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에 미팅을 하러 가는 날의 나의 패턴은 늘 동일하다. 일단 잠을 설치고, 아침부터 긴장으로 온몸을 둘둘 말고, 점심을 먹으면서 너무 가기 싫다.라는 말을 반복하고(보통 오후 반차를 내고 간다.) 지하철 역에 내리면서는 심호흡을 하면서 '역할 스위치!!'를 세뇌한다. 그러면서도 부디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제발 오늘은 조금 혼나길 기도 한다.('혼난다'라는 표현을 썼더니 기획팀에서 "어머! 혼난다뇨!! 작가님 한 번도 혼나신 적 없잖아요!!"라고 했다. 맞다. 혼난 적은 없다. 내가 혼난다고 느낄 뿐...)
건물에 도착하면 중간층 로비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임시 출입증을 받아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 후 사무실 입구까지 간다. 여기까진 내 자유의지로 이동이 가능하다. 그 이후 '관계자'만 출입이 가능한 입구 앞에 다다르면 담당 PD님께 전화를 건다. 소속된 자가 아닌 경우, 누군가 안에서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관계자'가 드나들 때 슬쩍 껴 들어가기도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출입구 앞엔 배우들이 프로필을 놓고 가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규모가 큰 제작사다 보니 갈 때마다 프로필은 산을 이루며 쌓여가고 있었다. PD 님이 나와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30초 남짓한 시간, 나는 이 프로필들을 보며 숙연해지곤 했다.
자신을 홍보, 판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걸까. 직접 찾아와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한 장의 프로필을 놓고 갈 때 어떤 기대와 희망을 품을까. 혹은 반복되는 무응답에 지쳐서 이미 절망에 가까워져 있을까.
연습생(?) 계약기간이 절반을 넘었다.
처음이니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역시 이것밖에 못하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온갖 꿈에, 구내염을 달고 살며 잦은 두통을 호소하고 있다.
어쩌다 페이퍼를 넘기고 난 뒤 미팅 일정이 조금 늦게 잡히면 하루, 이틀 정도 '아무것도 생각 안 해도 되는 시간'을 얻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해방감에 기분이 너무 들떠서,
"하루 잠깐 아무것도 안 해서 이렇게 기분이 좋을 거면, 그냥 안 하는 게 맞지 않아요?"라고 지인에게 묻기도 했다.(그럼 안 하고 살던 시절에는 행복했나요? 란 질문을 돌려받았다. 내 주변엔 똑똑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다행히 우리 팀 PD분들은 이제 내 성향을 다 파악하셨는지 채찍보다는 당근으로 괜찮다, 잘한다, 우쭈쭈 해주며 날 끌고 가신다.
문제는.. 더 나아가서.. 베테랑 작가들도 미팅을 하면 식은땀을 흘린다는 지체 높으신(?)분까지 자꾸 내 미팅에 연루(?!) 되고 있다는 거다. (나와 지인들은 이 분을 '최종보스'라 부른다. 숙제로 레퍼런스 드라마를 보면 크레딧에 이 분 이름이 나오는데 혼자서 연예인 보듯 '오앙 신기해' 한다. 나는 이런 면에선 영원히 철이 안 들 것 같다... )
"OOO 님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왜 빨리 자료 안주냐고 궁금해하세요."
"OOO 님이 작가님한테 참고하라고 준 레퍼런스인데요..."
"OOO 님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셨는지, 저희 불러서 설정을 이렇게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 주셨는데요."
"OOO 님이 페이퍼 보자마자 아이디어가 샘솟으셨는지 저희 바로 불려 가서 회의했는데요.."
"맘에 드셨나? 저 정도면 기분 되게 기분이 좋으신 거예요. 오늘 백상 시상식 가셔야 하는데 중간에 회의일정 잡으신 거라, 작가님 꼭 보고 싶으셨던 거 같아요."
알고 있다. 내겐 긍정적인 피드백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능력에 비해 과한 관심이 너무 무섭다.
최종보스가 들어오는 첫 회의 때, 담당 PD님께서 주저주저하며,
"저기... 오늘 OOO님 들어오는 미팅은... 그냥 혼나신다고 생각하시고 들어가셔야..."라고 했을 때도,
"아.. 네. 당연히 혼난다고 생각하고 왔어요."라고 배짱 좋은 척했다.
대기업 임원이 이제 막 들어온 인턴사원을 보면 얼마나 손댈게 많아 속이 터지겠나, 당연히 깔게 많겠지. 까라면 까여야지. 나는 그냥 연습생일 뿐이니까. 했었는데 막상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무슨 심보인지 너무 부담되고 두려워서 또 도망가고 싶어 진 거다.
게다가 그분은 내 페이퍼를 처음 보자마자 나를 간파하는, 역시나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계셨다.
"찐한 거 별로 안 좋아하죠?"
"네? 아.. 네... 저는 딱 로코 정도가.."
"응..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애들(주인공)이 자지도 않고, 자려고도 안 하지."
깊은 감정에 들어가는 걸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나는 그렇게 초반에 들켜버렸었다. (하지만 혹시 기회를 주신다면 애들을 꼭 재우겠? 습니다...라고 맘 속으로만 대답)
지금은 사무실 출입구에 프로필을 놓는 테이블은 없어졌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감당할 수 없는 양 때문이겠지. 프로필은 이메일로만 받는다는 안내만 붙어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무실까지 발품 팔아 프로필을 놓고 갔던 신인, 혹은 무명 배우들의 작은 선택지 하나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미팅하러 들어갈 때마다 저 안내문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군가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 얻으려는 기회를, 비록 연습생일 뿐이지만 운이 좋아 손에 쥔 내가 '하기 싫다'는 말을 이렇게 습관처럼 해도 되는 걸까. (변명하자면 정확히는 '하기 싫다'가 아니고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돼서 괴롭다'이다.)
재능이 부족해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능력에 비해 과하게 주어진 기회와 관심에 늘 감사하고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언젠가 유재석이 긴 무명 시간으로 고생하는 동안 자신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이후에 자신이 유명인이 되더라도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베풀며 살겠다고 절절히 기도 했다는 인터뷰를 본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은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고, 초심을 잃으면 지금 이룬 모든 걸 잃어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인다고도 했다.(이런 뉘앙스였습니다. 팩트 체크 안 해봤음)
말이 쉽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관성에, 또 타성에 쉽게 젖어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당연해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이 반복되면 행복을 자각하기도 쉬워진다. (라고 믿는다. 물론 생각하는 것과 실제 생활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님....ㅠㅠ)
그래서 나는 마음이 약해질 때, 또는 삐뚤어지려 할 때, 의식적인 행동들을 몇 가지 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무실 입구에 붙여져 있는 저 사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당면한 일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주어진 일에 감사하자는 마음을 다시금 다져보곤 한다.
*네. 사실은 이러합니다.
금주 최종보스 및 타기관이 함께하는 大미팅을 앞두고 작성 완료한 페이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얼마나 혼날지 이미 가늠이 되어서 '당연히 혼날 거야' '혼나는 게 당연하지'의 면역을 주기 위해 써 본 글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