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Nov 05. 2019

공정한 곳이 한 군데는 있어야지.

V리그 열성 희귀 팬

 겨울 극혐자인 나에게 겨울이 왜 싫으냐고 물으면 앉은자리에서 10개는 댈 수 있고 서술하라고 하면 적어도 30개는 써낼 수 있다. 그럼 겨울의 좋은 점이 하나도 없냐고 묻는다면 딱 하나 대답하겠다.

 '배구를 볼 수 있다.'

 남자들이 많이 좋아하는 축구도 아니고, 여자 팬이 많은 야구도 아니고 배구를 좋아한다고 하면 열에 열 반응은 읭?이다. 스포츠를 안 좋아하게 생긴(?) 데다가 취향이 특이하단다. 뭐 새롭지 않다. 늘 봐왔던 리액션이다. 흰 피부에 몸매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구먼. 나름 확신을 갖고 이유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 있긴 있다. 흰 피부에 몸매 좋은 남자 때문은 아니다.(이런 남자들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여자 경기를 안 보는 건 아...... 아니다...)


관성의 이유로 들자면 그냥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쭉 봐왔기 때문이다.(음.. 어렸을 때 A매치도 보러 갔었네..) 배구 경기만큼은 꼭꼭 챙겨보는 아빠로 인해 자연스럽게 봐왔는데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가 될 순 없다. 지금은 집에서 배구를 보는 사람이 나하고 아빠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혹 5세트까지 가는 흥미로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빠에게서 톡이 온다.

 '배구 봤나?' (재밌어 죽겠는데 얘기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야.)

 나는 답한다.

 'OO 멍충이들. 다 이긴 경기를 거기서 지네.'(나도 봤어! 핵잼 핵잼!!)

 와... 사이좋아 보이는 부녀다.ㅋㅋㅋ 


 다른 경기에 비해 배구의 룰은 초 단순하다. 터치 OR 노터치/인 OR 아웃만 알아도 경기 내용 80%는 이해할 수 있다. 오락실 게임도 싫어하는 나에겐 최적화된 셈이다. 

 배구장 말고 야구장 직관도 가보자고 나를 꼬셔댄 이가 그동안 꽤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 야구 하나도 몰라."라는 말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몰라도 돼. 그냥 봐도 재밌어."
 "진짜 하나도 모르는데? 나 홈런밖에 모르는데?"(백치미 뽐내기)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은 좀 당황했고(경기 중에 질문만 안 하면 된다고 했다..) 여자들은 그래도 괜찮다며 날 위로(?)했다. 

 흥. 그런 대접까지 받으면서 가고 싶지 않다!!


 사실 진짜 이유는 이거다.

 공정함. 공평함. 합리적.

 사주 풀이를 해도 바름과 정직, 원칙주의가 지나쳐 융통성이 없는 게 흠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나다. 그런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실제 성격과 꽤 맞는 부분이어서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너.. 그런 게 좀 있지."라고 했다.(엄마가 낳았잖아.... 내 성격은 엄마 빼박인데..)

 어느 정도냐면 예능 프로에서 퀴즈를 풀 때도 갑자기 마지막 문제에 큰 배점을 주면 화가 난다.(내가 응원하던 팀이 지금까지 일등이라면 더더욱)

 아니, 지금까지 그럼 맞췄던 건 뭐야?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난이도에 맞춰서 문제 배점을 해놓고 시작하던가? 마지막 문제 하나만 풀면 이기는 건데 이렇게 불공정한 게임이 어딨어?

 예능에서 흔히 있는 구조인데 다큐로 받는다. 그럴 거면 도전 골든벨을 보지 그러니.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경기 외적인 요소가 변수로 작용하는 스포츠는 그래서 반갑지 않다. 몸싸움이 많은 경기도 싫다. 심판 몰래 은근슬쩍 반칙하는 것은 치졸해 보여서 싫은데 그걸 경기의 일부라고 하는 것도 왠지 억지스럽다. 상대편도, 우리 팀도 그래도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치러지는 경기는 정정당당하지 않은 느낌이라 불편하다. 

 심판의 영향이 큰 경기 또한 싫다. 늘 공정성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김연아 금메달 박탈 사건 때 극대노 했음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육상경기 좋아하겠네요?" 지인이 물었다.

 "달리기 엄청 좋아합니다." 대답했다. 천분의 일초까지 정확하게 판독한다. 매력적인 스포츠다.ㅋㅋㅋ

 얼마 전엔 사격도 실내경기인데 양궁도 실내경기로 해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다.(엄마한테 물어서 뭘 어쩌자는 걸까.)

 "바람을 이기는 것도 선수 능력이지." 

 "그 바람이 동일하게 부는 게 아니잖아."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양궁 꿈나무도 아닌데 참 별 걱정을 다 한다.


 배구는 이렇게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이 다 배제되어 있다.  심판의 오심도 있지만 비디오 판독이 생기면서 대부분의 오심을 다 잡아낸다.(올해부터는 오심일 경우 세트당 비디오 판독 횟수도 무제한으로 변경되었어요. TMI) 몸싸움이 없다 보니 매너 경기로 불린다. 공격에 성공하면 반드시 상대편 코트가 아닌 돌아서 우리 코트 내의 선수들을 향해 세리머니를 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지난 아시아게임에서 (아마도) 대만팀이 우리나라 진영을 향해 세리머니를 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엔 흔치 않은 일인데 코트 내에서 두 선수가 시비 붙은 적이 있었다. 정말 드문 일이라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장면을 지켜봤는데 앞뒤 상황을 못 봐서 당시엔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중 한 선수가 다른 팀 선수와 또 시비가 붙은걸 보고 '저 노무 자슥 인성이 글러 먹었구나'생각했다. 배구 경기에서는 정말 없는 일이었기에  한 선수가 연달아 두 경기에서 문제를 일으켰단 자체만으로 확신을 하기에 충분했다. 실력의 문제인지, 개인적 문제인지 혹은 그 일로 어떤 불이익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선수는 이후부터 현재까지 코트에서 보지 못했다.

 그제 경기에서는 스파이크를 한 공이 의도치 않게 상대 선수 눈에 맞자 공격을 한 선수가 꾸벅 고개를 두 번 숙이고도 미안한지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엄마 미소를 지었더랬다.(신인은 2000년생도 있다고 한다...)


 아빠 말로는 네트를 쳐 놓고 하는 경기는 실력 차이가 현격히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운으로 이긴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본 경기도 실제로 그랬다. 약팀이 예상을 뒤엎고 강팀을 이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운보다는 죽어라 뛰는 투지, 또는 연발되는 상대의 범실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었지 그날의 타로운, 행운의 여신이 들고 싶은 손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변수와 운이 작용하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런 경기는 재미가 없다고 한다. 반전이란 게 없으니까. 너무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니까.

 아니. 나는 그래서 좋다. 상대에 대한 예의도 갖추면서 노력과 실력으로 공정하고 정직하게 결정되는 경기라서.

 '될놈될'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나는 듣기 좋지 않다. 나는 될놈될이 아닐뿐더러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눈병 나는 사람인데 운까지 실력이라고 하면 너무 비참해진다. 그 말이 듣기 싫은 건 내 자격지심이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는 것 또한 무기력하게 패배감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당장 현관문만 열고 나가도, 카톡의 단톡 방만 들여다봐도 공평하지 않은 일은 차고 넘친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로 위로해봐도 왜 '원래 그런 것'의 혜택은 나만 피해 가는지 속이 쓰리다.  

 운, 인맥, 금수저로 될놈될은 TV에서, 주변에서 이미 너무 많이 봤다. 지치고 피로하다.

 그러니까 마음까지 추운 겨울엔 정정당당한 배구를 보며 불공평과 불공정으로 점철된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거다.(V리그 홍보대사 같은 마무리)

매거진의 이전글 늦게 끊어서 미안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