프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던 나는 21년 전의 나와 별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자라지 못한 어른 아이였다.


 아들에게도, 딸에게도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내 꿈에만 나타났던 할머니를 두고 나는 내가 발인에 못 가서였다고 해석했고, 엄마는 할머니께서  평소 내가 결혼 안 한걸 마음에 걸려 하셨는데 니가 마음에 밟혀서 그랬나 보다고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유가 뭐였 건 간에 불편한 허리로 항상 구부정하게 다니시던 할머니가 꿈에서 꼿꼿하게 서서 얘기하셨다는 내 설명에 가족들은 "이제 안 아프신가 보다. 편하신가 보다."하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와 며칠간 모든 약속과 일정을 취소하고 나를 아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나는 꿈에서의 할머니 마지막 모습이 계속 생각나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샤워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또 때로는 통곡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슬픔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며 지금 이 일을 기록하는 일 역시 나의 애도의 한 과정이자 마무리이다.


늙음은 서글프고 죽음은 슬프다.

헤어짐은 늘 고통스럽고 먼저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는 어쩔 수 없이 남는 법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망자가 산자에게 주는 선물,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일 것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덧없음과 소중함을 함께 배운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더 감사히 여기며 충분히 사랑하며 충실히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남은 사람의 숙제이자 의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댓글은 참지 않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