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여행에서 느낀 점/유사 에필로그
참으로 패키지여행과 상극인 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몇 번의 패키지여행을 다니면서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고 또 그 나름의 장점을 찾아보곤 한다.
그 장점 중 하나라면(사실 내겐 장점이라고 볼 수 없지만) 여러 군상의 사람들을 짧은 시간 내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업적 특성... 은 아닌 성격적 특성으로 그들의 특징과 성향들을 단시간에 파악하면서 사람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일명 캐릭터 쌓기)
이번에 내가 느낀 바는 크게 세 가지이다.
미래에 나는 어떤 얼굴을 가지게 될까?
가난한 여행자이다 보니 패키지 상품에서도 고급이나 럭셔리 상품 등 고가의 상품은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행의 목적지가 그리스 일주, 캐나다 동부 이런 식이다 보니 대부분의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급을 떼고 온 사람들이 상당수였다.(동남아, 서유럽 등은 이미 오래전에 다녀온 사람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는데(여행사와 일정 조율이 계속 안 되는 와 중 급기야 그 직원이 내게 "크로아티아 일주는 다른데 다 가고 가실 데 없는 분들이 가시는 거라 모객이 좀 어려워요"라고 푸념했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외 출장이 잦은 분도 있었다.
그중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중년의 두 부부.
한 부부는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비즈니스를 타고 왔기에 내가 눈여겨보았는데(부러워서ㅠㅠ)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영국에서 오래 주재원 생활을 했고 지금도 일을 하시며(큰 회사 임원급인 걸로 추측)그리하야(!) 아들 둘 모두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한다. 아줌마는 말 그대로 온실에서 쭉 나고 자라신 듯 보였는데 본인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전혀 인지 못하는 것 같았다.(태생적으로 쭉 잘 살아온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적당히 애교 섞인 말투에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한껏 예의 있고 교양 있는 태도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졸부들의 돈 자랑, 자식 자랑 패턴이 없어서 좋았다. 진짜 부자는 그들이 살아온 인생이 너무 당연한 거라 자랑하지 않는다지.)
그리고 반대로 유독 튀었던 중년의 부부 중 아내 분.
뭐 특별히 유난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캐릭터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불편했다. 이미 억센 말투에서(언어에 많이 민감) 반감이 생겼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개인적인 질문에서 질리고 말았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아줌마의 캐릭터였고 그런 모습은 이후에도 몇 번 목격되었다. 나도 모르게 식사할 때 4인 테이블에서 그 부부를 피하게 되었고 반대로 일명 영국 부부와 식사를 함께 할 때는 처음으로 먼저 질문도 했다.(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패키지에서 나는 웬만하면 말을 길게 섞지 않고 대답 위주의 대화만 한다.) "영국이면 런던에 계셨던 거예요?"라는 질문. ㅋㅋㅋ(그때 런던에 한참 꽂혀있을 때라 ㅋㅋㅋㅋ)
그래서 생각했다. 나이 들수록 친했던 친구들과도 어쩔 수 없이 소원해지고, 사는 모습도 많이 변하는데 저 나이쯤 되면 더욱 심해지겠구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 얼굴이, 말이, 표정이 인생을 다 드러내겠구나. 나는 둘 중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이 될까? 당연히 교양 있는 아줌마가 되고 싶지만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므로 그건 절대 안 될 거라고 바로 포기했다. 하지만 적어도 환경이 나를 거칠게 만드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기 위해 내 노력도 동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안 물어봤는데? 이상하네.
모녀가 왔다고 하면 모두 똑같이 "어휴, 좋겠다. " "딸이 효녀네"(사실 이건 아님 ㅋㅋ)란 반응을 똑같이 내놓는다. 그중에서 특히 아들만 가진 부부들의 반응은 몇 년이 지나도, 목적지가 어디였든 천편일률적이었다.
"우리 집은 딸이 없어서..."
"어휴, 진짜 너무 부럽다.."
당연히 엄마 쪽의 반응이다. 딸도 딸 나름이고 요즘은 아들들도 엄마랑 많이 다닙디다.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 애매모호하게 웃으며 넘기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런 시샘은 피할 수 없었는데 엄마와 다정히 손을 잡고 걷거나 하면 "딸이 없는데 부러워 죽겠네."
"너무 샘나니까 덜 다정하게 다녀요." 라며 농담 섞인 공격을 받곤 했다. 여기까지는 늘 있던 패턴이다. 그런데!
"모녀가 너무 보기 좋네요. 저도 딸이 있거든요. 지금 대학생이에요."
"우리 딸 하고도 예전에 동남아 갔는데 너무 편하고 좋더라고요. 딸이랑 가면 그냥 다 해줘. 난 따라가기만 하면 돼. 내 보호자거든."
"딸이랑 자유여행 가니까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까 알아서 다 정해놓고. 길도 찾고."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고.(남 일에 심하게 관심 없는 타입) 처음에 한 분이 그런 얘길 할 때는 그렇구나.. 끄덕끄덕 그러고 말았는데 딸을 가진 부모들은 '딸이랑 와서 좋겠다' 이후에 일제히 '나도 딸이 있어요. 나도 딸하고 여행 가봤어요'의 2절이 약속이나 한 듯 이어지더라는 거다.
아들을 가진 부모들이야 애당초 딸하고의 오붓한 여행을 이번 인생에서 포기했으니 '어이고 부럽소' 하고 쿨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딸이 있는 부모는 '좋아 보이네. 나도 딸이 있어. 이번 여행은 같이 못 왔지만 나도 그런 그림 언제라도 만들어 낼 수 있어.'라는 복잡한 마음일까.
질투란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걸 봤을 때의 마음이고 시샘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걸 봤을 때 슬픈 마음이라던데 그런 설명이면 될까. 잘 모르겠다.ㅋ
그만 좀 하자. 나이 타령
어떤 날 저녁은 중식이었다. 중식 테이블 특성상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여럿이 앉아 먹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보통 4~5명씩 앉아 먹던 식사 시간과는 좀 다른 풍경이 그려졌다. 일행 중 좀 나이가 있으신 분 옆에 중년의 아저씨가 나이를 물었다.
"나이가..?"
"뭐... 적당히 먹었어요."
"적당히... 면 환갑?"
"뭐... 그쯤 됐겠지요..."
"보통 그쯤...이라 대답하면 그거보다 많은데..."
대답하시는 아저씨가 처음 대답에서 '적당히'라고 둘러 대는 것에서 나는 대답하기 싫어 하심을 바로 느꼈다. 그런데도 집요하게 나이를 묻는 아저씨를 보며 저렇게 말하기 싫다 하시는데 왜 저렇게 꼬치꼬치 캐물을까 싶어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아니. 나이를 정확히 알아야 내가 호칭을 정하니까요. 그럼 그냥 형님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악의는 없다. 그냥 술 한잔 하면서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다는 것을. 그런데 '악의 없고' '몰라서'란 말이 모든 일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면피 책이지 성인은 '모름'과 '결과론적인 악의'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난 그놈의 '윗사람 대접하기 위해 나이를 알고 싶다'는 말도 싫다. 그 말의 속 뜻에는 반대로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면 대접받겠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나이를 떠나 동등한 사람대 사람으로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순 없는 건가. 잠깐 보고 헤어질 쌈빡한(?) 패키지에서 만난 일행이라면 더더욱.
몇 달 전 런던에서 산다던(오늘 메인 테마 런던?ㅎㅎ) 사람이 계속 내 나이에 집착하길래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며. 외국은 이렇게 대놓고 계속 나이 얘기하는 거 무례한 일 아니니?" 했더니
"그...렇긴 하지." 하길래
"근데 넌 왜 그래?"
라고 쏘아붙인 적이 있다.(이렇게 화가 많아서 교양 있는 아줌마 되긴 글러먹었다.)
정말 이 나이 문화 지긋지긋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번 여행에서 내게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아, 호텔 기프트 샵에서 조카 선물을 샀다니까 "조카가 있어요??"라며 어떤 아줌마가 놀라움을 표했던 적은 있다. 질문할 시간 없이 바로 이동을 해서 다행이었던 위기상황(?)이었다. 내 나이가 까발려졌거나, 언니가 너무 일찍 결혼해서 등등... 구구절절 가정사가 나왔거나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할 타임이었는데 휴... 아찔했다.
(끝맺음 없는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