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전화에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다. 스팸 이력도 없다. 평소와 달리 왠지 전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으나 혹시나 괜히 이상한 피싱에 말려 좀비폰이 될까 봐 관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수신되어 있는 문자를 뒤늦게 확인했다.
왜요?라고 물어보려다 참았다.
전화통화를 한 게 아닌 데다 추후 연락을 다시 준다는데 다시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연락이 잘못 온 게 아닐까? 아니면...
그래! 피싱 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나는 이 공모전의 과정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하지? 이상해! 내가 말이야.. 뭐 우수상.. 정도라고 하면 와~진짜요? 하고 기뻤을 거 같은데 대상은 이상하지 않냐? 얼마 전에 영화 보니까 대기업 응시생들한테 전화 걸어서 합격했다고 하면서 뭐 보증제도 어쩌고 하면서 대출받으라고 하더라.(엄마가 보는 영화 뒷부분만 어깨너머로 봤는데 왜 이런 장면만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인가...) 응시자들 개인정보 유출돼서 다 대상이라고 연락해 놓고 뭐 사기 치려고 하는 거 아닐까? 야야, 나 시상식이라고 갔는데 어디 감금당해서 휴대폰이랑 신분증 뺏겨가지고 내 이름으로 대출되고 이러는 거 아냐? 너.. 내가 시상식 간다고 했는데 2시간 이상 연락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해. 알았지?(진지). 그래도 있잖아. 나는 교육원 선생님들도 계시고 현직 드라마 PD분도 알잖아? 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그분들한텐 물어볼 거야.(얼씨구) 난 사기 안 당할 거야.(아직 누가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미 미래에 가서 살고 있다...)"
마치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나는 이상한 이야기를 친구에게 쏟아냈다. 의심이 많아서 사기는 안 당할지 모르겠으나 그전에 신경쇠약에 먼저 걸리지 싶었다.
납득
사실 의심을 하는 데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꽤 큰 제작사(이것도 나중에 앎)에서 최초로 시도된 이 공모전은 지정된 웹소설을 읽고 영상화할 수 있는 대본으로 각색하여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이 1도 없는 나는 각색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덤볐는데 원작자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엔 흥미로웠다가 1/3 지점쯤 이르러서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가, 들로 갔다가 바다까지 나갔는데 밑밥과 복선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고 이 등장인물은 언제 등장해? 했는데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응? 나 어떻게 해? 했던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완벽한 원작이라면 각색할 것도 없었겠다 싶지만) 그래도 맘먹은 게 아까워(사실 웹소설 봐야 해서 결제한 게 아까워서) 어찌어찌 내긴 했는데 제출하고 한참 후에 알았다.
이 제작사의 공모전엔 수상자가 없는 경우가 왕왕 있어 아이디어 도용만 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아 보이콧 움직임도 있었다는 것을..
'여기는 믿거'
'이런 공모전에 시간 쓰지 마세요'
'지원자에게 무조건 불리한 독소조항'
'이미 메인작가는 대기 중일 겁니다. 시놉까지 자세히 쓰라는 거 봐서 각색 회의 안 하고 괜찮은 거 있으면
그대로 갖다가 메인 작가한테 갖다 바칠 심보네요'
여행카페나 하루에 몇 번 들락거리기나 했지 정작 필요한 정보에 늦은 나는(자꾸 주눅이 들어서 글 커뮤니티는 일부러 잘 안 들어갔다.) 이런 이야기들을 뒤늦게 알았다.
물론 수상작을 뽑는다 해도 내가 그 안에 들어갈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남들 다 아는 거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한 달 반 동안 주말에 그 좋아하는 왓챠도 안 보고 시간을 썼는데!!!
나름 각색 방향에 대해 치열(!) 하게 연구(?)했던 흔적 일부
그랬는데 저런 연락을 받았으니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나 홈페이지에 공지가 되었다.
아.. 진짜긴 한가보다.
J성향을 발휘하여 그제야 카페의 글을 뒤졌다. 제작사에서도 이런 악플(?)들을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공모전에 메리트가 없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그런지 지원자가 많이 없었고 1회 공모전이니 이번엔 수상작을 꼭 내야 했을(내 생각) 제작사에서는 없는 지원자 가운데 결국 수상작을 절반으로 줄여 뽑았던 것이다.(내 생각이지만 근거 있는 추론) 그러니까... 운 좋게 얻어걸린 것이다.
자아분열
기뻐해야 할 타이밍(?)을 놓쳐서 실감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사실 현실에 몹시 치이고 있던 때라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잘 와닿지 않았다. 일과 야근에 찌들어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솟아 몸 이곳저곳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고 누구든 건드리기만 하면 물 정도로 분노 게이지는 정수리 끝까지 차 있었다. 시상식 일정 전화를 받고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끊고는 곧바로 쏟아지는 메일들을 처리해야 해서 도무지 두 자아가 합쳐지질 않았다.
항공권 구매와 공모전 제출 후에는 절대 다시 검색하거나 뒤돌아보지 않는다가 불문율인데(나만 이래?) 연락을 받고 열흘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시간을 내 제출했던 파일을 다시 열어봤다. 10회 회당 시놉에 2회 대본을 냈는데 나머지 8회 이야기를 내가 뭐라고 지어냈는지(?) 그 새 기억이 가물거렸기 때문이다. (나머지 8회 대본은 쓸 일이 없을 테니 그냥 좀 되는대로 막 지껄였던...)
되게 신기한 경험을 했다. 분명 쓰면서는 '정말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밖에 못쓰냐' 쥐어박으면서 썼던 거 같은데 상을 준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읽기 시작하니까 뭔가 도입을 잘 쓴 것 같다. 약간 마음에 들라고도 한다.(응?)
'너는 정말 너 스스로가 세울 자존감이란 1g도 없는 구제불능이구나'
조금 한심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시상식
단순히 상패를 받고 사진만 찍고 오면 되겠지 했었는데 며칠 후 다시 걸려온 전화의 용건은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어보자'였다. 그 순간부터 갑자기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지도 않은 일,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해가며 아무것도 없는 내 밑천만 드러나는 건 아닐까 심장이 쿵쿵거렸다.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총동원해 심신의 안정을 꾀하려고 노력했다.
-때마침 '인간사, 어차피 쪽팔림의 역사' 글을 발행해주신 유랑 선생 작가님 감사합니다.
-친히 전화까지 주시어 밥 먹다가 식탁을 엎는 등의 기이한 행동만 안 하면 된다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 조언을 해주신 초이스 PD님(이 대목에서는 이 직책 and 호칭을 써야 할 것 같..)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일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갑자기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정말 이 대책 없는 회피 성향이 너무 어이없었다. 하지만 다시 차분히 생각해 봤다. 늘 도망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실제로 나는 도망간 적이 없었으니까.
시상식 후 간단히 밥만 먹고 금방 끝날 것이라는 사전 고지와 달리 시상식이 일찍 끝나 예정에 없던 대표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실무진들과 식사를 한 후에는 공동주최측과의 티타임 일정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이것은 무엇? 흡사 하루에 연달아 치러지는 3차 면접과 같은 것인가? 울렁증과 낯가림이 심한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
혼수상태
그랬는데 대표진들과의 자리에서 질문을 했다. 전날 교육원 선생님이 "마 뜨는 거 못 견뎌서 굳이 말하려고 하지 마."라고 조언해주셨는데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다. 쓰는 내내 계속 가지고 있던 의문이 있었는데 진짜 궁금해서 못 견뎌서 그랬다.
질문하시면서 면접 아니니까 편하게 얘기하면 된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면접처럼 답했다. 프로 이직러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숱한 이직을 통한 학습된 면접 자세는 꽤 써먹을만하구나 싶었다.(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맛있고 비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기획 PD 분들은 아주 친절하고 상냥했다. 서비스직군에 계신 줄 알았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보셨다. 질문만으로도 갑자기 나도 마음이 상냥해졌다.
나오기 전에 슬쩍 보고 오셨다며 기억나는 심사평을 얘기해주시겠다고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작가님은... 칭찬이 되게 많았어요."
".... 에?"
"캐릭터 구축이랑 인물들 간의 관계도 설정이 좋다고. 가장 드라마다운 대본이라고 했어요"
"아.. 캐릭터는.. 원작보다 특징을 하나씩 잡아서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아... 그죠 그죠!! 작가교육원 어느 반 까지 하신 거예요?"
"전문반이요."
"아~! 역시!"
..... 교육원 수료반과 글 실력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닌데 PD님 반응을 보며 정규 교육(?) 과정의 필요성을 괜히 체감해본다. 나한테 유리한 말 같아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카페로 이동해서 PD 님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공동주최 담당자분들께 인계하고 떠나셨다. 같은 질문이 이어지고 같은 대답을 한다. 웹소설, 웹툰 쪽 담당자분들이셔서 아무래도 그쪽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둘 다 안보는 나는 할 말이 없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옆 테이블에서도 캐스팅이니, 제작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분명히 어제 나는 사무실에 앉아서 엑셀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스캔을 드륵드륵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갑자기 다른 시공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정신을 붙잡고 열심히 리액션을 해본다. 다른 수상자들에게 MBTI를 물어보곤
"그죠? 다 I죠? 그럴 줄 알았어. 깔깔깔" 실없는 소리도 한다.
나쁜 소문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소문은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는데 공모전을 주최하신 분의 순수한 의도를 듣고 인간이 얼마나 부정 편향에 쉽게 빠질 수 있는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소득
운 좋게 수상을 한 번 했다고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길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엔 역량이 부족하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단지 이번 일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다.
몇몇 친구와 지인에게 지나가듯 알렸던 시상식 일정에 대해 한 친구는 하루 온종일 일정을 같이 해주었고 또 다른 이들은 잊지 않고 당일 축하 인사를 건네 오고 내 일처럼 기뻐하며 선물도 보내왔다. 좁디좁은 인간관계, 아싸의 집순이 아이콘인 나지만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뜨끈해졌다.
친구들 /교육원 선생님/함께 했던 다른 수상자 분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당일 수상소감 일부를 옮겨본다.(진심이지만 오글거림에 손 발 잘려 나갈 수 있음 주의)
"(........) 작가 교육원을 수료하면서, '아.. 나는 재능이 없구나' 생각하고 한동안 보지도, 듣지도, 쓰지도 않고 살았었는데 (...........) 이번에 소식을 처음 접하고 들었던 생각이 그거였어요.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고,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도 단정하거나, 확신할 일도 없다는 것. 그리고 쉽게 포기할 일도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조금 더 써봐도 좋다고 허락하고 응원해주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저 스스로도 그런 다짐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그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