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서일까? 생각해 보지만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잘 울었으니까.
단지 우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타인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적었을 뿐, 나는 쭉 잘 우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너는 늘 울었다고 하는데 니가 우는 걸 본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세어봤다. 친구 중에 두 명 정도 내가 우는 걸 봤다. 울었다고 얘기 들은 사람은 20명은 될 거다... 친구가 20명이 되는지 세어보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근데 또 나이 들어 더 잘 우는 게 어느 정도 맞기도 한건 어릴 때와 달리 우는 이유와 감정의 결이 조금 더 세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릴 땐 화나서, 슬퍼서, 속상해서... 등의 큰 카테고리만 존재했다면 지금은 그 카테고리 안에 미안해서, 안타까워서, '네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등등의 좀 더 복잡하고 세밀한 이유들이 엉켜있다.
샤워를 하다가 힝.. 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지하철 안에서 눈물이 나서 괜스레 바깥 풍경을 멀리멀리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헤아린 네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올해는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덕질로 채워진 시간들이었다.(파산 직전이다.)
얼마 전 최애 A(최애가 네 명쯤 돼서 최애라는 단어의 뜻과 일치하지 않지만... )의 MD(굿즈) 2차 오픈이 있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MD는 실용성이 없으면 사지 않는다'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에 예쁘긴 하지만 이번엔 실용성이 없으니 사지 않겠다고 친구들에게 공언해 놓고 온라인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참을 수 없는 귀여운 디자인에 매료된 나는 고르고 골라 친구들과의 덕질방에 의견을 묻는다.
'둘 중에 하나 사려고.. 뭐가 나을까?'
'예약판매 MD는 돌아오지 않아. 둘 다 사야지'
'안 산다더니 왜 사는 거야?'라는 따끔한 충고를 감내하고 의견을 받으려고 했던 나는 결국 두 개 다 사고 만다.(덕질하는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은 것부터가 잘못)
그리고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
"곧 최애 B 콘서트 하니까 또 MD 나올 텐데 그럼 그때 하나도 안 살게"
물론 이 말은 뱉은 나도, 들은 친구들 누구도 믿지 않았다.
B의 MD가 공개되었다. 종류도 다양하다. 비싸기도 비싸다. 하나도 안 사겠다는 말은 언제 했냐는 듯 나는 또 고민을 시작했고 최종 후보 두 가지를 내놓는다. 그래도 이번에도 많은 품목 중 하나만 사겠다는, 정말 뼈를 깎는 아픔을 겪으며 나와 절충하고 협상한 결과였다.
'둘 중에 뭐 살까?'
친구 둘의 의견이 갈렸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늪에 빠졌다.(진로 고민쯤 되는 듯) 그러는 와중 현판(현장판매)은 1시간도 되지 않아 품절되었고, 온라인 판매는 시작되자마자 서버가 터지더니 고민하던 품목 1개는 금방 품절되고 말았다. 난 무엇을 위해 고민했나?
나머지 한 개 품목이 남았다. 반지였다. 이제껏 샀던 MD 품목 중 가장 고가였다. 과연 저걸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며칠을 고민했고 온라인 판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리고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 아무리 소속감을 주는 거라지만 이미 반지를 두 개나 끼고 다니는데 굳이? 없어도 되는 거잖아?'(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제까지 니가 산 모든 MD 가 다 그런 건데?라는 반문은 덮어두기로 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카톡은 거의 매일 해도 전화는 만날 때 아니면 좀처럼 할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하고 받았다. 친구의 목소리는 꽤나 다급했다.
나 : 응?
친구 : (다짜고짜) 반지 샀어?
나: (다짜고짜 무슨 말이야, 하지만 답은 한다.) 아니?
친구 : 아.. 다행이다. 오전에 전화한대 놓고 깜빡했어. 내가 샀어.
나 : (잘못 들었나) 어??
친구 : 내가 샀다고. 니 반지.
나 : (너 도대체 무슨 말하는 거야)에???????? 왜???????
친구 : 그냥. 이번에 너네 집에서 3일 동안 있기도 하니까.. 숙박비 겸. 선물!
그 주엔 친구 최애 중 한 명의 콘서트가 있었다. 친구는 당연히 올콘(전체 공연)을 예매했고 그래서 2박 3일 동안 서울의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한터였다. 그래서 고마우니 숙박비도 낼 겸 내가 갖고 싶어 하는 MD를 선물로 구매했다는 거였다.
"아니, 어디서 사는지 어떻게 알고?"
어디서 사야 하는지 검색을 해서 굳이 그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한 후 결제 했다고 했다.
"주소는 내가 알고 있는 니 집 주소로 했는데 그쪽으로 해도 돼?"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전화를 끊고 씻으러 들어갔다. 샤워기를 트는데 울컥하고 눈물도 같이 터졌다.
요즘 나의 경제사정은 그리 좋지 않다. 아니, 조금 나쁘다. 친구는 그걸 알고 있었다. 갖고 싶은데 참아야만 하는 내 마음을 친구는 헤아렸다. 숙박비는 명분이고 작아지는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거다.
'움츠러들지 마. 니가 돈이 없지 최애가 없냐?' 같은.
그 주 주말은 나도 친구도 각자 최애 공연을 즐기느라 한껏 흥분되어 있었다. 서로 최애를 자랑하고 후기를 나누느라 밤은 깊어가기만 했다.(각자 듣기보다 말하는 게 목표.)
걷기 좋아하는 친구는 서울사람(?)처럼 최애의 단골 조깅 코스로 한강 공원을 걷고 싶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늘 그렇듯 나무늘보처럼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지인들의 단톡방에서 현타오기 딱 좋은 소식을 접했다.
이런 어른(?)스러운 소식과 현실적인 이야기 앞에 행복해 죽겠다며 어젯밤 최애 사진으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도배해 놓은(한 장을 고를 수 없어 gif 파일로 편집)나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순식간에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너 나이가 몇이니? 니가 지금 그럴 때니?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야? 남들 지금 뭐 하고 사는지 안 보여?'라고 호통칠 것 같다. 물론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냥 내 자격지심에 그들의 속마음까지 왜곡했다. 어제까진 너무 행복했는데 갑자기 타인의 이야기 하나에 이토록 비참해질 정도로 여전히 나는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인가 스스로 초라해졌다.
"나... 현타 왔어." 집으로 돌아온 친구를 붙들고 이 말부터 뱉었다. 얘기를 다 들은 친구는,
"..... 음... 현타 왔겠다. 그럴만한 상황이네... 참.. 나 같아도 그랬겠어.... 근데 뭐... 우리도 나름 잘 살고 있잖아?"
짐을 다 챙겨서 현관문을 나서며 친구는 내 눈을 보며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괜! 찮! 아! 사람마다 다 다른 거야. 우리는 우리 즐거운 것 찾아서 살면 되는 거야!"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이걸 즉시 대화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는 게. 내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본가 집으로 내려갈 일이 있었기에, 친구와 급 만남을 약속했다. (J인 우리가 하루 전에 잡은 일정이라면 이건 몹시 즉흥적 행위)
몇 년 전부터눈여겨보고 있으나아직 본격 덕질 ZONE에는 넣지 않고 있는 나의 덕질예비 후보 배우(덕질이 취미입니다.)의 책과 친구 최애의 책을 서로 바꿔서 읽어보기로 했기에 나는 책을 가방에 달랑달랑 넣고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우리 OO이 책이야. 내려오면서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진짜 웃은 데서 또 웃어."
(아직 최애 아닌데 말할 때 자꾸 이름 앞에 '우리OO이' 대명사 사용)
"우리 OO 책이야. 잘 봐줘." 친구도 자신의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책은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한 장도 열리지 않은 채 내 가방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집으로 오는 지하철을 탑승한 순간이 되어서야 내 손에 잡혔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뭔가 후드득 하고 떨어졌다. 친구가 넣어둔 책갈피인가 했는데 아니다. 편지였다. 당연히 책을 펼치기 전 편지부터 개봉했다.
친구는 여전히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내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을까 봐, 그래서 자책하고 있을까 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너보다, 너의 선택을 믿는 너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했다. 편안하지 않았던 유년 시절, 도망가는데 에너지를 다 써서인지 그 시절의 기억을 거의 삭제당한 자신의 삶에 여전히 일상을 공유하면서 소중하고 행복한 모든 일에 함께 해주는 내가 있어서. 그러니 나이 드는 게 싫지만은 않다고. 우리는 지금을 사랑하고 즐기면 되는 거라고.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지상으로 이동하는 2호선 구간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응시했다.
"그때 안 죽고 버티길 잘했어요."
아직도 내가 한 번씩 떠올리는 2010년 드라마의 대사이다.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뱉었던 첫마디.
언젠가 나도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까, 했었다.
그때 생각과 마음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요즘은 자주 저 말에 공감을 한다. 그게 나이 들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삶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삶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고, 계획하는 인생을 보란 듯이 방해하는 요소들로 끊임없이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길 잘했다고 꽤 자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최애도 있고(심지어 많고) 그 즐거움으로 삶을 버텨가고 있는 내 마음을 이토록이나 깊이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