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Nov 03. 2019

늦게 끊어서 미안했어요.

114 상담원이 내게 준 것

 통신사 114에 전화를 걸었다. 

 강제로 사용했던 단가 높은 요금제 의무 사용기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위약금 발생이 없는지 상담원을 통해 확인을 받고 요금제를 변경하라고 했던 대리점 사장님의 말이 있었기에 굳이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전화를 걸었다. 10월 말에 이미 한 차례 전화하고 확인을 받았으나 11월 1일에 변경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말을 듣고 며칠 기다린 후 다시 건 두 번째 전화였다. 


 "지금 무제한 요금제 이용하고 계신데 변경하시려고 하는 요금제는 데이터가 적어서..."

 "아.. 그건 제가 무제한 요금제를 쓰느라 일부러 억지로 썼던 거구요, 변경하기 전에는 한 달에 1G도 사용하지 않았거든요."(사실이다. 내 휴대폰은 전화 기능이 있는 시계일  뿐이니까.)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 요금제 정도는 사용하시면 가족 간 데이터 공유도 되는데요.."

 "아.. 그 기능도 한 번도 쓴 적이 없어요. 부모님도 별로 안 쓰시거든요."(도무지 장사치가 들어올 틈이 없는 철옹성)

 "그러시구나. 혹시나 손해를 보실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요금제로 방금 변경 해드렸구요. &&^$(#&% 관련하여 안내 문자를 보내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별거 아닌 것 같아서 알았다고 했다.)

 "변경 완료되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움찔했다. 무엇이 더 감사하다는 말일까? 고객이 감사하다고 하면 더 감사하다는 말로 응대하라는 매뉴얼이 있는 걸까? 

 전화상담을 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져 한참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때가 있었다. 시사프로에선 그들의 문제를 다루며  고객이 어떤 진상을 피워도 절대로 전화를 먼저 끊어서는 안 된다는  명문화된 규정이  매뉴얼로 만들어져 있다 했다. 통화가 끝나가며 그 말이 다시금 떠올랐고 그래서 나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끊고 상담원이 보낸 문자를 눌러서 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고객님... 먼저 끊어주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왜 감사하다고 했지? 굳이 고르라면 '죄송합니다'라고 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멍충 멍충ㅋ)

 종료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눌러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하고 6~7초? 동안 내가 먼저 끊기를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몇 초의 시간이 자꾸 생각난다. 왜일까. 미안하다고 하기엔 사실 감정과잉이다. 그저 불안하던 내 마음이 그 몇 초도 그냥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일을 했을 것이다. 회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을 유도해라, (나처럼) 안 먹히는 사람들에겐 순서에 따라 변경을 해라,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라, 그리고 고객이 전화를 먼저 끊지 않으면 몇 초간 기다렸다가 전화를 끊어달라 말해라 등등.

 그녀는 그 몇 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시 치솟는 불안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나를 변명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그렇게 눈 앞에 흘러가는 시간을 마냥 지켜보면서 다시 또 불안해하고 무기력이라는 핑계 뒤로 숨으면서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혼자 하고 있었다.

 숨 죽이며 먼저 전화를 끊어주길 기다린 상담원이 내게 준 깨우침은 사실 '미안함'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하루의 작은 순간에 저토록 정성을 들인 적 있었던가.

 아니라면 지금 나는 얼마나 내 시간을 헤프게 쓰며 나를 방치하고 있는 걸까.

 정신이 들었다. 든 정신이 다시 나가지 못하게 꽉 붙잡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한때는 사기를 잘 쳤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