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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Sep 07. 2019

왜 맨날 나만 불행해?

벗어날 수 없는 부정적 감정의 늪

너무 잘 쉬고 있는데도 찾아든 감기의 원인과 약을 먹어도 계속되는 컨디션 난조의 이유를 사실 나는 알고 있다.

 큰 병이 아니고서야 병원 가면 늘 의사 쌤이 하는 얘기,

 "잘 드시고, 푹 쉬시고, 음주랑 기름진 음식 자제하시고... 블라블라..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그런 얘기 나도 하겠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뻔한 조언(?)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뭐 사실 별 다른 얘기 할 게 있겠나 싶긴 하다.

정답이긴 하니까. 특히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란 것은 내 몸이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 타고난 건강체이지만 워낙 예민한 탓에 조금만 예민 촉수가 가동되면 어디고 바로 탈이 나고 마니까. 

 "그게 약한 게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종종 있긴 하지만 난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다. 왜냐면 아직도 잠 안 자고 밤샘 놀기도 쌩쌩히 잘하고 여행 파트너들은 내 체력을 무서워(?)하니깐. 

나의 경우에는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신체가 깃드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지금 아픈 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마음이 아플 때가 되었으므로.


 늘 칭찬과 인정에 갈급했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졌다. 그것들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예상치 못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위로와 응원이 필요했다. 그래야 '받아들임'을 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러려면 내 고통스러운 결과물과 치부를 드러내야 했고 그것은 자존감 없이 자존심만 센 내가 허용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것과 이룬 것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남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주는 과정은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준다 한들 응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왜냐하면 누가 보기에도 내 상황은 객관적으로 괜찮지 않고 인사치레로 건네는 위로에서 내 불행이 그들의 행복을 확인시켜주는 도구가 되는 것을 느끼는 건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일이었기에.

 내 입으로 "너보다 더 심한 나도 있어. 나 보고 위로받아."라고 하는 것과

타인의 입에서 "니 얘기 듣고 보니까 그래도 내가 낫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비록 이렇게 직접적인 언어적 수단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비 언어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다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못하고 잡아내는 내 태생적 예민함을 탓할 수밖에.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할 수 없으니 답답했고 공허함과 외로움은 커져가는데 오래된 방어기제로 울지도 못했다.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으나 들을 방법이 없었고 우울과 불안 세포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듯했다. 브런치를 들락거리며 혹시나 한 구절 위로받을 수 있는 글이 있을까 뒤적이며 나를 달래는가 싶다가도 이내 또 너무 잘 사는, 잘난 사람들을 보며 좌절했고 침통해했다. 

 오래전에 외장 하드 정리를 하다가 교육원 폴더를 통째로 날린 일이 있었는데(어차피 '시간 들여 만든 쓰레기'라고 생각해 놀라긴 해도 아까워하진 않았다 한다. 과제물은 카페에서는 다운로드가 가능했고) 얼마 전에 메일함에서 우연히 찾아낸 대본이 있었다. 처음엔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게 뭐지? 내껀가?' 하고서 읽었는데 표지에 기수와 반이 적힌 걸로 봐서 전문반 때 최종 점수에 반영할 추가 습작물이 있으면 내라고 해서 어영부영 하나 만들어 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름 수미상관법(!)을 배치하여 썼는데 뭐 예상되듯 개연성 부족인 스토리에 구태의연한 전개 방식이었다.(지금 더 잘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게 함정....) 

 주제는 "공포. 그 자체만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 라는데(얼씨구)

작의는 더 가관이다.

공포는 그 자체의 본질보다 공포심을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일상과 다르지 않은 어떤 순간에서 머리칼이 쭈뼛하고 서는 느낌, 그 전과 이후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이미 ‘공포’를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느껴지며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평소 내가 두렵다고 느끼거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공포가 시작되지 않을까?

오글거려 차마 보기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가 쓰긴 했으니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는 얼추 알겠다.(나만 아는 얘기를 하지 마세요.라고 그렇게 수업 시간에 배웠건만)

 내게 친숙한 걱정, 불안, 우울과 같은 감정도 결국 같은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어난 사실보다, 내게 닥친 현실보다 지금으로  인해 미래는 더 암울하고 절망일 거라는 혼자만의 확신. 단언. 어항 밖의 고양이를 본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스스로 질식하고 마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숨을 고르게 쉴 수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또 이때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드라마라면, 소설이라면 멋지게 희망을 제시하며 마무리하겠지만 내 현실의 글은 그렇지 못하다.  무너진 일상이 내일은 아주 조금이라도 더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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