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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Nov 14. 2019

진짜 같은 거짓말이 필요해.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오래 묵혀온 누군가의 거짓말을 알고 말았다. 화가 났다기보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거짓말의 내용보다는 진실이 드러난 상황이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이후 내게 그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큰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굳이 해명을 할 정도의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둘 다였을 것 같다. 구태여 나도 그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굳이 내가 먼저 왜 물어? 앞으로도 먼저 얘길 꺼내진 않을 거다.

 그래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거짓말을 싫어하지만 살면서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단, 그 거짓말이 상대에게 직접적 피해(정신적 충격 포함)를 주지 않는 경우와  불가피한 선의의 거짓말일 경우에만.


 꿈이 있었던, 그리고 꿈을 위해 노력하던 20대에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남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몇몇의 주변 친한 사람들만 알고 있었고 당시 남자 친구에게도 '때가 되면 말해줄게'(=들었을 때 잉? 하지 않고 아! 할 수 있을 정도로 니가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라며 무슨 대단한 비밀인 양 숨기곤 했다. 그리고 이젠 때가 되었다 싶었을 때 고해성사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그의 반응은 아주 무난했다.

 "아~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잘 어울리는데?"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고 나무란 것도 아니련만 지레 나는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이 꿈을 내가 왜 꾸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변명 같은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내 말을 단박에 자르고 이렇게 말했다.

 "안 되는 경우는 생각할 게 없지. 넌 될 사람이니까."

 엄연히 남 일이니까, 또 청춘이던 같은 20대였으니까 쉽게 한 말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긍정적인 사람이어서(대부분의 사람은 나보다 긍정적이야..) 이상적인 면만 보고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그 라고 몰랐을까. 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자신 없어하는 나를 위해 용기를 주려고 한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종종 한다. 종종 한다는 말은 지금도 그 말이 생각난다는 뜻이고 생각이 난다는 것은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다는 의미이다.  극한의 감정은 어떤 종류이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 그 말이 고마웠던 순간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어쩌나. 난 아직도 안 되는 사람으로 살고 있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밥벌이 걱정을 친구와 한창 하고 있는데 생각만 하다 지친 나와 달리 친구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얼마 전 외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민간 자격증까지 취득한 그녀는 가장 좋은 활로는 공부방을 차리는 거라고 했다.

 로또를 사자마자 1등을 그리며 돈 쓸 궁리를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대화는 가관 of가관이다.


 친구 : 우리 둘이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살면서 거기다 공부방을 차리는 거지. 너 교사 자격증 하나 걸어놓고.

 나   : 자격증 하나 아니고 두 개거든?(팩트 수정)

 친구 : 아. 그래. 주말은 안 하고 한 번에 4명 이상은 안 받을 거야.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나   : 그래? 근데... 우리가 어떻게 집을 구해?(현실 복귀)

 친구 : 그러니까. 그게 문제지. 우리가 무슨 돈으로 집을 구하냐고.(처음부터 의미 없는 대화였음을 인지)

 나   : 그래도... 잠시나마... 행복했다...(꿈은 꿔 볼 수 있잖아...)


친구는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어퍼컷을 날렸다.

 "집만 구할 수 있으면... 넌 다른 방에서 글만 써."

  놀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왜 니가 하는 거야??(역시.. 상상만으로도 잠시 행복했어...)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본다는 프러포즈 이벤트. 의외로 나는 꽃길 이벤트, 풍선 이벤트, 촛불 이벤트 같은 볼거리(?) 풍성하고 화려한 상황은 별로 그려본 적도 없고 특별히 부럽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내가 막연히 그려본 장면은 상대가 어떤 말로 날 현혹(!)시키냐는 것이었다. 유독 언어에, 특히 말에 민감한 내 성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말 잘하는 사기꾼을 조심할지어다..) 떡 줄 사람도 없는데 혼자 듣고 싶은 대사를 이래저래 만들어보기도 했다.

 친구가 했던 그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과 가장 가까이에 닿아 있었다.

 "이제까지 너무 힘들게 살아왔으니까 지금부터는 너 하고 싶은 거 해."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금치산자든 한량이든 덮어놓고 결혼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나도, 상대도(결혼을 할 정도라면) 알 것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돈  잘 못 번다고 날 무시하면 어떻게 해? 바람이라도 피우면 즉시 이혼할 건데 그때 경제력이 없으면 어떻게 해? 등등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안 해도 될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나에게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인생은 애초에 불가능하므로.


 그냥 듣고 싶은 거다. 뻔하지만 착한 거짓말이.

 형식적인 위로 말고 성의 없는 관용구 말고 전적으로 내 편에서, 날 위하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간절하다.

 지금의 내가 괜찮지 않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괜찮다고, 너 자체로도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거짓말인걸 알아도 괜찮으니까 달콤한 거짓말을 수혈받고 싶다. 거짓말 속 행간의 진심을 읽는 건 내 몫이니.

 언제고 드러날 거짓말로 사람을 기만하고선 내가 너한테 해명할 의무 있어?라는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태도에도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현실은 이토록 짜증스럽기만 하니까.

 안 될걸 알면서도 될 사람이라고 응원하는 마음, 지난했던 과거를 다독여주는 따뜻한 말.

 뻔한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 그 말로 위로받고 싶은 순간은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


 초등학생 아이가 학교에서 어떤 다툼 때문에 선생님에게 혼나고 집에 와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는 장면.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아아. 아이의 그 말.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 편이어야지. 내게 물어봐야지.

 -정혜신, '당신이 옳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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