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의 밀당
증상의 패턴과 기간으로 보아 아무래도 감기가 아닌 것 같고 다른 염증일지도 모른다는 친구의 말에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고 감기약을 먹었는데... 감기가 아닌 것 같아요.. 목이 아픈 건 아니고 연기 마신 것처럼 갑갑하고.. 가래도 있고.. 밤에는 마른기침도 나는데... 보름쯤 됐거든요."
의사쌤은 내 목을 들여다보고 코를 여러 번 쑤신(!) 후에
"비인두염인 것 같은데.. 코가 뒤로 많이 넘어가고 있네요. 약 드릴게요."
"특별히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네."
늘 여행을 앞두고 아픈 징크스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적중하길래 조마조마했다. 쫄래쫄래 약국행.
"이 약 조금만 드시면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 푹 쉬세요."
"저 엄청 쉬고 있는데.."(여행 결정 전)
"더더 쉬세요."
잉. 어떻게 해야 더 쉴 수 있는 거지. 그렇구나. 역시나 이것은 몸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로구나.
그런데... 전혀 차도가 없다. 증상이 오래되어서 그렇지 심하진 않아서 나도 몇 번 먹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런 내 바람을 배신하고 약 먹은 지 이틀째부터는 자는 동안 기침을 하는 없던 증상까지 생겼다.
한마디로 악화됨.
아무래도 약을 다 먹고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가봐야겠다 생각했던 그 날밤, 기침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새벽에 일어나고 말았다. 일단은 자야겠어서 이 기침을 멈출 방법이 없나 비상약을 다 뒤졌다. 증상에 맞춰지어 온 약도 안 먹히는데 다른 약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러다 발견한 항생제. 지난번 손톱 갈라짐으로 대학병원 가서 조직 검사해보라는 동네 병원 의사 말에 화들짝 놀라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당일 대기 예약 넣고 진료받고 받아왔던 약.(무슨 이런 일로 여기까지 왔냐는 의사의 눈빛이 그렇게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ㅋㅋㅋ)
약봉지에는 '각종 세균감염증에 대한...' 어쩌고 저쩌고 뒷말이 기재되어 있었다. 각종이라고 하니까 먹어도 되겠지. 일단 먹고 보자. 두 알 남은 항생제 중 한 알을 털어 넣고 다시 누웠다. 몇 번 작은 기침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하다.
이것 봐라? 진짜 너 대단하구나?
다음날 부리나케 다른 병원으로 갔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는데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고,
"(주섬주섬 가방에서 약봉지 꺼내며) 이렇게 약을 받았는데 전혀 듣질 않아요. 기침은 더 심해졌고요."
증상이 2주가 넘었다는 말에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고 오랜다. 불과 한 달 전 건강검진 때 찍은 폐 엑스레이와 코 엑스레이까지 연거푸 찍었다.
"여기 코 옆이 꽉 차면 비인두염일 가능성이 커요. 근데 뭐 심한 건 아닌데... 폐도 아무것도 없고.. 다 깨끗한데.. 보통 오한이나 열도 동반되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시고.. 비인두염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왜 약이 안 듣는 걸까요?"
"글쎄요...."
글쎄요? 잘 먹고 잘 쉬고 스트레스받지 말란 소리는 하지 마ㅋㅋ
"항생제를 며칠 드릴게요."
"넵!!"
사실 저도 항생제 처방받으러 온 겁니다요.
염증약, 항생제, 기침 시럽, 자기 전에 먹는 약 까지 약을 한 아름 받았다.
그리고 항생제를 3번 먹은 현재까지 잘 때 기침은 아직 있지만 그 외 일상을 괴롭히던 증상들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항생제. 너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전에야 의사도 환자도 별생각 없이 항생제를 처방하고 복용했지만 요즘은 다들 항생제에 예민하지 않은가.
항생제를 처방하겠다고 할 때마다 의사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인다.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주저하면,
"항생제는 그럼 빼고 처방해서 드시다가 안 나으면 그때 드릴까요?" 금세 말을 바꾼다.
독한 약일수록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그런 독한 약을 오래 먹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없으면 안 되는 약이니까 아직 인류에 남아 있는 거잖아.
식후 30분을 칼처럼 지켜 먹으려고 약을 까놓고 멀거니 손바닥의 항생제를 바라본다.
다른 약과 생김새가 별다르지 않은데, 보기엔 똑같은 약 한 알인데 네 안에는 무엇이 있는 거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길래 꼭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그만큼 미움도 많이 받고 있는 거니.
문득, 항생제만큼만 살아도 잘 사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에 필요한 역할로 꿋꿋하게 존재하는 것.
내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파서 갬성 폭발인지, 자꾸 이런 생각 해서 아픈지는 모르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