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애 옆에 또 이상한 애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일 안고 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中-
시를 읽지 않는데 대화가 통화는 사람은, 시를 쓰는데 대화가 통하는 사람보다 강렬했다.
-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반면, 9개가 다른데 나머지 1개가 기가 막히게 맞으면 묘한 전율과 함께 공감력 지수가 폭발한다.(찌찌뽕 문화가 괜히 생겼을까...)
구 동거녀, 아침드라마 10개+고구마 100개 먹고 명치에 걸린 듯한 막장 of 막장 친척 이야기를 신명 나게 떠들어대고 있다.
나 (듣다가 너무 신기하여) 야야, 나 이 얘기 나중에 써먹어도 돼?
그녀 써! 써! 나중에 보여줘.
****시간 경과****
그녀 .... 그래 가지고.... 또 새로운 여자를 만난 거야. 근데 그때 구치소에 있을 때였거든? 그래서 가중 처벌이 되가지고...(블라블라...)
나 (도저히 안 되겠다. 약간 피로해진 표정으로) 야... 근데 이 얘기 안 되겠어. 지어냈다고 해도 너무 작위적이야. 진짜라고 듣는 나도 안 믿어지는데...(새삼 궁금해진다.) 근데... 니 주변에 평범한 사람은 없는 거야?
그녀 (정색하고 날 똑바로 보고) 너 자꾸 까먹는데... 너도 내 주변 사람이거든? 너도 안 평범하거든?
나 !!!!!(당했다.)
가끔은 날 웃기려고 일부러 지어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기괴한(?) 주변 사람들 얘기를 할 때마다 나는 묻곤 했다. 네가 특이해서 주변에 특이한 사람만 있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구 동거녀는 늘 내게 반문한다. 너는 보통 사람인 것 같으냐고.
나는 달라! 나는 니 주변 사람 중에 유일하게 평범한 사람이야!라고 항변하곤 했는데 요즘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너와 10년을 넘게 함께 한 나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고.
자리에 앉자마자 구 동거녀, 책 두 권을 내게 내민다. 대부분의 도서를 대여해서 읽는 나와 달리 부자인 그녀는 책을 자주, 많이 사서 본다. 이 책은 무엇???이라는 내 눈빛에 구 동거녀는 짧게 추천사를 읊는다.
그녀 여행작가가 쓴 책인데.. 그럭저럭 볼만해. 근데 전문작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읽다 보면 한계가 느껴져.
나 ???
그녀 같은 어휘, 같은 단어를 계속 돌려막기 하면서 써. 봤던 표현이 계속 나오거든.
이것은 선플인가, 악플인가? 칭찬인가, 욕인가? 추천한다는 건가, 별로라는 건가?
그런데 받은 책 첫 권을 1/3 읽었을 지점,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대번 이해가 돼서 혼자 깔깔댔다.
'아... 이거 아까 전 페이지에도 봤던 문장 같은데' 느낌의 글들이 데자뷰처럼 반복되고 있는데도 한 번씩 마음에 턱턱 하고 걸리는 문구들이 있어 책장이 생각보다 빨리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몸과 마음이 꽁꽁 묶인 불쌍한 (구) 여행자, (현) 여행소망자인 나는 여행작가의 사진 한 장에도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간파했고 읽으면서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추천하지 않지만 추천합니다.'의 그녀의 한 줄 평은 나를 알기에 내릴 수 있는 정확한 평가였다.
심장 근육에 손상을 받은, 의학적으로 명백한 백신 부작용에도 이 정도에 그쳤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껄껄 웃던 그녀의 무한 긍정 앞에서 나는 내 안의 어두운 부정과 비관을 반성했다.(나아지진 않는 것 같지만..)
반대로 예민함을 일상 저변에 깔아 두고 늘 스트레스에 절절매는 나를 보며 그녀는 근심과 걱정이란 무엇인가.. 나를 볼 때마다 인간 본연의 철학적인 질문에 봉착한다고 했다.(정확히는 본인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함'에 대한 호기심인 것 같지만..)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굳이 '인정' '포용' 같은 고급(?) 진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체념'이나 '포기'로 이루어진 관계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중과 애정이 동반되어야 하는 거니까.
끝과 끝은 통하고 극과 극은 닿아 있는 것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우리의 평행선은, 그렇기에 끊기지 않고 나란히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소곤소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부자니까.
부자라서 계속 맛있는 것을 사주니까.
사주는 것도 모자라서 나를 집에 들여보낼 때 배스킨라빈스 백가지 맛이 있는 점에서 큰 아이스크림 통을 안겨다 주었으니까.
감격에 겨워 내가 슬쩍 울먹이며 "우리 앞으로 계속 친하게 지내자."라고 했을 때 호탕하게 승낙해준 그녀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