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화의 한 달 전쯤이었다. 무언가 아빠의 컴퓨터 작업을 해주고 있었는데(컴맹인 주제에)
정신없는 내게 아빠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이제 수입이 없어서 있는 돈으로 살아야 해."
코로나의 정점인 시기라 아빠의 정기적, 비정기적 강의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사실 코로나가 아니라 해도 아빠는 공식 은퇴 후에도 꽤 오래 일했고, 내 친구의 아빠들보다 오랫동안 지속적인 경제생활을 이어온 참이었다. 그만하면 이제 놀고먹어도 되는데(나 같은 한량이 바라는 삶) 뭘 또 수입걱정을 하나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그냥 툭 하고 한 마디 뱉었다.
"다 그런 거 아냐?"
'그동안 오랫동안 일하느라 수고하셨잖아요. 연금 나오는데 무슨 걱정이셔요. 제 친구들 아빠들은 벌써 예전부터 쉬고 계시답니다. 이제 그만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돈 쓰며 생활하셔요'
같은, 다정함 따위는 1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꾸였다.
그런데도 그 대화를 다시 꺼낼 정도로 아빠에겐 나의 그 멋대가리 없는 한마디가 마음을 편하게 해줬나 보다.
'나 그래도 되는 거지?' '나 이대로도 괜찮은 거지?'에 대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확신과 확언.
아무리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되뇌도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역시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나 보다. 이토록 틈틈이 타인의 인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걸 보면. (어마어마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나 역시 아니, 특히 나처럼 수시로 휘청거리는 사람일수록 아무리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셀프 위로를 하고, '할 수 있다' 따위를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 두어도, 결국은 주변 사람들의 힘 있는 응원과 격려에 가장 힘을 얻곤 하니까.(자발적으로 힘을 낼 수 있는 내공이 커지면 더욱 좋겠지만)
나도 모르게 무심코 뱉는 말 한마디에 주변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왕이면 따뜻한 말로 긍정적인 기운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선 너무나 습관화되어 있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 태도, 말버릇부터 고쳐야겠지. (참 안 고쳐지는데... 나쁜 말 할 때마다 자동이체로 돈이 빠져나가야 정신 차릴 듯....)
번외 <제작사 첫 미팅 전까지 부들부들 떠는 나에게 힘을 준 친구들의 말>
친구1 : 니가 또 너무 잘하려고 하고, 양심적이어서 그런 거야. 그냥 6개월 알바 한다고 생각하고 되는대로 해.안되면 그냥 먹튀 하라고.
-그래. 상황상, 성격상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말이라도 해본다.... 먹튀해도 돼.. 먹튀.. 먹튀...
친구2 : 그 사람들이 너만 담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담을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맞다. 자의식 과잉이다.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물어보니 지금 우리 팀에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는 나 하나라고 했다... 살려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